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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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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7년 06월 64호
이 경은 육백부나 되는 반야경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경전이다. 옛부터 중국에서 전해 왔던 관계로 한문으로 독송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한글로 번역하여 외우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려운 한문을 습관적으로 외우는 것보다는 쉬운 우리말로 배워야 한다는 자각에서일 것이다. 또한 경전 이외의 일반 의식도 한글화하여 일반 불자들도 의식의 참뜻을 이해하고 함께 독송함으로써 경건을 더하고 일체감을 갖는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의식에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반야심경을 한글화함으로써 경을 쉽게 이해하고 수행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경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경의 제쪽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반야경의 핵심이 되는 이 경은 가장 짧으면서도 무한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 간략히 따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苦波羅密多心經)은 진리의 참된 뜻을 나타낸 것이요, 진리 그 자체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지혜로서 표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는 범어 프라쥬나(prajna)의 음역이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이 진실한 참 삶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분별하는 지식과는 구별되는 때문에 음역하여 ‘반야’라고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를 지혜(智慧), 분별하고 구분하는 것은 지식(智識)이라 하겠다.
‘바라밀다’는 범어 파아라미타아(paramita)의 음역이다. 이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중에서 ‘피안의 도달’이라는 과거 수동형으로 쓰이는 경우와 ‘피안에 도달한 상태’라는 완료형의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한역에서 지도(智渡)라는 뜻처럼 ‘지혜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된다.
‘경’은 수트라(sutra)의 번역이다.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꿰뚫는 것(貴穿)’과 ‘거두어 지니는 것(攝持)’의 의미이다. 설할 바 뜻을 꿰뚫고 교화할 바 중생을 거두어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독송용(讀誦用) 심경에서는 이제명의 위에 다시 ‘마하(摩詞, maha : 크다는 뜻)’, ‘불설마하(佛說摩詞)’ 라는 문자를 붙이고 있다. 석교목록(釋敎目錄)에 의하면 지겸(支謙)의 역본, 나습(羅什)의 역본,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번역본 심경에는 ‘마하’라는 두자가 붙어 있으나 현장(玄奬) 번역본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다.
원전 범본 외에도 서장문(西藏文), 몽고문(蒙古文), 만주문(滿洲文)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많은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흔히 줄여서 ‘반야심경’ 또는 ‘심경’이라고 한다. 전문이 14행 260자에 불과하지만 대반야경(大般苦經)이라 불리는 600권 반야경의 정수를 뽑아 추린 것으로서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에서 크게 중요시하고 있다.
심경에서 그 진리의 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거불래(不去不來)하며, 그 크기는 허공과 같고 시간은 시작과 끝이 없어 조금도 변할 수 없다. 그 넓기는 두루 법계를 감싸고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으며 그 자세하기는 아무리 작은 사물이나 티끌까지도 그것에 비유할 수가 없다.
그 자체가 드러났을 때는 삼라만상이요, 숨었을 때는 모양이나 이름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도의 스님 제바(提婆)는 “대반야의 요긴한 말씀을 적어 그 숨은 깊은 뜻을 드러내 보인 것으로 그 내용의 글은 짧지만 그 뜻과 이치는 멀고도 길다”고 했다. 수행하는 이들이 오래도록 부지런히 공부를 쌓지 않고서 능히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망정(妄情)이 생멸하여 아견(我見)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으로 참됨을 찾아나서 부처를 딴 곳에서 구한다면 차려진 밥상을 먹을 줄 모르며 주어진 지혜의 빛을 쓸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어리석은 병을 앓으면서 자기의 마음을 살필 줄 모르고 밖으로 의사(醫師)만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수행하는 과정에 있는 보살이지만 이미 성불한 분으로서 모든 세상을 관찰하시며 중생의 모든 액난을 어업(語業)에 의하여 구제해 주시므로 ‘관세음’ 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몸과 말과 뜻의 세가지로 업(業)을 짓고 있지만 의사를 소통할 때는 말과 문자를 통하여 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어업에 의한다고 하지만 신업에 의한 선행과 어업에 의한 선업과 의업에 의한 선사유(善思惟)를 모두 다 잘 관찰하시어 중생들을 모든 고통에서 구해내시고 즐거움을 주는 원력을 성취한 분이다. 지금 이 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는 안으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하고 밖으로 삼업(三業)을 관하되 공용에 의지함이 없이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는 까닭에 ‘관자재’ 라고 한 것이다.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실 때’라고 한 것은 중요한 내용이다. ‘행한다’는 것은 진행을 일컫는 것으로서 능히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것에 의하여 수행자는 수행의 목표가 완성되는 것이며 완성자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깊다’는 것도 분별을 떠난 지혜로서 두 가지 공을 증득하여 능히 할 것과 이루어야 될 목표까지도 없는 상태에 도달한 행위의 모양이다. 