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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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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법성 1987년 06월 64호
본 소고는 불교운동론의 정립을 위해 필자가 정리한‘시간과 공간의 운명 속에서’라는 논문의 일부 내용을 뽑아 수록한 것이다. 위의 글은 해인사승려대회라는 대중집회의 열기 이후에 집필되었다. 그 내용은 이론과 실천, 도덕성과 과학성이 양분화된 운동현실 속에서 그것들의 통일적 종합만이 불교운동 나아가서는 전체 민족운동의 정당한 활로를 개척할 수 있음을 논구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필자의 의도는 민중선(民衆禪) 이라는 이념에 전체적으로 집약된다. 아직 모든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죽어도 안되는 절망 속에서라도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받쳐줄 한가닥 희망의 빛을 향한 탐색과 추구를 그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상황으로부터 밀어닥치는 가슴 저미는 개인사적 고통마저도 우리는 결코 격동하는 민족현실에 외재적인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진정 양심을 지키려는 자 그 누가 분단된 조국 현실 속에서 마음 갚이 상처받지 않을 자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절망감이야말로 그리고 그러한 절망에서의 새로운 소생이야말로 개인사와 민족사, 민족사와 세계사를 매개하는 창조적인 우리들의 실천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 . 행위의 의미
현실 경험 세계 일반이 무엇인가를 묻는 제자에게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이라고 답한 불타의 십팔계설(十八界說)은 주체-객체의 관계와 인식 생산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육근 가운데 눈·귀·코·혀·몸으로 표시된 오근(五根)은 통상 우리가 몸이라고 모두어 부르는, 대상 수용과 대상 창조의 구체성을 가진 통로이며 의식의 물적 토대이다. (몸은 유식학에서 제8식의 상분이라고 말해지고 있으니 그것은 몸이 사유의 표상이자 사유의 물적 근거가 됨을 말한다.) 그리고 뜻(manas : 意根)은 대상을 자신의 내용으로 채움으로써 앎(識)으로 드러나는, 대상을 향한 정신의 비어 있는 지향이다.
곧 인간 주체(六根)는 몸(五根)과 마음(意根)의 통일적 결합체이며(몸이 바로 마음의 드러남이며 마음이 바로 몸의 작용 그 자체인) 세계와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자아이다. 주체는 언제나 나 아닌 다른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주체는 객체와 같지 않으며 객체를 향해 서서 객체에 의해 영향받고 객체에 영향주는 자기 통일성을 지닌(任持自性) 존재다.
그러나 주체가 객체와 참으로 다르다면 주체는 객체를 알수 없을 것이며 객체는 주체에 알려질 수 없을 것이다. (軌生物解) 우리가 대상을 알 수 있고,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으며, 일을 통해 대상을 변혁시킬 수 있다면 객체는 주체와 다른 것도 아니다(不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체와 객체는 다름이 아니기 때문에 주체는 대상을 마주치기 전에 대상을 미리 알고 미리 움켜쥐고 있으며, 대상은 주체 안에 이미 알려져 있고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는 서로 같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주쳐야만 비로소 새롭게 알고 새롭게 알려지는 것이다. 주체와객체는 닮아 있으면서도 닮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겹쳐짐의 운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서로 겹쳐짐의 운동은 개체적으로는 인간의 행위(業)라고 말해질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共業)이라고 표현되어질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활동 또는 세계 운동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행위의 개방된 지평을 십팔계설은 식(識)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곧 육식(六識)이라고 말해지는 삶들의 행위의 지평은 자아(六根)와 세계(六境) 속에서 생산되어지되 자아와 세계는 육식에 의해서 경험의 영역으로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識)은 주체·객체를 비로소 살아있는 구체성으로 생산하고 세계를 인간화하는 경험의 지평이다. 십팔계설(자아-행위-세계를 상호 내적 연관고리로 파악하는 세계관)은 자아란 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의식하고, 활동 안에서만 자신의 관심에 맞춰 대상을 선택하는(了別)하는, 산출되어 가는 자아임은 말해 준다. 그러므로 인식 주체는 행위 너머에 하나의 표적으로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식학(唯識學)은 대상을 향한 정신의 비어 있는(무규정의) 지향체인 의근(意根)을 행위너머에 하나의 실체로서 규정하는 사유를 제7식(第七識)이라 한다. (7식 곧 의근은 대상을 머금고 드러나는 제6의식의 틀 지워지지 않은 근거이지만 의식의 외적 주체인 것은 아니다.)
