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들에, 개울에 비 내린다.
명 디한 잎사귀, 몸을 던져 제 뿌리를 따스히 덮은 포도밭에도, 이만하면 뜰에 옮겨 심어 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듯 아직도 빛깔 고운 잎들을 떨구지 못하고 찬비 견디고 있는 홰나무 묘포에도 비 내린다. 입동은 하였으나 절기가 아직 소설에는 미치지 못했노라고, 송구하여 눈으로 내리지 못하고 물로 내린다. 유래 없이 고운 단풍일 것이라더니, 한 철 나무 둥치몸 키운 뒤, 스스로 제 소임을 장엄하고 있다가 본체와 이별하지 못하고 가지 끝에 잎이 말라붙은 그루가 숱하더라 했다. 모진 가뭄으로 온 산을 바짝 말려 이산 저산에 불을 내놓더니 이제사 내리는 늦가을 비였다.
삽삽, 천지운행 길 재촉할 가을비가 제가 전하는 소식을 알아듣기는 하겠느냐고 묻는다.
짙은 안개까지 거느린 행차인 바, 경부고속도로변의 익숙한 풍경이 생전 미답의 낯선 풍경으로 바뀐다. 아닐 터였다. 육근에 익숙한 대로 이미 제 속에서 죽어 있던 물상이, 그런 것 아니라고, 언제 한번 실상을 본 적이 있기는 했더냐고 꾸짓는다.
은해사도 하릴없이 비에 젖는다. 달린 잎 떨어진 잎 모두 붉고, 그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또한 더불어 붉은 일주문 안 왼편 둔덕에 부도들이 늘어서있다. 용전에 함께 타고 가고자 애썼던 중생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포대기로 들쳐업고 선 듯 복장 불룩한 그것들, 깨치지 못한 것들이 오르내리는 길목에서, 찬돌의 모습으로나마 지켜보겠다는 듯이 늘어서 있는 그것들도 비에 젖는다.
어둠 짙어 오니 불빛 더욱 따스해지는 시간, 은해사의 승가대학원 학인 스님들은 오늘 산사를 적시는 비가 새삼스럽다. 어제 올린 점안식에 부처님이 감응해 내리시는 비인가.
개원된 지 일 년 만에 소속 학인들의 공동 저작물인 「금강경전서」에 이어, 개인이 저마다 맡은 과제물로는 첫번째 성과물인 지상 학인 스님의「현수법장의 화엄학 개론」을 두고 올린 점안식이었다.
“삼장의 연찬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경학도들의 결사 도량인 종립 승가대학원의 지상 상인은, 기존에 있던 주석서와 번역본을 낱낱이 대조하여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통 강원에서 배우고 있는 팔십 화엄의 해석서인 청량국사의 현담과의 관련성도 조목조목 찾을수 있게 했으니 화엄 학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원장인 무비스님은 책의 서序에서 이리 말하고, 뒤이어 가진 스스럼없는 자리에서는 학인들을 조여 이렇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일 터인즉, 불성이 있디면 자극받을 일이다!”
「화엄학 개론」에 이어 곧 탈고될 원고도 없지 않으나 더욱 매진하도록 학인들을 다그친다. 벼를 기르되 잊어버리지도말고 자라는 것을 돕지도 말라(勿忘勿助長) 하였으나 자신은 농꾼도 맹자도 아니니 취할 말이 아니었다. 늦추면 늘어지고 조이면 당겨짐은 중강을 지냈던 이력과는 상관이 없이 모든 피교육자에게 한결같이 해당되는 말이었다.
체體를 힘써 가꾸되 용用에 관한 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니, 그가 개원 뒤 첫번째로 한 일이 학인 스님들 전원이 피시의 사용법을 익히게 한 점이었다. 그리고 준비할 자료나 과제물을 모두 그 기기를 써서 제출하게 했다. 무비스님 스스로도, 어느 날 우연히 오른손에 마비가 와서 “마음먹은 대로 쓸 만큼’은 되었던 붓글씨 솜씨를 더 이상 부려 볼 수 없게 된 뒤로 워드 프로세서로 집필작업을 대신해 왔거니와, 손작업의 백 곱절 되는 효율로써 전화 위복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금강경전서라 함은 구마라습의 번역본을 중심으로 하되 나머지 다섯 시람의 한문번역본을 모두 실었을 뿐만이 아니라, 범어본과, 그것을 해석한 오가해를 모두 현토해서 한자리에 실어 비교해 볼 수 있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오가해」공부를 하면서 그걸 전부 컴퓨터로 쳐넣었어요. 문장을 자르는 게 또 보통 일이 아니었죠. 이 책이나 「화엄학개론」은 모두 강원애서 교재로 삼을 만한 것들입니다. 강원 역사가 몇 백 년이 됐지만 처음 이룬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컴퓨터 덕을 크게 본 셈이예요.”
