이번호 보기


일불다불(一佛多佛) I - 온갖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중생의 몸과 평등무이(平等無二)하시다 -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예토와 비유경 - 김현산 1987년 06월 64호
남은 것은 죽음뿐
아직은 이른 아침이다. 같은 시장이라도 반찬가게 등은 이른 아침에 바쁘지만 그릇가게는 오후가 되어야 손님이 드나들기 마련이다.
늦가을 시장은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 아직 추위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볼일만 보고 황급히 사라져 버린다. 좌판을 벌여 놓았거나 가게문을 열어 놓은 상인들도 점방의 한 모퉁이에 탄불을 피워 놓고 쪼그리고 있다가 손님이 들어올 눈치면 그제서야 고개를 움직거린다.
시장의 중간모퉁이에 자리잡은 ㄱ씨의 그릇가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손님이 아닌 그의 친구 ㄴ씨가 함께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야 어째 쌀쌀한데 소주나 한 잔 마실까”
“그래, 가만 있어 봐. 내가 생선가게에 가서 머리하고 내장좀 얻어 올 테니까 찌개를 끓여 안주를 하자구”
“그거 참 좋다”
“그럼 내가 갔다 올 동안 냄비에다 물을 올려 놓고 소주 한 병 사와”
ㄴ씨는 ㄱ씨가 건네주는 돈으로 맞은편 식품가게에서 소주를 사고 탄불에 물을 부은 냄비를 올려 놓았다. 이윽고 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둘은 마주앉아 정말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 이 소주판에 끼어든 것은 둘이서 반 병쯤 비울 때였다.
“여보게 젊은이들 나도 한 잔 줄 수 없겠나”
“아, 예. 어서 오세요”
노인은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 시장에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하루종일 이곳 저곳을 다니며 밥이나 술을 얻어 먹고 잠은 이층 사무실 옆창고에서 자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 노인을 쫓아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누군가가 창고에 가서 노인을 깨워 아침을 먹이곤 하였다. 시장 사람들은 그 노인을 먹이고 재워 주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상사와의 싸움끝에 사표를 던지고 친구에게 얹혀지내는 ㄴ씨만이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세 사람이 어울리자 소주 반 병은 금방 동이 났다. 다시 소주를 더 사온 ㄱ씨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ㄴ씨에게 말했다.
“아참. 내가 아침에 수금해 올 데가 있는데, 저기 학교 앞에 다방 알지, 내가 금방 갔다올 테니 가게 좀 보고 있어라”
“그래 알았어”
노인과 둘이 남은 ㄴ씨는 소주를 몇 잔권하고 다시 담배를 권한 뒤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고향이 어디십니까?”
“……”
자식은 없으세요
“……”
“집은 어디예요?”
“……”
노인은 아무 대답도하지 않았다. 괜히 멋적어진 ㄴ씨는 다시 소주를 권하고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 옛날에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이 질문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갑자기 잔을 내려 놓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깊은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손을 봐. 나도 옛날에는 일깨나 했었지. 내 고향은 이북이야. 나는 혼자 이곳에 왔지. 곧 가족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어. 정말 막노동에서부터 안 해본 일이 없어. 이것 봐. 내 손을 보면 알잖아”
그 노인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손톱은 성한 데가 없었다. 손등에 패인 깊은 주름륨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늙으니까 일을 할 수가 없어. 고향에도 갈 수가 없고. 이제 완전히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 버렸어”
“……”
“내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야”
노인의 마지막 말은 들은 ㄴ씨는 갑자기 무거운 것이 머리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멍하니 앉아 있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마음자리가 편해야
변명은 아니다. 아니야, 변명이래도 좋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부터 갑자기 나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 본 것은 단지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으로 인해 나는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했다.
우선 나는 오늘 사무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세웠던 스케줄은 하나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갑자기 중간에 끼어든 일거리는 원래 계장이 맡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많다는 핑계로 그 일을 내가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어찌하랴. 상사의 명인데. 나는 내 일을 뒤로 미루고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간신히 계산을 맞추어 계장에게 가져갔을 때 그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 이런 계산하는 데 이리 오래 걸려요?”
“아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계장님 일 아닙니까! 또 내가 이 장부를 본것은 오늘 처음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목구멍에서만 빙빙돌 뿐이었다. 그저 밖으로 나온 소리는
“죄송합니다. 처음이라서 …”
제기랄, 나는 얼른 퇴근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오늘 오후에는 고교 동창생들과 만나기로 했다. 술이나 진탕 먹고 이 빌어먹을 사회를 저주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 때 약속 장소에 가려던 나는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하필 그날 명동에서 무슨 기도횐가 뭔가가 열린다고 전경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원래 순사라면 울다가도 멈춘 나이기에 멀찍이 서서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최루탄도 무섭고 사복을 입은 전경들이 학생들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도 무서워했다. 애당초 곁에 가기도 싫다.
나는 주위에서 서성대다 백화점 앞의 포장마차에서 소주 석잔을 걸치고 집에가는 버스를 탔다.
…이렇게 스케줄이 뒤죽박죽이 된 날은 유난히 피곤하다. 그리고 괜히 짜증도나고 누군가를 저주해 보고 싶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시켜 보았지만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나는 커다란 도심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너희들도 나하고 다를 바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은 그 말에 공감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래 좋다. 하지만 난 지금 누군가 저주하고 싶어. 그게 누구든 상관없어. 어쨌든 그도 이 사회의 일원일 테니까”
내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갑자기 앞의 시야가 탁 트였다. 그리고 내앞에 보이던 손이 움직이더니 드디어 그 손의 주인이 내 앞에 보이게 되었다. 그는 예순쯤 되는 노인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변명이겠지. 결국 나는 노인에게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은 채 별의별 생각을 하다 앞 사람이 내림으로써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우스운 놈이다. 나라는 놈은”
나는 스스로를 우스운 놈이라고 여김으로써 자신을 합리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나의 귀에 노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부부가 같이 탔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잘해 주면 뭘 혀. 마음자리가 편해야지”
마음자리가 편해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아까 내가 손을 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한 것이 마음자리가 편해지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것을.