다시 불교는 객체(六境)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틀을 갖는 영역과 의식에 의해 표상되어지는 추상적인 제반 영역으로 나눈다. 주체처럼 객체도 전체적인 활동 연관 속에서만 스스로를 재생산해가며 상호주체적인 삶들의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만 인간의 세계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대상을 행위 너머에, 사회적 세계를 사회적 활동 너머에 있는 물자체(物自體)로 규정할 수는 없다.
불교는 행위 안에 생산되어진 주체를 식의 견분(見分)이라 하며 행위 안에 구성된 객체를 식의 상분(相分)이라 하며 행위 자체는 식 자체분(自體分)이라 한다. 이와같이 행위 안에 드러나는 주체·객체가 서로 의지해서 행위를 이루는 것이라면 식에 있어서 주체는 객관화된 주관이며 식에 있어서 객체는 주관화된 객관이다. 그러므로 객관화된 주관과 주관화된 객관이 서로 겹쳐져 이루어댄 행위와 사회적 활동의 총체적 과정에는 행위와 활동의 뿌리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유식은 식의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 한다. 식의 증자증분은 역사 운동의 부정이자 긍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자증분의 선험적 터전에서 주체·객체 ·행위는 서로 어울려 새롭게 생산되고 변혁된다. 식의 산출되어감이 이와 같으므로 인간의 앎은 단순히 대상을 기술할 뿐 아니라 대상을 변혁하며 인식 생산의 과정은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활동의 과정이자 구극적으로는 우주 운동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사회적인 모순상황은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활동을 통해 생산되고 다시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소외시키는, 행위 속의 모순이자 사회적 활동 속의 모순인 것이다.

2. 실천으로서의 선과 사회과학
모순 해결의 길 : 선과 사회 과학은 모두 인간 역사 속에 스며 있는 문제와 모순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대결이며 극복의 모습이다. 인간 역사를 의타기로서의 식(依他起相)이라 한다면 역사속의 모순과 문제 상황은 변계소집의 식(遍計所執相)이며 해방된 역사의 모습은 원성실의 식(圓成實相)일 것이다. 선과 사회 과학은 변계소집의 식을 원성실의 식으로 전환시켜가는 인간의 행위 곧 부자유의 역사를 자유에로 돌이켜가는 사회적 실천인 것이다.
선이 주관성과 개체성에 토대를 둔 실천 방안이라면 사회 과학은 객관성과 사회 활동의 총체적 과정에 토대를 둔 실천 방안이다. 그리고 선이 의식의 변혁을 통해 삶의 휴식과 사회적 존재의 해방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라면 사회 과학은 존재의 변혁을 통해 인간 의식의 해방에 기여하려 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識)에 있어서 주관이 객관화된 주관이며 객관이 주관화된 객관이라면 그리고 개체와 전체가 상호 유기적인 통일체라면 선과 사회 과학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개의 실천 방안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선(禪) : 선은 행위의 해방을 깨달음(覺) 또는 무심(無心)이라고 표현한다. 무심은 행위에 있어서 주체·객체의 실체성 타파(無自性)를 가리키고 있으며 깨달음은 주체·객체 ·행위의 실체성이 타파된 행위의 개방된 장(證自證分)에서 주체·객체 ·행위를 서로 소외됨이 없이 창조적으로 재생산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심일 때 깨달음이 드러나고 깨달음일 때 무심이 그 근저로서 놓여지게 되므로 무심을 통한 선적 휴식은 대상을 향한 새로운 앎과 앎을 통한 주체-객체의 변혁에 기여되어야 한다.
