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건봉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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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혜경
1997년 12월 190호
바닷물에 오래 씻긴 채 해안에 떠밀려온 나무토막처럼, 육탈한 뼈처럼 희디흰 자작나무들이 대관령 고개에 늘어서 있다. 굽이굽이 굽어진 대관령 아흔아홉 고갯길. 그 고갯마루를 사이에 두고 영동과 영서가 나뉘고, 동해에서 불어온 해풍과 높다란 벽처럼 막아선 대관령은 때로 조화를 부려서 한쪽에선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한쪽에선 볕이 쨍쨍하게도 만든다.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라면, 파란 많은 한살이는 몇 굽이나 되는지. 아혼아홉 굽이를 넘어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만드는 파도가 이마를 친다.
강릉 지나 속초 지나 고성으로 가는 길. 길 왼편엔 백두대간, 오른편엔 동해가 나란히 달려간다. 어스름녘에 보는 설악산 능선은 파도 물마루와 비슷한 유동체로 느껴진다. 능선은 굽이굽이 이어지며, 때로는 우연히 생긴 물거품처럼 동그스름한 돌기를 민들기도 하고, 때로는 거센 파도처럼 높은 산자락을 솟구치게도 하며 굼실굼실 흘러간다. 가까이 다가서면 어스름녘의 묵중한 기운데 잠겨 있을 백두대간은 멀리서 보면 흐르며 이어진다.
물마루가 능선을 닮았는가 능선이 물마루를 닮았는가. 그 산자락 맞은편에서, 바다는 중력과 바람의 힘에 몸을 맡겨 금세 부서질 물마루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능선이 흘러가며 중간중간에 돌올한 산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나무며 새들을 깃들이고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길이 어찌 생겨날 수 있었을까. 끊임없이 밀려와 무용한 물거품을 만들어내는 흐름이 없었더라면, 저 바다가 어찌 물고기며 해조류를 키워낼 수 있었을까.
북녘으로 다가서는 길, 왼편엔 산자락 오른편엔 동해. 시원스러운 풍광에도 가슴이 시원스럽게 씻기지 못하는 건, 동강난 땅, 흐름을 잊은 채 막혀버린 환부에 다가가는 길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던 정기가 인위적으로 막혀버린 지점으로 다가가는 길목, 흐르던 기를 막아버렸으니, 말 그대로 기막힌 곳이 아닐 수 없다. 신불로 타버린 산, 가릴 것 없이 샅샅이 드러난 골짜기가 인체해부도의 근육처럼 느껴지고 불길에 타죽어갔을 작은 목숨들의 황황함이 새삼 가슴에 얹히는 것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가른 경계 이쪽과 저쪽, 한쪽에선 피골이 상접해 죽어간다는데 한쪽에선 넘쳐나는 것도, 막혀버린 땅기운의 영향인지 새삼 흘맺혀 온다. 사바의 아픔이 고여 물큰거리는 땅 한구석, 정토를 지향하는 목숨들의 기도가 일만 일, 근 삼십 년씩 이어지던 염불도량, 건봉사지로 가는 길은 이래저래 멀고 멀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서 바다를 등지고 건봉산 산자락으로 길을 잡아들어선다. 더러는 금강산 건봉사라고도 하나, 이는 금강산의 맥을 이었다는 걸 말하고자 함일 뿐, 건봉산 건봉가 더 적합할 것이다. 산을 깎아내린 포크레인의 흔적이 사납게 할퀴어 내린 짐승의 발톱자국으로 남은 길을 한참 들어가다보면 왼편 산비탈로 조금 들어간 곳에 부도비와 부도탑들이 산비탈에 늘어서 있다. 온전한 것도 있지만 더러는 비신이 없어진 채 좌대 위에 이수가 얹히기도 하고, 온전히 수습되지 않은 채 흙먼지를 덮어쓴 채 가로누운 것들도 있다. 온전히 정돈되지는 않았으나, 50여 기쯤 되는 부도전은 일제시대, 31교구 본사로 신흥사와 백담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건봉사의 규모를 보여준다.
