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結制)와 정진(精進)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석자명
1987년 06월 64호
그렇다. 승가는 화합 대중이다.
승가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인지? 또 그 당위적 근거는 무엇인지? 이 시점에서, 아직 한국 불교가 이조 오백년의 콤플렉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 때, 대중 생활과 그 윤리적 자각에 대해 살펴본다는 것은 자못 현실적으로이 땅의 불교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 요청되는 바라 할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윤리의 등장은 자연적인 삶의 상태에서 문명 시대의 도래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윤리의 등장은 문명의 쇼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사이의 마찰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편적이고 평등한 질서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윤리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윤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데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윤리적으로 인간을 구속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삶의 문제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대부분은 윤리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도덕 규범이 행동 양식을 규제하고 가치 판단의 준거를 이루고 있는데, 승가의 대중생활에서 윤리적 도덕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계율 또한 마찬가지로 수범수제(隨犯隨制 : 범함을 따라 제정함)라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치 해진 옷을 기우듯이-
오늘의 한국 불교에 있어 무엇이 문제이고 어느 부분이 가려운 곳인지 정확히 집어내어 다스린다는 것은 승가의 생활을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 윤리와 가치관이 6.25라는 참혹한 민족 상잔을 겪으면서 확 뒤집혀졌다면 한국 불교에 있어서 윤리감각이 깡그리 손상된 것은 ‘불교 정화’라는 물리적 힘으로 재산 분규를 시도했던 과정 속에서 주먹쟁이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점이다. 이 모두 근 반세기 가까운 일제치하라는 어두운 터널을 건너오면서 무지몽매하게 눈이 멀었던 데서 그 원인의 한가닥을 찾을 수 있겠는데 이 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반성되고 비판되어야 할 문제이다.
오늘의 승가의 대중 생활에서 윤리적 자각이 회복되어야 함은 당위적 요청이며 이는 교육과 수행을 통해서만이 그 실현이 가능하리라 본다. 대중생활의 근본은 대중정선에 있다. 대중(大衆 : Parsad)이란 출가 수행자인 비구의 모임으로 4인 이상일 때 성원이 된다. 대중은 마땅히 늘 청정성을 유지해야 하며 이러한 대중 정신은 계율을 바탕으로 지켜진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중도의 교법은 수행자가 법에 근거를 둔 생활 방식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로서 이를 계라고 한다.
출가자의 생활이 초기에는 걸식과 분소의와 나무 아래서 좌선하는 것, 부란야라는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약을 쓰는 것 등의 검소한 무소유의 생활에서 점차 한 곳에 정착하는 승원 생활로 이전함에 따라 공동체 생활로 바뀌어지게 됐고 그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이 정해져야만 됐으니 비구들이 지켜야할 행위 규범을 율이라 한다.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이라 할 수 있고 율은 타율적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기 위해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야 함은 이미 초기부터 설해져 있는데 삼학의 관계는 흔히 계를 말미암아 정이 생기고 정을 말미암아 지혜가 생긴다고 말한다. 여기서 궁극적인 목적은 지혜를 얻음으로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인데 이 삼학은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되는 불교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출가수행의 길에서 승가의 대중 생활을 통해 인격을 수련하고 법을 배워 실천하는 데 있어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 양식과 생활 규범은 그 때와 장 위해 계율을 존중하는 정신을 길러야 하리라. 율장에도 계율은 불법의 수명이기에 계율이 살아 있으면 불법도 살아 있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점에서 오늘의 승가의 대중 생활의 윤리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자(自恣:Pavarana) 의식을 전통 의식에서 찾아내리고 각 나라마다 그 기후와 풍토와 생활 풍습에 따라 적절하게 변용시켜 받아들였던 것이니 외적인 소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의 근본 정신에 충실하여 다양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대단히 훌륭하나 한편 생활 양식의 세속화 내지 타락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출가 수행자들의 생활공동체로서 승가의 대중 생활은 동일한 이념의 모임이며 철저한 평등성에 기초하여 생활도 엄격히 법에 따라 지켜졌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 여래의 바른 법이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기 위해 계율이 있어야함을 생각하셨고, 계율로써 모든 제자들이 그릇된 행동을 미리 막고 바른 법을 수행하는 데 게으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꽃다발이 바람에 날려 흩어짐을 막기 위해 끈으로 묶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종족과 다른 성과 다른 집안에서 출가하여 제각기 다른 성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대중 속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질서가 문란하고 계율이 존중되고 있지 않은 이때 대중 생활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숙된 인간의 윤리적 자각과 그 실천이 따라야 하리라 본다. 