오늘날 민족사의 분단 현실이라고 이름(名)할 수 있는 하나의 상황(相)은 제 스스로 형성된 고착된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내외적인 제반 여건이 이루어낸(依他起), 변혁 속에 있으며 변혁 가능한 현실 상황이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에 엄청난 고통과 소외를 안겨 주고 있으므로 그것은 없다고 할수 없다(非無). 그러나 변혁 가능한 현실이므로 있음도 아니다(非有). 이와 같이 연기 속에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흔히 현실을 고정된 틀로 파악하는 자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허위 의식과 허위 이념을 재생산해간다. 그러나 선적 무심에 서 있는 자는 대상을 실체로 파악하지 않음으로 의식을 고착화시키지 않고 의식을 고착화시키지 않음으로 대상의 창조적인 변혁이 역사 속에 가능케 해준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선적인 실천을 다만 내면화하고 개인적인 휴식의 길로만 파악하는 신비적인 선사(禪師)의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선을 비실천과 동일시하고 실천을 밖을 향한 달려나감과 조직의 확장면으로 한정하려는 속류 운동가의 입장도 동시에 거부하는 바이다.
선적 실천은 결코 정체적인 자기 휴식만으로 제약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불교가 행하고 있는 선의 현실태는 선적인 자유를 역사 현실과는 무관하게 내면의 소유물로 붙들어 쥐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과 언어를 매개로 한, 물질의 직접 생산(사찰, 토지 운용 동), 문화 창조, 지식 생산(역경출판, 사상 운동), 대중 교회 활동이 선에 통합되어짐으로써만 이기적이고 내면적인 선의 정체성이 극복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의 현실이 안고 있는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방편없는 지혜는 죽은 지혜라는 경전의 교설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 철학자 하버마스(Harbermas)가 말한 바 기술적인 인식 관심에 의해 도출된 경험 과학 실천적인 인식 관심에 의한 해석학적 과학, 해방적인 인식 관심에 의한 비판 과학의 제원리 등은 불교가 말하는 방편지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선에 선이라는 자기 테두리를 남겨 놓는 한 선과 방편지의 결합은 일시적인 야합이나 기만적인 통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을 선 아닌 선으로 살려냄으로써만 선의 방편 수용이 자유롭게 성취되어 과학은 선적 직관에 의해 그 통일성의 근거를 얻게되고 선은 과학적 인식에 의해 그 구체성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선적 인식론을 토대로 착취없는 제도의 완성 전쟁없는 세계 건설계급 갈등의 창조적 지양을 구상한 신소천선사의 ‘새생각’이라는 저술이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선과 사회과학이 겹쳐진 최초의 사상적 작업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사회 과학 : 사회 과학은 객관적인 사회적 생활 과정에의 탐구와 변혁을 통해 인간의 자유에 기여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연기적인 세계관의 고찰을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사회 과학의 언어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 세계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너머에 있는 물자체가 아니다. 곧 사회 세계는 과학의 언어 그 자체까지를 포함한 사회적 생활 과정에 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사회 과학의 언어는 사회 세계의 반영일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세계의 재구성이며, 사실의 확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위한 당위에로의 발돋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연기론적인 언어의 입장도, 비판 사회 이론이 꾸준히 주중해 온 바와 같이 사실과 가치는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 과학은 동시에 도덕 과학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파악하는 자’와‘파악되어지는 것’의 실체성을 동시에 부정, 대상 인식을 주체적인 인식으로 바꾸어 주며 주체의 대상에의 간여를 도덕적인 책임감 위에서 수행토록 해주는 선적 실천이야말로 모든 과학적 인식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적인 인식 작업들이 선적인 근본지(根本智)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과학의 언어는, 주체·객체의 실체화 속에서 대상을 탐구하고 이용하고 조작하려는 도구적 이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실증주의는 관찰자로서의 과학자가 사회 세계를 가치 중립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곧 실증주의는 과학자-사회 과학-사회 세계의 분리에 인식 생산의 기초를 두고 있으니 이것은 불교에 있어서 육근-육식-육경의 실체화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로 과학의 방법론으로 귀납법(歸納法)을 지지하고, 대상에 대한분석과 검증을 통해 사회 이론이 구체적인 현실의 다양성으로부터 추론되어진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칼 포퍼는 변증법적인 사회 과학자들로부터 실증주의자라 비판받았지만 귀납주의자들과는 달리 연역적인 방법론(演繹法)을 과학의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에 의하면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제시된 연역적인 이론의 조명 밑에서 대상은 파악되어진다. 그러나 가설적인 이론들은 비판과 검증과정을 통해(일종의 귀납과 연역의 통합) 반증의 시련을 견딘 가설만 잠정적으로 과학의 이론으로 수용되어진다고 한다.