부도전을 지나면 민통선이라고 쓰인 표지가 눈앞을 가로막고, 그 옆에 건봉사로 향하는 길이 나있다. 건봉사는 민통선 안에 있다. 절터가 가까워 오는지, 조금전까지 보이지 않던 산죽이 무성해진다. 마른 개울을 가로지르며 난길 옆, ‘규정은 생명처럼’ 이라고 써 붙인 군부대가 있고 그 부대와 철책으로 가름된 곳이 건봉사터이다.
불이문이라 이름 붙여진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이지만 기둥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씩, 네개다. 돌기둥 아래엔 나쁜 것들을 물리친다는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그 금강저의 위력이었을까, 비록 절을 다 태워버린 한국전쟁의 전화를 막을 순 없었지만 금강저가 새겨진 일주문만은 유일하게 타지 않고 남았다. 하지만 절집이 다타는데 어찌 혼자 무사할 수 있으랴, 금강저 무늬에 탄흔이 여실하다. 그 문을 지나 들어서면 개울을 끼고 남북양편으로 갈라진 건봉사터가 펼쳐진다. 건봉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법흥왕 7년(520)에 아도가 창건한 원각사가 건봉사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아도는 3~4세기에 활동했으니 건봉사와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이 쓴「건봉사 및 건봉사본말사적」에 따르면, 758년에 발징에 의해 염불도량으로 창건된 원각사圓覺寺가 건봉사의 효시가 된다. 발징은 ‘굉쇠와 북을 치면서 그 장단에 맞추어 나무아미타불을 큰 소리로 염불하는’ 염불소리가 만 일 동안 이어지는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니 이는 우리나라 만일회의 효시가 된다. 만 일이면 쉽게 어림해서 근삼십 년이다. 삼십 년을 기약하고 기도에 들어간 것이다. 만일 기도가 끝날 무렵, 동해물이 넘쳐서 건봉사를 덮쳤는데, 아미타불의 가피로 하늘에서 연꽃 배가 내려와 기도하던 이들을 태우고 극락왕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뒷날 절 서쪽에 봉황모양의 바위가 있다는 이유로 도선 국사에 의해서 서봉사西鳳寺로, 나옹 화상이 중건하면서 건봉사乾圓寺로 절 이름은 바뀌었지만, 만일회의 맥은 2회(1802년), 3회(1851년), 4회(1881년), 5회(1926년)로 이어져 내려왔다.
전쟁중에 다 타버리고 지금은 신흥사 말사로 명맥을 유지하는 건봉사는 요즘 분주하다. 석축에 쓰일 돌을 다듬는 망치 소리 나무를 다듬는 전기톱 소리, 풀썩이는 흙먼지, 복원불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옛 주춧돌 위에 옹이 자국 선명한 새 기둥이 서고, 나무에 그을음으로 무늬를 낸, 생경한 목조 건물 위에 인부들이 지붕을 얹고 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44건의 사찰건물을 복원해 옛 건봉사의 위용을 되찾는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건봉사터는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개울 왼편, 즉 남쪽의 극락전 지역과 개울 오른편, 북쪽의 대웅전 지역과 서쪽 깊숙한 곳의 팔상전 지역과 거기 못 미처 남쪽으로 들어앉은 낙서암 지역. 이 네 군데, 한창때 총 642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극락전 지역은 한창 터를 정비 중이다. 인접한 군부대와 철책으로 경계를 삼은 땅은 파헤쳐져 층층이 석축으로 나뉘었다. 비스듬히 경사진 땅은 죽죽 그은 선처럼 돌석축으로 구획이 나뉘었고 그 구획마다에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개울을 낀 길섶, 조금 높은 석축 위에 널따란 바위가 도드라지고, 그 위에 돌기둥 하나가 눈에 뛴다. 기둥 끝에는 통통한 새 한 마리 덩그마니 올라앉아 있다. 번성과 안녕을 기원하는 솟대가 돌솟대의 형태로 남은 것이다.
