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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와 정진(精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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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만 1987년 06월 64호
선(禪)은 곧 생활이고 실천이라고 한다. 마전(磨磚)이라는 말이 그 실제를 보여 주고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선(禪)하면 좌선(坐禪)만을 생각케 된다. 우리가 좌선하는 것은 어떠한 다른 것보다도 이 방법이 마음을 고요히하고 심성을 밝혀 보려고 함에 있어서 가장 좋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더 이상의 무엇은 없다고본다 말하자면 앉아서 하는 선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목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제(結制)도 마찬가지다. 별도로 기간을 정해놓고서 용맹정진만 한다면 이는 잘못하다가는 결제를 위한 결제가 될 것이다. 평상시에 항상 하는 그러한 결제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결제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해제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결제와 해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결제가 곧 해제이고, 해제가 곧 결제라고 한다. 맞는 말인것 같다. 구태여 결제나 해제를 표현한다면 결제란 기후나 교통·보행이 불편한 여름이나 겨울에 한 석달씩 평소에 품었던 의단(疑団)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공부이겠지만, 굳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한다는 데는 좌선을 위한 좌선과 같이 결제를 위한 결제가 되고 말 것이다. 해제는 이러한 의단이 어느 정도는 풀려서, 이제는 유예(猶豫)됨이 없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결제를 푸는 것을 말하지만 어찌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과 맺는 것이 마음대로 가능하겠는가. 결제나 해제도 어디까지나 한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결제라는 말을 불방일(不放逸)이나 정진(精進)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긴장(緊張)이라는 말로서도 표현되어질 것 같다. 방일(放逸)치 않고 계속해서 정진할때에 자연히 의심은 사라지고 확신만이 생겨나며, 이완(弛緩)치 않고 긴장하는데서 실수도 없고 잡념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경에도 근신(勤愼)하여 방일함이 없으면 이것이 감로(甘露)요, 방일하여 근신치 않으면 이것이 사구(死句)라고 했으며, 사십이장경에는 사문이 도를 닦을 때는 마땅히 마음을 굳게가지고 용맹정진하여 때와 장소를 생각치 말고 중마(衆魔)를 파멸시켜서 도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진을 할 때는 너무나 느슨하거나 서둘러도 안된다는 것이다. 서두르면 심신이 피로하고, 느슨하면 본 바탕을 볼 수 없으나, 마치 새를 잡으려고 할 때에 급히 서두르면 놓치게 되고 한 눈을 팔면 날아가버리며, 거문고를 탈 때에 너무나 줄이 팽팽하거나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成實論).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진치 않고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때로는 좋지 않은 정진까지도 그 의미성을 부여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역시 자기를 발전시키면서 아울러 주위도 희망차게 하는 그러한 정진만을 일컫는 것이다.
l2연기에서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에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인 분별심이 생겨나며, 이어서 유(有)인 업(業)이 있어서 남(生)이 있게 된다고 하는데, 생이 있으면서부터 인생의 고난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응당히 받아야만 하는 이 멸(滅)의 고통을 자기가 달게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남의 일과 같이 생각하며, 때로는 전가(轉嫁)시키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생은 주어진 것이며, 이를 극복하는 데만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지금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딘다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기분 전환도 하고 여행 등도 해보지만 그 응어리는 항상 남아 있어서 일에는 진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생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사서 하겠는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것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 인생수업 삼아 고생을 한번 해 본다고 하지만 삶 자체에 이미 내재(內在)해 있는 고생을 더 사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고생을 말할 때에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은 우리가 고생이라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주관적으로는 낙일 수도 있고 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로 주관적으로는 고라고 하고 낙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는 반대의 감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경우를 포함하고 있지만, 문제는 항상 자기 주관이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은 그렇게 깊이 신경을 쓰지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고통이라고 느끼고 다른 사람도 고통으로 여기면 이것은 정말 비참한 형편이지만, 내 자신은 고인지 낙인지를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관찰하고는 고생한다고 하면 나는 이럴 때 정말로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이다. 