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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극적(劇賊)의 활동과 승려 세력의 거사 계획Ⅱ - 극적 장길산(張吉山)의 활동과 관련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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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엮는 한국불교사 - 정석종 1987년 06월 64호
장질산 부대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근거로 하고 있었는데 관군의 토포로 장길산은 숙종 18년(壬申, 1692)에 양덕(陽德)에 일시 숨어 있었다.
포도청(補盜廳)에서는 무사(武士) 최 형기(崔衝甚)를 보내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 뒤로 장길산 부대는 근거지를 함경북도의 서수라(西水羅)나 벽동 해천동(碧蟹川洞)에 잡고 마상(馬商)을 가탁한 마군 5천과 보병 천여명을 옹위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인삼(人蔘)을 가지고 대대적인 상업 활동도 하고 있었다고 사료된다. 당시의 인삼은 대일(對日), 대청(對淸) 무역의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으며 조선에는 대일 대청의 중계 무역으로 거대한 부가 축적되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은(銀)이 거대한 양이 되고 있었던 것이 자연히 역관들로 하여금 부를 장만하게 하고 그들의 정치 무대에서의 비중도 이때부터 두드려진다고 생각된다. 장길산 부대가 극적 활동을 크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같은 큰흐름 속에서의 일이며 장길산 부대가 당시 광산 개발로 크게 은성하던 신흥 상공업 도시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군기(軍器)를 겁탈하고 있었던 사실도 그곳 광산 노동자와 상인들과의 연계에서 가능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당시 삼(蔘)은 백두산 근방의 강계(江界) 삼이 중요하였으므로 그 일대에서 활약하던 장길산 부대에게는 삼을 구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었으리라고 보인다. 물론 심을 구하는 길은 다른 지방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설악산의 영동(嶺東 : 강원도지방)도 주요한 인삼 산지였으므로 장길산 부대의 근거지의 일부가 되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철원(鐵原) 지방에 명화적 부대가 깃발을 날리며 쳐들어 온것으로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청(淸)나라와의 국경 무역장은 의주(義州)와 회령(會寧) 등지였으므로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고 있던 셈이다.
5천이나 되는 마상을 가탁한 기병을 옹위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국 무역장인 회령 등지에서 만주인의 말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색외 민족인 유목민의 말도 국경 무역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동성이 풍부한 준마로 구성된 기병 부대가 전국에서 활약하는 일이 가능하였다고 보인다. 다음과 같은 장길산의 자신감에 차있는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만약 대사(大事)를 일으키려 하면 선사(禪師)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직 나의 기병(騎兵)만으로도 족히 장구(長驅)할 수 있다.(李榮昌等推案)
서수라나 벽천해천동은 함경북도의 최 말단인 두만강 하류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정부군의 토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월강하여 만주 지역으로 쉽게 도타할 수도 있는 지역이다. 거사 계획이 있게 되는 숙종 23(1698)년 부터 약 70여년 뒤의 기록이기는 하나 압록강 월변에 7,8천명이나 되는 망반인(亡叛人)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과 관련하여 보면 그들과의 연계도 장길산 부대는 가지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압록강 월변에는 이른바 이만평(利滿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죄가 있어 도망하여 둔취(屯聚)하여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 거의 7,8천명에 이르는데 모두 사냥으로 업을 삼아서 때때로 우리나라 지방에 나타나 혹 야경(夜驚)이 있게 된다. 근래의 이른바 해랑적(海浪賊 : 바다 도적)은 모두 이 무리의 도당들이 출몰하여 겁략 함으로써 양식을 장만하는 것이다.
