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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서러웠던 그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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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1년 10월 236호
수행자로 살고 있는 이 생이 금생의 일만은 아닌 것 같?
어릴 때부터 내겐 세상살이가 재미없었고, 초등학교 삼사학년쯤 되었을 때부터 누가 ‘너 뭐 될거냐’고 물으면 대뜸 그랬다. ‘스님이 되겠蔑??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놀 나이에도 나는 혼자 다니기를 좋아했다. 강둑을 하염없이 홀로 걸었고, 봄이나 가을쯤엔 계곡이 합쳐지는 곳으로 가서 한없이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마을 밑으로 지리산이 내려다 보였으나 왼쪽으로 막힌 산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언제나 ‘이쪽을 뚫고 나가야 하는데’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절에 가면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고, 큰스님이 계시다기에 집에 자주 들르던 스님 한 분을 따라 아예 집을 나왔다. 고성 옥천사 아랫마을에 있던 집을 열네살에 그렇게 나섰던 것이다. 오랜 선비 집안에서 중 된다고 하니 해괴망측하다고 동네사람들이 야단이었고, 인물 하나 만들려고 하던 집안에서도 망연자실했다는 얘길 나중에 들었다.
깜깜한 밤중, 이미 잠겨 있는 절문을 담 넘어 열고 들어가 사문의 길로 들어선 게 벌써 삽십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다음날 새벽예불 할 때의 편안함과 좋았던 향냄새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후로 그같이 좋은 향냄새를 맡아보지 못했으니, 향내음에도 ‘첫마음’이 있는 걸까.
대중스님네 십여 분, 그리고 행자 몇이 있었던 부산 마하사의 시집살이 행자생활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직 중이 안 되었다 하여 양재기로 바루공양을 했던 일과 무거운 상을 들었던 일이다. 점심과 저녁 공양 때 은사 스님 상을 들고 가는 것이 열넷 어린 소년에겐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겨울엔 놋그릇이 여러 개 올려진 상을 들고 가다 보면 행주로 닦은 상 위가 살짝 얼어 있던 터라, 그릇이 한쪽으로 쏠리며 우루루 쏟아지곤 했다.
내 행자시절 얘기는 은사 스님을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스님을 시봉하는 것이 내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했고 행자시절 사년간을 모시며 그 분의 언행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내 은사이신 문성汶星 스님은 한평생 참선정진으로 일관하시다가 조계종 통합종단 때 감찰원장을 지내신 분으로 옳고 그름이 칼날처럼 분명한 분이었다. 내가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가 감찰원장을 하고 계실 때였는데, 일흔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언동이 짱짱해 어정쩡한 스님네들은 얼씬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종일 일을 해대던 때였다. 예불드리고 공양 준비하고 노스님 세숫물 준비해드리고 방청소에서부터 빨래까지 하다보면 아침해가 밝아왔고, 낮엔 낮대로 나무하고 장작패고 반찬하고 노스님 약 달이는 일을 하다보면 하루 해가 모자랄 지경이던 시절이었다.
행자시절 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은사 스님의 ‘화’. 고함 한 번 지르면 산천초목이 흔들릴 정도로 대단했으니, 스님의 화를 감당할 자는 마하사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한 번 화를 내시면 가장 짧게는 한 주, 길게는 한 달정도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스님의 진심嗔心이 빨리 없어질까 궁리하다가 하루는 내가 작전을 세웠다. 해서 저녁예불 후 스님 방으로 들어가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 나를 보고 스님께서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했으나, 그래도 가만 앉아 있으니 ‘나가라니까’ 하시며 가지고 있던 단주로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삼배를 올리고 물러 나왔다. 물론 그 날은 스님의 화가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풀어지기는 했지만, 누군가라도 조금만 잘못하면 벼락이 떨어지고, 무언으로 아랫사람을 형벌하시는 것은 끝내 멈춰지지 않았다.