극락전 지역에서 더 올라가면 용사활지龍巳活池라 이름 붙여진 아주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쪽 서쪽 골짜기에 부처의 치아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약탈해간 사리를,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찾아와 여기 모셨다고 전해진다.
정비중인 남쪽에서 능파교라 이름 붙여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 지역이다.
대웅전 지역은 원래 대웅전, 선원, 만일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선원이 9칸이었던 데에 비해 만일원으로 이름 붙여진 염불원이 89칸에 이르렀다는 건, 건봉사가 다른 무엇보다도 염불수행에 비중을 두었던 가람임을 말해준다. 부도전의 부도탑 가운데에도 염불수행이 도타워 방광한 방광탑이 많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다리 건너 대웅전 지역으로 들어서는 바로 왼편에 조그만 거북 한 마리 땅에 납작 엎디어 있다. 단순한 몸체에, 하늘을 올려다보듯 이맛전에 동그렇게 윤곽으로 표현된 거북의 눈은 휘둥그레하다.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이다. 어찌하여 이 절에 염불소리가 그쳤는지, 어찌하여 불타올랐는지, 고요하던 절터에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못 듣던 소음들이 시끄러운지. 옛것이 불타없어진 자리에 새것을 짓는다는 건 알겠으나 한꺼번에 북작이는 사람들이며 흙먼지 냄새 폴폴 날리는 것이며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으로 거북은 어리둥절하다.
그나마 거북의 의지가 되는 건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나란히 선 돌기둥 두 개다. 기둥 하나에 다섯개씩, 열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육바라밀에 방편, 원력, 지를 더한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대웅전이며 만일원으로 드나드는 길목, 양옆에 나란히 선 돌기둥의 십바라밀은, 놓치기 쉬운 마음 끝을 다잡으라는 의미였을까. 돌기둥 사이로 올라서면 1995년에 완공된 대웅전 둥 새로 복원한 건물들, 새로짓는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이다.
옛터 위에 새 건물을 복원하는 일이, 능파교 아래 졸졸 흐르는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건 무리한 욕심일까, 생각하며 바라보는 능파교 위를 양손에 꽃을 든 보살 하나가 건너고 있다. 꽃공양을 히려는가. 한손엔 노란 국화더미, 다른 손엔 분홍장미 더미 꽃바구니를 양손에 든 보살이 앞서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노란꽃과 분홍꽃 위에 삐죽삐죽 솟은 가지는, 그러고 보니 극락조라 이름붙여진 꽃이다. 다음생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이 사바를 건너 해탈을 이루려는 아미타불 염불하는 소리가 만일동안 끊이지 않았던 절터에서, 국화더미에 삐죽하게 솟은 극락조 꽃이 우쭐우쭐, 다리를 건너고 있다. 꽃이름에까지 붙은 극락은 어디 있는지. 바라보는 산마루엔 포대경인지 과녁인지, 돌을 한 동그라미 하나가 동그랗게 시선을 모은다. 극락조는 날지 않고 하늘엔 까치 몇 마리, 회고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허공을 유영하듯 나는 중이다. 그러고보니, 까치는 까마귀과에 속하는 새이다. 같은 까마귀과이면서 까마귀는 어쩌다 까마귀로 태어나 이 땅 사람들에게 불길한 새로 미움을 사고, 까치는 까치로 태어나 길조로 환영받는지. ‘절 까마귀 염불한다’ 는 속담도 었던데, 까마귀도 염불한다는데. 옛 염불도량에서 올려다 본 하늘, 오갈길 없이 막혀 버린 민통선 위를 구름 몇 점 떠서 거칠 것 없이 흐른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