숙종년간에 교동(喬桐)에 별도로 독진토 포사(獨鎭討補使)를 두어 수적(水賊)에 대비하고 있던 사실도 상기 인용문을 상기하여 볼 경우 장길산 부대의 활동의 일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들 장갈산 부대가 승려 세력과 어떻게 결속되는가의 전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승려들의 거사 계획이 있게 되는 숙종 23년(1697) 이전에 이미 그들과 결탁하고 있음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산간의 민중적인 승려 세력과 장길산 부대의 유착은 산간에서 주로 은신처를 구하여야 하는 극적의 활동 관계로 쉽게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일반 하층의 지지 기반에 주로 의지하던 극적의 활동이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그 기반으로 하는 민중적인 불교 세력과 그 본질상 서로 동일한 입지에 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승려 세력은 거사 계획을 이루기까지 자체내의 동일 지향 세력의 결속 과정을 준비하고 이후 극적 세력, 서류층(庶類層) 및 양반 세력 중의 실세인 남인(南人) 세력과의 연계를 구성하거니와 먼저 승려 세력 자체의 결속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영창(李榮昌 : 33세)의 실토 중에서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위 운부(雲浮 : 70세)의 나이는 정묘(丁卯)생으로 혹은 영변(英下)이라고도 합니다. 본래 중국 사람으로 남경 섬 가운데 있다가 어느 해에 형제가 강진(康津) 물가에 떠와서 소백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안성(安城) 청룡사(靑龍寺)에 옮겨와 머물렀는데 그때 내 나이 바로 13살 때입니마 친척되는 이대득(李大得)이 와서 그가 지리(地理 : 풍수)를 잘 안다고 말하므로 가서 선생으로 모셨읍니다. 상모는 심히 기위(奇偉)하고 보통 승려와 달랐으며 수개월 함께 있는 동안에 지술(地術)을 배웠읍니다. 년월을 알 수 없으나 어느 때 가평(加平) 현등사(懸燈寺)로 옮겨 갔읍니다. 거기서 일여(一如 : 76세)를 만났는데 그 역사 망기(望氣)를 잘하고 지리풍수(地理風水)에 밝아서 두 승려가 서로 몹시 좋아하였읍니다. 일여가 운부에게 말하기를 나의 사제(師弟)인 옥여(玉如)도 역시 명승(名僧)이라 운운하였읍니다. 며칠 후에 옥여도 역시 와서 상견하였읍니다. 옥여가 또 말하기를 한 승이 있는데 묘정(卯定 : 57세)이라고도 하고 각선(覺先)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명승입니다라고 하였읍니다. 운부, 일여, 옥여가 모두 간성(杆城) 건봉사(乾鳳寺)에 가서 묘정과 상용하였으며 옥여, 묘정도 또 말하기를 대성법주(大聖法主: 일명 楓悅, 66세)가 금강(金剛) 내원통(內圓通)에 있는데 나이 많고 도가 높으니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여 네 승려가 모두 갔읍니다. 옥녀가 대성법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인(異人)을 데리고 왔읍니다. 한즉 대성이 책방(冊房)에서 보기로 하였는데 다섯화상(和尙)이 서로 이야기하고 크게 좋아라 하였으며 그 절이름 백운사(白雲寺)를 고쳐 옥정사(玉晶寺)라 하고 다섯 승려가 1년을 동거하였는데 그동안에 팔도의 승도가 종이, 신발 등 물건을 보내 오는 것이 연속하여 끊이지 않았읍니다.
하루는 다섯 화상이 각각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나는 안성의 승 각원(覺元)과 떨어져 남아 한달을 지났는데 그때에 5승이 모두 돌아왔옵니다. 운부가 말하기를 또 이인을 볼 수 있겠는가 하니 옥여가 말하기를 소제(宵霽), 취양(翠陽), 법징(法澄) 등 3승이 족히 승장(僧將)의 소임을 맡을 수 있다 하였읍니다’. (李榮昌等推案)
이들 5승은 3일 만에 결의 형제를 맺었으며 이들은 결의 형제시에 황(黃)자를 쓰고 이 글자에 돌아가며 이름을 쓰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그들이 미륵 신앙의 신봉자임을 알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의 경우 미륵의 출현을 표현하는 미륵춤에서 가면을 쓴 무희는 황의(黃衣)를 입는다고 한다.)