연기론적 입장에서 보면 모든 대상 파악은 주체의 인식 관심을 전제하며 ‘모든 이론은 객관을 머금고 있는 것이니 귀납적인 과학 언어는 연역적인 귀납이며 연역적인 과학 언어는 귀납적인 연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인식 관심에 이끌리어 창출된 과학적 패러다임을 다음 상황의 새로운 변화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지 않고(依他起相의 無自性) 패러다임의 반성을 상황의 고찰과 통일함으로써만 머뭄없는 세계의미화의 과정(圓成實相의 無自性)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변증법적 사회 과학은 그 분석의 출발점을 주어진 것을 변혁시키는 일상적 생활 과정 곧 생산 과정에 둔다. 그런데 분석되는 생산 과정은 분석자가 그 밖에 떨어져 있는 별개의 장이 아니라 분석자도 거기 참여하고 있는 전체적인 생활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과학적 분석은 대상적인 분석이 아닌 것이니 사회 과학이 분석하고자 하는 인간은 객체이자 주체이며 분석하는 주체는 주체이자 객체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사회 과학이란 사회적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고 하며 과학은 세계의 건설과 유지 및 변혁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생활 과정 속의 주체·객체의 상호 교환성을 말하고 생산 과정 속에 물질적 생산 과정 뿐아니라 지식과 관념, 사회 제도의 생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주관에 대한 객관, 개체에 대한 전체의 우위성을 계속 주장하고 견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쿠제도 변증법적 사회 과학의 폐쇄성을 반대하고 표현 양식의 역사적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변증법적 사회 분석을 통한 사회 변혁이야말로 마르크시즘의 포기되어질 수 없는 개념 근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사회 변혁을 객관적 구조와 전체성을 토대로 달성하려 하면 그러한 변혁은 급진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이에 비해 주관성과 다원적인 개체를 토대로 변혁을 추구하면 그러한 변혁은 점진적인 사회 개혁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포퍼는 주관적인 이론의 급진적인 변혁이 객관적인 사회의 비폭력적인 점진적 변혁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혁명적 이론의 대담한 안출과 옛 이론의 혁명적 뒤엎음이라는 정신적 영역에서의 급진주의가 실천의 영역에서의 모든 폭력의 회피를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연기론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과 사회적 존재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모든 급진적 변혁은 역사 운동의 점진적 과정의 운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점진적인 변혁은 존재의 급진적인 자기 전환을 매개해서만 그 정당한 방향성이 획득되는 것이다. 곧 ‘연기이므로 모든 존재가 공’이라는 사유 속에서 자아와 세계의 혁명적 전환이 달성되고 ‘공이므로 연기’라는 사유 속에서 부정되어야 할 바를 쉬임없이 부정하고 긍정해야 할 바를 간단없이 긍정해가는 영구 운동으로서의 점진적인 변혁이 성취된다. 그러므로 연기론 속으로 의식과 존재, 급진과 점진의 이원성은 동시에 지양되어지는 것이니(色心不二, 空假平等) 연기론적인 실천의 길은 모순을 부정해 가되 부정함이 없고(破而不破)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사회 질서를 긍정해 가되 긍정한 바가 없는 것이다(立而不立).
그리하여 타인의 운명에 대한 도덕적인 배려도 충만된 연기론적인 실천의 사람은 스스로의 가슴을 역사의 전체성에 확장함으로써 선과 사회 과학, 급진과 점진을 통합해 내고 다음과 같이 겸허하게 말하게 된다.
‘모든 정신의 자유는 몸과 세계라는 구체성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물질의 변혁은 정신의 자유와 함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