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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승가가 해야 할 일 - 계율 논의를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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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편집실 1997년 12월 190호
요즘의 한국불교를 돌아볼 때, 우리 승가가 승가 자신의 문제와 미래 불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단순히 다종교사회에서의 불교의 경쟁력이라든가, 정보화사회에의 적응력을 고민하자는 것이 아니다. 종단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고자 하는 불교적인 해법이 우리에게 마련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종단의 중첩된 현안이나 제반 사회문제는 묻고 대답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토론의 장에서 한꺼번에 풀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호흡을 갖고 비전을 창출할 수 있는 준비를 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종단안팎의 문제에 대해 자료에 근거하여 논의하고 밖으로 주장을 천명하고 열린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지속적인 이러한 노력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되고 이는 바로 미래의 비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일 년 동안 계율에 관한 논의가 종단 안팎을 맴돌았다. 일 년 동안 과연 어떠한 논의의 진전이 있었고 현실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공론화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단, 일 년 동안 우리가 얻은 것은 계율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식조차 정당한지 의심해 보아야 할 처지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계율에 대한 문제의식을 문제 삼는 종단 한편의 주장은, 계율은 부처님 말씀이고 종단의 색깔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보편성을 가지는 진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계율에 관해 문제 삼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밖에 안된다는 단정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계율 자체가 수행자의 품위와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 상황의 필요에 따라 제정되었다는 것은 승단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대중의 문제의식을 ‘불경不敬’이라는 까닭으로 자체를 금지한다면 ‘불경不敬’ 은 또다른 도그마의 표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승려 대중은, 현재의 한국 승가는 계율에 관해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계율을 현실에 맞게 다시 제정할 것이냐,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이냐 하는 결정은 차치하고서라도 계율에 대한 논의 자체는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 논의 속에 한국 승가의 고민이 묻어나고 문제에 대해 합의된 견해가 도출되고 그 속에 한국승가의 미래를 이끄는 비전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율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은 현실적으로 이미 승가의 피부에 닿아 있었다. 한 예를 들어 승려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에 대해 단일 조계종단에 참여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어떤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먹고 마셔도 된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안된다고 한다. 또 일부에서는 먹는 것도 아니고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한다. 합의된 원칙이 없는 상태에서 시비가 오가고 일반인들에게는 혼란을 가중 시키고 있다.
승가내부의 원칙이 없는 혼란은 승가의 위상을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이것은 바로 승려의 부도덕과 연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윤리적이어야 할 승가가 부도덕하게 비친다면 그것은 승려 낱낱의 행위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맞는 계율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끝없는 보살행으로 불교의 이성을 실현함으로써 공경 받고 공양 받아야 할 승가에 일반대중의 존경심이 사라져 버린다면 승가의 존립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떤 무원칙한 계율의 아량을 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원칙이 없으므로 존경이 사라지는 종단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승가 내부에 계율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서고 그 원칙이 승려 낱낱의 행동과 정신을 보듬고 제어 해 나갈 때 승려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라는 전형의 창출이 가능하고 창조적인 수행이 가능할 것이다. 결코 기계적인 계율의 해석이 아닌 승려 대중의 삶과 역사 인식에 기초해 재해석된 계율에 근거한 승려의 삶과 행동에의 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화된 계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 승려가 실아있는 보살행을 펼치듯 계율 또한 살아있는 계율에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분별의 논리로써는 아무것도 안 된다고 한다. 분별로써는 늘 그 범주 안에 머물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것은 도인에 의한 구제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도인이 아니고 이 세계 또한 도인들만이 상존하는 열반의 세계는 아니다. 우리는 아직 범성의 치열한 자기 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실존들이고 이 세계 또한 분별과 대립을 동인으로 열반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가진 아직 미완의 세계일 뿐이다.
이러한 실존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초한다면 분별심을 가지고 범凡과 성聖을 가리고 그 속성을 이해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분별심을 통해 범凡이 성聖으로 전이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수행의 문제를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계율의 문제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칼날 같은 분별심인지도 모른다. 분별심을 가지고 정확히 따져보고 정리해 보자. 분별심으로라도 그것에 합의하고 동의하면 그것을 가지고 밀고 나가 보자. 그렇게 할 때 분별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분별심을 먼저 뛰어넘어 문제를 이루려 하면 현실과 맞지 않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을 우리는 종종 보아오지 않았는가.