이영창 문초시의 문목 내용(問目內容) 중에 ‘사승(師僧)은 운부인데 금강에 들어가 숭배를 가르쳐 옥여 등 100여인을 얻어 그 술(術)을 전하고 또 장길산의 무리와 맺고’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 신앙을 100여인의 승려들에게 가르쳐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을 8도에 보내서 8도의 승려 세력을 총집결하고자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정진인(鄭眞人 : 봉입 당시 9세)을 철원에서 봉입(奉入)하고 이어 고성(高城)에 있게 하다가 다시 부녕(富寧)으로 옮겼는데 이로 말미암아 정진인은 이름이 삼변(三變)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그에게 황포(黃袍)를 입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미륵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고 있음도 알 수 있겠다. 거사 후에 그를 조선의 국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것이다.
정진인을 봉입한 이후 계유(癸酉 : 肅宗 19년, 1693)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으로 들어가거니와 금강산에 근거를 둔 그들에게 8도의 승려들이 4,5인 혹은 6,7인씩 래현하고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이 그치지 않았으며 그 왕래하는 승려들이 모두 속승(俗僧)이 아니라는 기록에서 그것이 확인된다. 평등한 미륵의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정열에 가득찬 승려들이 전국에서 모여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승려들뿐만 아니라 운부의 시승인 이영창을 세간(한성)에 내려보내 관상과 풍수로서 양반인 실세 당색의 남인들과 노론, 소론계에 속하는 중인들 및 서류(庶類) 등을 포섭하여 승려세력과 연계를 도모하고 있음을 다음 자료로 알 수 있다.
‘운부가 작별할 때 말하기를 세상은 이미 말세이다. 산천으로 보면 국맥(國脈)이 이미 진하였다. 인간에 나아가 재상가에는 가지 말고 마땅히 서류(庶類) 중에서 의기가 있고 재능이 많은 자와 맺어 심복으로 삼는 것이 좋다’.
불평등한 당시의 사회를 개변시키고자 하는 계층을 규합토록 지시하고 있는 장면이거니와 영창은 그의 지시대로 그에 합당한 인물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 칠석의 거사 계획이 마련되었거니와 그 내용은 ‘옥여 등은 관서(평안·황해도 지방)로 가서 승병을 수습하고 두 사람으로 가짜 금부도사(禁府都事) 모양을 하게 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잡아와 중로에서 목자르고 인하여 옥여로 평안감사(監司)를 삼고 또 1인은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어 군대를 일으켜 장구(長軀)하여 양철평(良鐵坪)에 이르고 일지병으로는 호복(胡服)을 입고 먼저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 유수(留守)를 목베고 마니산(摩尼山)에 대첩기(大捷旗)를 세우면 서울이 반드시 진탕(震盪)할 것이니 양철평의 대병이 그때를 틈타서 서울 성중으로 직입(直入)한다. 그리고 나(영창)와 대성법주는 북로와 강원병을 수습하여 진인을 받들고 입경하며 또 일지병은 양남(경상도·전라도)을 탕평(蕩平)한다’(李榮昌等推案)는 것이다.
이때 장길산 부대는 대성법주의 북로 및 강원도 군병에 참여키로 되었다고 보인다.
서울에 대군이 진입하기에 앞서 이에 맞추어서는 ‘왜서(倭書) 수자(數字)를 동대문, 남대문에다 걸고 밤에는 남산에 봉화를 올려’ 성중을 불운(佛云)케 하고자 하였으며 대군이 서울에 입경하는 날에는 ‘여자 10인이 상복을 입고 남대문과 동대문에 올라가고 또 여인 5명이 검은 소를 타고 종루(鐘樓)를 지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인층의 사전 발고로 인해, 승려 세력이 주동이 되어 미륵의 세상을 조선에 구현하고 중국에까지 쳐들어가 최영의 후예를 황제로 삼으려 한, 이 거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