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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고려대장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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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이윤수 1997년 12월 190호
노래하는 고려대장경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 조명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저마다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문화재에 깃든 정신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해석을 가한 작품들이 선보이는 현상이다.
이 곳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코너. 벽면에 한지를 떠서 만든 악보들이 줄지어 있고 바닦에는 대장경판과 똑같은 크기의 경판들이 도열해 있다. 글자라고는 새겨지지 않은 텅 비어 있는 경판, 그러나 복제된 수십 장의 악보에 담긴 장엄한 선율이 전시장에 가득 넘쳐 흐른다. 고려대장경 속에 담긴 선조의 숨결과 우주적 정신을 선율에 담은 김수철의 음악이다. 이 작품의 설치 작가는 중견 조각가 윤영석 교수. 목판과 악보로 이루어진 침묵하는 작품 사이에 노래하는 고려대장경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고려대장경의 정신은 무아와 통일이다. 저마다 자신을 잊고 자신을 버린 채 오롯하게 하나돼 고려대장경 조성에 힘썼던 민초들이 아니었던가. 나무를 제련하고 나무를 쩌내고 바닷물에 담그고 말리는 이웃들, 사경을 하고 판각을 하고, 교정을 보던 이웃들. 하나의 고려대장경판이 완성되기 위해 무수한 백성들이 흘렸던 땀과 고뇌는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 창작의 성성한 기운은 이제 우리 곁에 새로운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무가 노래하고 목판이 악보가 되는 일, 그건 고려대장경의 거듭 태어남이다. 경전의 가르침이 음악이 되고 벽에 걸린 조형물이 되며 새롭게 대중 속에 모습을 나투는 새로운 문화운동 속에 고려대장경은 다시 태어나고 있다.

데이터 뱅크 속의 고려대장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대학에는 동아시아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루어스 랭커스터 교수의 방이다. 세계 불교경전전산화협의회의장, 사십오년 동안 불교를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마흔다섯 해 동안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뱃어, 그리고 한문 등으로 이루어진 불교경전을 비교해 색인작업을 마쳤다. 신수대장경이 고려대장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 세계 속에 고려대장경을 알린 그런 랭커스터 교수를 두고 사람들은 제2의 수기스님이라고 부른다.
조촐한 그의 방안에는 컴퓨터가 몇 대 놓여 있다. 그 컴퓨터가 오늘의 장경각이다. 세계의 경전을 전산화 작업하는 산질이다. 산스크리트, 팔리 텍스트, 버마와 티뱃 텍스트까지 포함하는 불교자료의 종합적인 ‘데이터 뱅크’ 의 구축이라는 야심만만한 계획이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 계획에는 미국, 벨기에, 일본, 대만, 홍콩,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연구소들이 인연을 맺고 있다.
몇 년 뒤에는 우리의 고려대장경뿐 아니라 일본, 중국의 대장경을 비롯한 세계의 다양한 대장경 버전을 접하게 될 것이다. 전산화 작업을 통해 고려대장경은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매체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필리어든 영어든 한문이든, 부처님 말씀을 한 가지로 통합하는 작업이 이 곳에서 펼져지고 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웃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부처님 가르침 하나에 귀기울이고 신심을 하나로 모으는 불사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역사와 문화와 민족의 삶을 하나의 불심으로 엮는 작업, 그건 끈질긴 생명력의 소산이다. 시디롬으로, 인터넷으로, 체계적인 데이터 뱅크로, 고려대장경은 오늘도 살아 있는 정신으로 자비하신 부처님 음성을 세계 속에 전하고 있다.

바람 타고 나부끼는 고려대장경

티뱃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타르초’ 이다. 경판을 오방색의 헝겊에 찍어 걸어둔 것을 말한다. 사원 주위에도 마을 입구에도 타르초의 물결이 허공에 가득하다. 형형색색의 헝겊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뿐만 아니다. 거리에 뒹구는 돌맹이 하나하나에도 그들은 옴마니반메홈 진언을 빼꼼하게 써 두었다. 왜 티뱃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늘 위에 걸어 놓는 것일까. 왜 그들은 지상의 모든 것들에 진언을 옮겨 놓는 것일까.
이 땅의 신심 있는 백성들이 돌을 쌓아 석굴암을 조성하고 고려대장경을 판각할 때, 고원지대의 황량한 들판에서 그들은 신심을 바쳐 조성할 만한 것을 찾았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 돌 하나에도 마른 바람에도 부처님 말씀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타르초를 허공에 띄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오방색의 타르초는 히늘에 나부낀다. 부처님 가르침이 바람 타고 날아가 온누리에 가득 퍼지길 기원하는 그들의 신심이다. 우리의 견고한 석축처럼, 그런 견고한 신심이 경전 가르침을 깃발처럼 나부끼게 만든 셈이다.

연꽃 같은 생명력의 고려대장경

다큐멘터리 고려대장경을 제작하면서 찾아낸 성괴물 가운데 하나는 ‘지천사가 지금의 시청 앞 프라자 호텔’자리였음을 밝힌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점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께서 일러주셨다. 잠시 지나는 이야기로 학자마다 왜 지천사에 대한 학설이 구구한지 모르겠다고 했던 이야기를 고맙게 기억하시곤 손수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여, 며칠 만에 자료로 확인해 주셨던 것이다.
몇 십 년째 고려대장경 관련 논문마다 ‘독립문 자리’ 라느니, ‘돈암동 홍천사의 오자’ 라고 번갈아 베껴지던 논문들이 얼마나 성의 없는 내용이었던가.
얼마전 지천사 일대 곧 남대문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일대가 온통 연꽃으로 만발한 연못이었디는 기록을 찾아 읽었다.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지천사 앞에 연못을 팠다는 것이다. 한때 연못을 메웠다가 경복궁에 불이 자주나 다시 연못을 팠다는 기록과 함께.
가슴이 풍광거리며 뛰는 회열에 젖었다. 서울역 일대에 만발한 연꽃! 지천사는 얼마나 큰 절이었을까? 그리고 그 장관은 어떠 했을까?
음력 오월, 연꽃이 만발해 있었을 것이다. 빗속에서 오교양종의 스님과 군사들이 그 연못을 돌아 고려대장경을 이운했을 것이다. 연꽃의 향기 가득한 도량에 머물렀을 고려대장경.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묻고도 결코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연꽃은 진흙뻘에서 뿜어 올린 기운으로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꽃을 피운다. 처염상정의 꽃! 연꽃이 진흙을 뒤덮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고려대장경은 그런 생명력으로 오늘 우리 곁에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고려대장경은 장경각에 뿌연 먼지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박제화 된 유산이 아니다. 우리의 고려대장경은 ‘타르초’ 가 지닌 바람의 정신처럼 이땅 고을고을로, 온 세계로 번져가고 있다. 마치 부처님이 화신불로 여러 모습을 나투시듯, 마치 부처님이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근기에 맞게 설법하듯이 고려대장경은 우리 곁에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성보 유산의 참된 보전은 ‘옛 지혜’ 까지 보전하는 일이라 했다. 옛 지혜, 그 원형을 지켜가며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다종다양한 오늘의 문화로 고려대장경은 그렇게 강인한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