한 번 화를 내시면 그리도 한참 말씀을 하지 않아 모두를 힘들게 했지만 순진무구한 면도 많았다. 하루는 방에 들어간 내게 문을 잠그라고 하시더니, ‘너, 나하고 씨름 한판 하자’ 하며 팔을 걷어부치셨다. 그런데 나이 어린 행자는 그만 눈치도 없이 여든에 가까운 은사 스님을 이겨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하루 내내 따라다니며, ‘한 번 더하자’ 하시는데, 서서히 화를 내시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래서 한 번 더하며 슬쩍 져드렸더니 좋아하시며 하루 내내 그 기쁨을 누리시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내가 행자시절 잠을 이겨내면서 하루 한두 시간 정도 자며 공부할 때였다. 밤 열두시쯤 되면 주장자를 짚고 오셔서 그 당시 아주 귀하던 드링크제를 하나 살짝 놓고 가시곤 했다. 행여 여학생이라도 내 곁에 오가면 헛기침을 하고 괜히 주장자를 탁탁 내리치셨던 기억도 난다.
하루는 스님이 그러셨다. ‘중이 뭔 줄 아나? 다 버리고 가는 게 중이다. 다른 것 아무 것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출가한 지 삼십년이 넘었어도 내가 머무는 곳에 부모님이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얼마 전 노모의 49재를 지내드린 것 말고는 거의 내왕이 없었다. 그리고 행자시절 네 해 동안 노스님 모시고 목욕탕에 간 것 말고 딱 한 번 외출했다. 사형들을 따라 고속터미널에 가 그 당시 처음 나온 고속버스를 구경한 것 말고는 절 밖을 나간 적이 없었던 걸 보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하라시던 스승의 가르침을 명심했던 것 같다.
스님의 계율정신은 서릿발과도 같았으니,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은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흘러 내가 중노릇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다보니 스님의 그러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불교가 바로 서려면 계율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세월이 흐를수록 거듭 느끼겠다. 불교의 삼학인 계정혜가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수행자가 될 수 있 수 있기 때문이다. 계를 담는 그릇이 튼튼해야 거기에 선정의 물이 담기고 그 물에 지혜의 달이 비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계 자체가 해탈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께서 공양을 들지 않으시면 함께 먹지 않았고 출타해 돌아오시지 않으면 절문 밖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며 살았던 세월이었다. 행자시절에 했던 것 삼분의 일만 해도 효자소리 듣고도 남았을 만큼 그리도 착실히 행자시절을 보냈건만 나보다 두세 살 많고 15일 먼저 들어온 행자에겐 일년 뒤 계를 주면서도 이삼년이 지나도록 나에겐 계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열이 오른 내가 하루는 스님께 따졌다. ‘모든 부분을 시험해서 조금이라도 모자람이 있다면 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도 섭섭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루 빨리 가사장삼을 입은 훤칠한 수행자기 되고 싶었던 열여섯 소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행자시절 가장 서럽고 두려웠던 것은 ‘그렇게 중노릇 하려면 떠나라’는 은사 스님의 말씀이었다. 그 ‘떠나라’는 소리가 왜 비수가 되어 어린 가슴에 날아왔을까. 돌아갈 집도 있고 다른 절도 많았건만, 그리도 떠나라는 소리가 싫었던 걸 보면 전생부터 그 분을 흠모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떠나라’는 소리가 그리도 서러웠을까.

열넷에 집을 떠나 네 해를 꼬박 행자생활을 하며 염불이며 기도, 의식 등 사문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골고루 익히고, 강원에서 배울 일년 과정을 미리 마치고서 계를 받았다. 그리고 삽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정혜를 원만하게 성취하려는 수행자로 살아왔다. 얼마 전 누군가 물었다. ‘그간 당신의 삶에 몇 점을 줄 수 있겠느냐’고. 나의 스승과 견주면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출가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수행자임을 자부하며, 오로지 도학자道學者로 살아온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글쎄, 점수로 따지면 몇 점쯤 될까.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무문관無門關을 만들어 열 명쯤 함께 수행에 정진했으면 생각하고 있다. 무문관에 들어가 이삼년 만에 한 번씩 나와 법문 한 번 한다면, 몇 번이나 법문하면 이 생이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