또한 이공의 도리도 있고 없는 모양을 떠났고 모든 희론을 끊었음을 말하므로 경계(境界)를 깊이 증득하여 분별을 여읜 지혜를 행한다는 것이다. ‘때’는 시간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유위법의 세계라 하고 이 세계에서는 거짓 시간을 설한 것일 뿐 실상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이 모두 공임을 비추어 본다’는 뜻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양을 밝힌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이기주의적인 삶과, 남을 이롭게 하는 삶이 있다. 이러한 삶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온갖 크고 작은 강물이 큰 바다에 이르기 전에는 각기 의지하는 조건을 달리 함으로써 물에 차별이 있고 물에 많고 적음이 있지만, 큰 바다에 들어가면 의지하는 조건이 한결 같으므로 많고 적음의 차별이 없고 또한 한 맛을 이룬다. 이와 같이 삶에 있어서도 각기 익힌 바와 습성에 따라 각각 다른 삶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진리의 큰 바다에 증득해 들어가면 지혜의 차별과 지혜의 많고 적음이 없어 오직 한 맛이듯이 일과 지혜를 받아 쓰는 데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공’이라고 한 것은 ‘없다’는 다툼의 있고 없음과 내가 더 낫다 못하다는 차별을 두는 유무(有無)의 집착을 없애 주는 뜻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있는 것이 곧 빈 것임의 이치를 어긋나지 않고, 빈 것이 곧 없지도 않다는 설에 어긋나지 않아 공임과 동시에 유이며, 공과 비무(非無)이므로 중도(中道)의 이치에 계합하여 불교의 참뜻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오온과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과 육경(六境 : 色聲香味觸法)과 육식(六識 : 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과 십이연기(十二緣起 : 無明行識名色文入觸受愛取有生老死)
와 지(智)와 득(得)과 그 일체의 관념(觀念)과 객체(客體)의 존재를 본질적인 관점에서 공무(空無)라고 관찰하고 아는 반야(般苦)의 입장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부정일변도의 허무라고 착각한 일이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지금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저 관념과 객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관념에 의한 잘못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실재론에 빠지는 것을 심경에서는 전도몽상(願倒夢想)이라 하며, 또 실체가 없다는 허무론에 빠져도 전도몽상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우리 각자의 참 삶을 일컫는 것이다. 걸림없는 삶과 두려움 없는 삶이요, 교만하지 않는 삶이며 쓰지도 달지도 않은 삶이지만, 그러나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생물처럼, 우뚝 자란 대지에 뿌리박은 나무처럼 언제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마음 자세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부정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대긍정이다. 이러한 위치에 들어설 때 평화와 안정과 번영과 통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것을 조화로운 삶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심경에서는 ‘그러므로 알라.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大神呪)며, 대명주(大明呪)며, 무상주(無上呪)며, 무등등주(無等等呪)니,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며, 헛되지 않는 것이다’고 결정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신주(神呪)란 총지(總持)의 뜻으로 지혜는 능히 모든 것을 다 간직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呪)란 주술(呪術)의 뜻으로 그것은 깊고 묘한 뜻을 가지고 부사의한 영력(靈力)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장애를 쓸어 버리고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을 ‘만트라(Mantra)’라고 하며 진리 그 자체로 존중되어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구송(口論)한다. 대명주란 큰 광명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뜨리는 주문이란 뜻이며, 무상주란 이승(二乘)의 경지를 넘어서 위가 없는 최고의 주문이란 뜻이요, 무등등주란 저보살의 경지로 넘어서 부처님의 지혜가 평등하여 비할 바가 없이 모든 것에 통하는 주문이란 뜻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밝은 등불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좋은 약이 모든 독기를 물리치듯이 모든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일체고를 제거한다’고 한 것이며, 관하고 행하는 일이 삿되지 않으면 그 증득하는 결과가 그릇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이다. ‘가테 가테 파아라가테 파아라상가테 보리 스바아하’ 라 하여 옛부터 번역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음만을 따라 외워 온 것이다. 만약 도심이 있어 온전히 지혜로운 사람, 괴로움을 벗어나 영원한 안락과 평화를 스스로 누리고 님에게도 누리게 하는 사람,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의 삶은 참으로 존경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도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안과 밖을 살피고 찾는다. 그리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진리가 저절로 나타나서 생사에 묶이지 않는 피안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이 경은 짧게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귀중한 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