인간이 한 개채로서 궁극적으로 도덕적 자율의 주체임을 인식하여 그 존귀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현금 많은 승가의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은 이같은 인간의 도덕성에 눈뜨지 못한 데서 연유함이 태반이라 느껴진다. 그리고 ‘인격’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갖는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인격의 동질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만이 윤리성 회복은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불교의 윤리 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인 계율을 준수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으며, 우리는 하루 속히 승가의 청정성과 성스러움을 회복하기 소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직후 가섭을 상수로 하여 우팔리에 의해 율장이 결집되었으니 융의 전통적 존중과 실권은 남방불교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지속돼 왔다. 반면 대승불교의 경우 율의 조목에 구속되기보다는 계의 근본 정신에 입각하여 자유로운 해석을 내 실천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내가 출가 후 20년 동안 한번도 자자의식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물론 대중공사를 통해 시비를 가리고 대중의 생활을 결정해 나가고 있지만 좀더 엄격한 수행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하여 자자의식은 꼭 살아나야 할 것이다. 율장에 의거해 자자를 살펴보면 자자란 여름 안거의 마지막 날 같은 곳에서 안거하여 함께 수행하던 모든 대중들이 같은 곳에 모여 그동안의 생활 중에 보고 듣고 의심하던 일로써 자기가 범한 죄를 대중 앞에 고백하여 참회하는 의식이다. 석달 간의 수행 기간 중 사람들은 흔히 어리석어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하기에 마땅히 자기의 죄를 드러냄으로써 안으로 삿됨이 없고 밖으로 청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어 이를 자자라고 하니, 모든 비구로하여금 고독하지 않은 까닭에 각각 죄를 생각하고 드러내어 참회하는 연유로 괴로운 말로 조복하여 청정함을 얻어서, 스스로의 마음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죄가 없어진다고 율장은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자자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법다운 화합한 자자, 법답지 못한 화합한 자자, 법다운 별다른 대중의 자자, 법답지 못한 별다른 대중의 자자가 그것이다. 이중 오직 법다운 화합된 자자만이 여법하게 인정되는 것이며 나머지 셋은 옳지 못한 것이니 많은 계율의 조목이 육군비구에 의해 생겨났듯이 이 자자 또한 육군비구에 의해 다른 이름의 자자들이 생겨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있어 윤리는 선·악 판단의 문제를 언제나 동반한다. 우리들이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기를 요구하며 철저히 따지려는 규범 윤리로부터 윤리적 명제를 분석하여 들어가는 메타윤리학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실증적인 면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가치 판단과 사실 판단의 거리를 떼어놓게 되었으나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선·악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살펴보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에 입각하여 선·악업보를 말하고 있다. 신·구·의 삼업으로 십악업을 일으켜 악에 떨어지기도 하나 이 십악업을 돌이키면 곧바로 십선업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선·악의 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더 나아가 존재의 실상에 이르게 하는 데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있는 바 수행을 통해 깨달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러한 상대적 윤리를 뛰어넘는 길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는 방편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도덕율에 있
어서도 그 근거를 제일원리로서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더 이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명제로서 받아 들일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방편은 어디까지나 도덕율의 절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그 목적은 인간의 자유로운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으니 깨달음이라는 자애중의 세계를 통해 스스로 인격을 완성시켜 윤리적 자각을 회복시키게 한다.
서로 다른 인간들의 모임인 대중 속에서 각자의 근욕성에 맞춰 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윤리란 집단에서 파생되는 문제이듯이 계율 또한 대중 생활 속에서 윤리성을 일깨워 대중을 편안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이다.
오늘의 불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길은 잃어 버린 대중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고 이는 윤리적 청정성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리라 본다. 승가의 청정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부처님은 자자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마땅히 자자정신을 다시 살려대중 생활의 길잡이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자의 근본 정신은 참회에 있다고 본다. 고백하여 참회하므로 청정해지고 법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화합을 깨는 어리석은 자와 청정치 못한 자와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삼분의 정재를 사유화 내지 독점하는 자들은 마땅히 참회해야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입각해서 승가의 대중 생활이 이루어져야 함은 재삼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승가는 화합 대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