어머님 I
“온 나라가 민주화니 뭐니 해서 시끄러운데 불교만 조용해요”
이 호균(서울대 사회과 졸) 씨의 어머니 오 보연 여사는 나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입을 열었다.
“호균이가 없어진 것은 지난1월 3일이었어요. 나는 그 애를 찾으려고 경찰서로, 안기부로, 시경으로 쫓아다녔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나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어요. 모두 모른다고만 하더군요”
오 보연 여사는 다른 어머니와 같은 평범한 주부였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 어머니가 민주화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게 된 것은 공무원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다른 어머님이 누굴 통해서 알아 왔는데 안기부에 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나는 다른 어머니들과 같이 안기부에 가서 데모를 했어요. 말이 데모지 내가 내 아들을 보겠다는데 그게 무슨 큰 잘못인지…”
이 호균 씨는 영장없이 20여일을 감금 당하다가 1월 22일 소위 제헌의회라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구속되고 나서 호균이를 만났더니 7명이 고문을 했다고 그래요”
이 사실은 언제나 그렇듯이 증거가 없으므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종철이도 죽었으니까 고문했다고 자인하지 않았어요? 죽지 않으면 증거도 없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꼭 에미가 고문증거를 위해 자식 죽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죽지 않은 것은 증거가 없다는 오 보연여사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인과법칙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닙 II
“불교는 생명을 존중해서 벌레도 안 죽인다고 들었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어요”
기독교를 믿는다는 황 현순 여사는 이같이 덧붙였다. 황 현순 여사의 아들인 이재연 군도 집시법 위반으로 형을 살고 나왔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를 믿지만 원하는 것은 모두가 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혼자서는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불교든 기독교든 모두 힘을 합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한 것 같아요”
부처님은 입멸하실 때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오늘날 계율을 스승으로 삼는 불교인이 있다면 과연 자장율사처럼 목숨까지 내놓을 수가 있을까

어머님 Ⅲ
“관악산 약수사에 나갔었지만 아들이 이렇게 된 후에는 아무런 해답도 얻을 수 없었어요. 오히려 기독교에서는 기도회도 해주고 면회하는 방법, 교도소에 책이나 물건을 차입해 주는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데 불교에서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요”
역시 집시법으로 구속된 바 있었던 김현국군의 어머니 이 옥분 여사의 말이다.
“구체적으로 그렇게 해주지는 못해도 법문 시간만이라도 신도들이 똑바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주었으면 해요”
광주에서 사람이 죽고 수많은 학생들이 구속되고, 고문받고, 죽어도 절에 나가면 듣는 법문은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그것이 이 옥분 여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한달에 한번이래도 우리 구속자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 시련을 극복해 나갈 법문을 해주셨으면 해요. 그런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텐데”
세분의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