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래 불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까운 친척 중에는 스님도 계셨으나 불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카톨릭 재단에서 세운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약 4개월의 예비신자과정을 거쳐 그 해 8월에 영세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배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리와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제도, 그리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해 주지 않는 신부님에 실망하여 어린 마음에도 자유인自由人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하고는 영세를 받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대학大學》,《논어論語》와 《맹자孟子》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 해 여름철 해인사에서 공부한 이후에도 우리는 화엄사로, 수덕사로, 그리고 법주사 등으로 옮겨다니며 공부하는 동안 불교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가정형편과 병역문제 등이 겹쳐 사시司試합격의 꿈을 접어 버리고는 한국은행에 들어가면서 바로 입대를 하였고 그 후 오늘까지 직장인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불교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여름 어느 토요일로 기억된다. 사무실이 부족하여 임차賃借해 사용하고 있던 남대문 옆에 있는 대한화재 건물에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하여 지하 식당가에서 식사 중이던 직원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사고현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평소 집사람의 기도 덕분으로 신장神將 님들께서 도와 주셨는지 입었던 양복이오그라들고 온몸에 시커먼 흙먼지만 뒤집어썼을 뿐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나왔다.
그 뒤로부터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생사生死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불교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3년 가을 독일로 연수를 가게 되었는데 고색이 창연한 고도古都 로텐부르그의 다락방에서도 염주를 굴리며 《반야심경般若心經》과 《천수경千手經》을 염송하곤 하였다. 그 후 은행감독원과 감사실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지방출장이 잦은 덕택에 주말이면 명산名山자락에 위치한 웬만한 절은 모두 찾아가 부처님 전에 참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 모두가 다겁생래토록 쌓아온 복으로 생각된다.
요즈음도 시간 나는 대로 불교 관련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들으며 주요사찰의 인터넷 사이트를 자주 방문하다가 보니 불교계 돌아가는 모습은 그런 대로 소상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불교 관련 사이트의 내용 부실, 장애인·어린이 포교에 대한 소극성 등은 다소 나아졌다고는 하나 다른 종교 사이트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법학도 출신인 나로서는 고시원에 대한 무관심은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다. 신림동에는 4만명 가까운 고시 수험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매년 ‘고시촌 축제’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선교활동으로 불교계의 포교 강화에 대비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선제공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독실한 불자 고시생 전도하기 운동’까지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불교계는 이러한 고시촌을 황폐한 불모지로 방치하고 있는 형편이다.
예전에 절에서 공부하여 법조인이 된 사람들이 불교계에 얼마나 우호적이며 협조적인가 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문제는 앞으로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의 김태복 장군 재판 등 여러 가지 불교 관련 소송에서 보듯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기계적인 세속의 잣대로 저울질하게 되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판결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니 만큼 판결을 내리는 사람의 법적 양심 못지 않게 인생관·세계관·종교관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재판 그 자체를 비판하기에 앞서 각계각층에 지불교인知佛敎人 내지 친불교인親佛敎人을 많이 배출하는 것도 문제의 또다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