고통스럽다고 자인하면 앞에서 말한대로 비참한 사랍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것은 고가 아니라 낙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생은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극복이 되는 것이며, 튼튼한 반석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통은 고통을 인식함으로써도 해결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낙을 즐김으로써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둘을 떠난 상태에서 생활할 때에 진짜로 고통을 여읜 안락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참다운 고생이란 객관적인 판단에 있지 않으며, 고생하는 사람이 고생이나 행복이라고 못 느낄 때에 그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옛적을 생각해 보니까 그 때 그랬었구나 하는 추억일 수는 있는데, 이 추억이 고나 낙이 아닌 것과 같이 현재 이 사람이 옛날을 단순히 추억하는 것으로만 회상해서 미련이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도 또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구(文句)는 육조 혜능(惠龍)의 말에, 좋은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쁜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不思善 不思惡) 진짜로 생각한다는 말과 같은 내용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미쳤다’든지 ‘미친 사람’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말은 물론 정신 분열이 일어나서 행동이 광적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만, 다른 뜻에서는 정반대로 쓰여지고 있다. 즉 어느 정한 목표에 이르는 것을 ‘미쳤다’는 등의 표현으로 쓰고 있으며, 이에 이른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이때도 본인은 자기가 미친 사람인지 아니면 미친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상태를 인식했다면 그는 이미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인식한 사람일 뿐이며, 다시 또 그러한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러한 의미에서 미친 사람이어야 한다. 아직 덜 미치고, 미치지 않으려고 하니까 주장이 많고 남의 장단점이 자주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인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장·단점이 없고 변화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어떻게 남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우리는 설미치고 못 미치고도 미친 척하거나 혹은 미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 많고 변화도 많으며 진실이 둘인 것이다.
여기에서 미치는 것은 정진을 말한다. 고생을 못 느끼는 것도 정진력이다. 정진이없는 생활이란 무의미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차라리 실패를 무릅쓴 정진이라도 안하는 것보다도 낫다는 것이다. 정진은 삶 그 자체이다. 정진함으로써 멸이나 병(病)이나 노(老)까지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 밝음은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 어둠과 밝음은 둘이 아니라 이면을 가진 한 물건이다. 어둠이 두려운 사람은 어두움 때문에 밤길을 못가는 것과 같이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죽음 때문에 사는 것도 현재 큰 짐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시각각으로 싫어하는 죽음이 점점 다가옴을 스스로가 느끼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말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닐 것이며, 생각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언설(言說)은 훌륭할지 모르나 신용키 어려운 사람이다. 잘 아는 것(解)도 중요하지만 실천 측 정진함(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해행일치(解行一致)를 향상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기원전 4세기경에 알렉산더왕이 인도를 침범한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 당시의 사문들과 논쟁이 벌어졌는데, 정복자로서의 오만함과 문화적인 우월성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왕은 사문들을 대하였던 것이다. 마침 자기를 보필하는 대철학자가 함께 있어서 알렉산더는 이 철학자에게 명령하기를 저 사문들을 골탕먹일 수 있는 방법을 궁구해 보라고 하니까, 그 철학자는 어려운 질문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질문인즉 묘안을 짜서 문제를 생각해 놓고, 만약에 정확히 잘 대답을 하면 살려 주지만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닐 때는 가차없이 죽인다는 조건을 부쳐서 사문들에게 물었던 것이다. 질문은 대강 이러했다. “언제까지 사는것이 잘 사는 것이냐?”라고 철학자가 물으니, 사문들은 서슴없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할 때까지 산다”고 했을때, 철학자인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명답이었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대어 결국은 나무더미 위에 올려 놓고 사문들을 태워 죽였던 것이다. 이 때에 사문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하거나 생떼를 쓰지 않고 초연히 죽어갔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본 수 많은 병사들은 죽음에 대해서 초연하게 임하는 사문들을 보고는 감탄해서 자기들의 본국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사문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신(確信)이라고 할까 신념(信念)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확신이나 신념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는 정진이나 결제는 무가치하다고 본다. 끝없이 정진할 때에 확신은 저절로 굳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집착하지 않는 정진만이 최상의 수행이다. 가치에 대한 의미성을 너무나 부연(敷演연)해도 본래의 뜻을 상실할 수가 있다. 그냥 정진할 때에 차차로 정립이 되어서 확신도 생겨나는 것이다. 정진은 중선(衆善)의 원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