이 계율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금지조항의 자구수정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계율문제는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지금 한국불교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세우지 않고서는 비전도 없다. 자기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사상과 정신으로 자기 삶의 문제를 다루고 시대의 문제를 진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단의 운영이나, 사찰 경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불교사상과 정신으로 내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시대를 진단하고 교단 문제, 한국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불교사상과 정신으로 풀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는가. 이것을 되돌아 보지 않고서는 불교 신도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불교 발전은 오지 않는다. 온 국민이 다 불교신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불교사상과 정신과 관계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불교신도의 양적인 증가를 위해 포교에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왔다. 그래서 지금은 이천만 불자 운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우리의 포교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교단의 질적인 발전을 불려오지는 못했다.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전이되지 못할 때 그 양의 증가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종교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된 우리 사회의 삶에 질적인 변화가 있었는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 질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든 상황이다.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하는 과제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확립하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한국 불교도의 양적인 증가는 질적인 변화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국 불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불교사상으로서 자기 정체성 확립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계율은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그 기초가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한국 불교의 장래는 어둡기만 할 뿐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승가는 정확하게 계율을 지키지 않고 짐스럽게만 생각하고 있다. 계율은 계율대로 현실의 반 계율적인 행위는 행위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것을 우리는 승려 개인의 품성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승가를 방치하는 또 다른 직무유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라는 의문을 대중적으로 던지고 그 물음에 대중적으로 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은 선종이라는 우리 불교의 특성에 근거한 합의된 이해나 의견이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계율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해 종단의 종지宗旨, 종통宗統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계종은 과연 어떠한 종파인가? 구성원들 저마다의 입장차가 있겠지만 조계종을 선종이라 규정해 보자. 그렇다면 선종에 맞는 율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계율문제에 대해 사분율도 끌어왔다가 범망경도 끌어왔다가 청규도 끌어와서 쓰는 뒤죽박죽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의 율장을 가자고 현실에 적용하려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석해도 맞고 저렇게 해석해도 맞고 하니 술을 마셔도 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계율을 어긴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
조계종을 만일 선종이라 규정한다면 율장을 선종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그 다음 율을 지키고 처벌을 하고 정리를 하고 기준도 제시해야 한다. 선종이라고 표방하면서 사분율을 가지고 그 사항을 규제한다든지, 범망경을 가지고 규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의 계율문제는 그 심층을 파고 들어가면 바로 조계종 종지, 종통의 문제와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조계종의 종지, 종통에 관하여서도 기본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조계종의 종지, 종통을 바르게 세우는 일은 이 계율 논의의 기본 전제가 되는 일이다. 종지, 종통을 세우면 자동적으로 거기에 맞는 율장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 불교의 계율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지, 계율의 역사적 변천과 성립과정 속에 어떠한 정당성이 제시되었는지를 근본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조계종단의 250계는 어떠한 역사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계율은 시대마다 재해석이 이루어져 왔고 재해석에 성공한 경우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율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지역과 구성원에 따라 모두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곧 계율을 받아 들임에 있어 맹목적인 수용이 아니라 현실과 구성원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한 수용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계율을 창출해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시류의 영합이나 법에 근거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깨달음을 위한 삶의 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율이 성립되어야 하고 그것을 철저히 수행하는 승가가 전 사회의 귀감으로써 존재토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계율에 관한 연구와 논의, 대중적 토론은 지속되어야 한다. 열린 장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해법이 창출되어야만 한다.
계율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다거나 불경의 죄목으로 비난하는 것은 이 시대의 계율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설령 이 시대를 이끌 해법을 찾을 능력이 없다하더라도 지금 우리 수준에 맞는 해결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해결 능력도 마련된다. 능력이 안 되니까 접어둔다는 것은 선방에서 도인이 나와야 한국불교가 달라진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최상은 아니더라도 우리 현실 속에서 우리 수준에 맞는 합의를 통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 조계종단에는 수많은 제도적인 기구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불교를 담아내야 할 그릇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중앙의 총무원도, 교구본사도 그 안에 얼마나 불교를 담아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상적 사안에 쫓겨, 이해득실에 따라 공격하고 방어하기에 바빠 그 일이 불교적으로 옳은 일인지 바람직한 일인지 따질 겨를이 없어 보인다.
또한 불법이 곧 연기를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려 사회처럼 자비가 인색한 곳이 없다고 한다. 누구의 입장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포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비불교적 사고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단 불교의 사상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해법이 하나하나의 사안들에 대한 지침이 되고 전 사회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권 밖의 승단 내부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나와야 한다. 제도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제도권 안에서 종교적으로 깊이 있는 내용을 기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승가 내에 건강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것이 교단이나 사회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문중에 연연한다거나 제도권에 얽매여서는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해득실을 떠나 진정 무엇이 승가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지 그런 입장에서 고민하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오직 승가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도출된 의견들이 제도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때 우리 승가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승려는 불교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목숨을 걸고 불교적 이념으로 삶의 문제를 다뤄가는 사람이다. 승려는 다 부처가 되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이다. 중생의 신분을 갖고 부처되겠다고 나서는 길 이상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삶 전부를 건 모험이고 투기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내겠다고 나선 이들이 그것보다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신념 자체가 허구라는 이야기이다. 신념에 대해 열정과 자기 존재 전부를 바치는 것이 승려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교적 세계관이 내게 피해를 주든주지 않든,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내 삶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그것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것이 승려이다. 그 입장에서 보면 계율의 해석도 어떻게 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 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있었던 계율논쟁은 참으로 많은 문제를 도출하였다. 불교의 시대적 해석과 ‘현실’ 과 ‘법’의 대치, 승가의 정통성 확립문제, 조계종단의 종지, 종통문제 등 한국 불교의 난맥상을 그대로 내보인 논쟁이었다.
이러한 계율 논쟁은 그 논쟁의 내용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었다. 그것은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논의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의 계율 논의에서는 어떠한 정답도 도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 년 동안 승가 내부에서는 계율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그 해법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계율문제가 단순히 자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또 이러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 문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중요한 열쇠임을 알게 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계율 논쟁을 기회로 우리가 절실히 느낀 것은 종단 내부에 열린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외부적인 권위나 압력으로 논의 자체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심없이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열린 마음으로 토론의 장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토론의 장은 불교가 역사화하며 사회화하는 과정 속에 자리하는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의 기반은 승가 자신의 철저한 문제의식과 끊임없는 연구활동에서 마련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긴 호홉을 갖고 미래를 이끌 비전을 준비하는 일, 불교와 역사를 만나게 하는 일, 열린 토론의 장으로 밝은 지혜를 이끄는 일, 지금 우리 승가가 해야될 일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