승가 대학원이 개원된 것은 지난해 시월, 개혁 종단이 출범하면서 내건 교육 불사 사업의 큰 성과의 하나로 꼽을 만한 것이다. 개혁 종단이 총무원과 교육원, 그리고 포교원의 삼원 체제로 외형을 갖추었으되, 개혁의 기장 근본적인 요소로 삼을 만한 것이 승단을 이루는 낱낱승가의 내부 개혁일 터이니 , 교육원의 상정과 역할이 차별되어 도드라짐은 바로 그점 때문이다. 개혁은 교육을 통해서 시작은 그렇게 되어야 할 터였다. 전통 강원 교육의 장점을 취하되,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교육 전통이 창출되어야 함과 함께, 그 일을 선도해 나갈 승가 교육자를 양성하는 일도 화급한 일이었으니, 종단에서 개원하고 지원하게 될 승가 대학원의 설립 취지는 그러한 것이었다.
무비스님은 교육원에서 승가대학원 개원을 추진해 나가는 단계에서 “강의만 맡기로 하고” 일을 거들다가 “얽혀 들어서” 원장 소임까지 맡게 되기에 이르렀지만, 평소에 승가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 자신 법주사와 범어사에서 강주를 맡아 교육의 현장에 몸담아 보기도 한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단의 지원을 밑바탕이자 큰 의지처로 삼되, 교과목을 선정하고 초청할 외부강사를 결정하는 문제에도 그러하거니와, 스스로 결사체라 이르는 뜨겁고도 결연한 학습분위기는 그와 학인들이 함께 일구어 내는 것이다.
지금 수학 기간이 삼년인 승가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인의 수효는 열한 명, 학인이라고는 하나 범어사, 송광사, 해인사 등에서 모두 시자를 두고 살던 중강급 이상의 강사출신들이다. 삼십대에서 오십대의 나이 편차가 있고, 전계를 받은 시람도 있지만, “아마도 금생에서는 마지막 피교육 기간”이 될 승가대학원의 학인 노릇을 사명감을 가지고 즐겨 자청한 사람들이다.
무비스님은 개원 초기에 현대사회에 필요한 바람직한 교육자상은 어떤 것이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과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방법에 대해 여러 날에 걸쳐 이들과 함께 토론했다. 교육의 지향점과 방법 문제 등을 학인과 강사가 함께 의논해 결정하고 그에 따르는 유일한 교육 기관일 터였다.
“거기는 일월 일일에도 공부를 한다지?”
그랬었다. 승가 대학원은 지난 일월 일일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업이 진행되었다. 양력이긴 하나 새해의 첫날이니 덕담이나 나누고 느슨한 하루를 보낼 법도 했지만, 음력 일월 칠월 두 달 동안의 방학 때 말고는 일 주일에 닷새 동안 강의를 받는 일정을 엄격히 지킨 것이었다. 그 동안 무비스님의 직강말고도 혜남, 통광, 각성, 성묵스님을 초빙하여 금강경오가해, 화엄경, 능엄경, 한문 문법 등을 교수받았거나 받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익힐 과목으로 손꼽고 있는 것은 기신론과 선문염송, 장자 등인데, 그 밖에도 학인들의 요청에 띠라, 일본의 불교학 관계서적 및 자료를 참고할 수 있도록 일본어도 배우게 되리라 한다.
강의는 수강생으로서 내용을 전달받기만 하는 문강식 방식과, 맡은 바 연구 분야를 각자 발표하되 뒤이어 무비스님이 내용을 보충해 강의하는 절충식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 따로 받은 과제물에 대한 철저한 자력식 공부 방식이 덧붙는다. 학인들은 일 주일에 적어도 한번 이상 하게 되는 강의를 통하여 발표될 내용을 완전히 제것으로 소화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을 키워 나가게 된다.
도반이나 강사에게서는 강의내용 말고도 취할 바가 있으니, 경전을 대하는 태도나 그에 대한 안목, 내용의 소화여부를 살피게 하고, 억양이나 말씨까지 눈여겨보게 하여 모범이 될 만한 강의 방식을 스스로 갖춰 나가게 한다.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법에 맞는 쉽고도 바른 글쓰기-이는 무비스님이 개원 후부터 학인들을 내몰아 익히게 한 점이다. 어떤 인물에 대한 약전을 적어 보되 사전적인 사실나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정리해 보게 하고, 한문 경전을 현대어법에 맞게 번역하되 다각도로 풀어 보게 하는 등, 과제물로써 집중적인 훈련을 쌓게 했다. 제출된 과제물을 그가 붉은 펜으로 일일이 교정하여 다시 되돌려 읽게 했으니,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성취는 눈에 뛸 만한 것이 되었다.
“경기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가 학인들과 함께 족구 등의 시합판에 어울리며 자주하는 말이다. 그에게 학인들은 한 항렬 아래인 제자일 뿐만이 아니라, 작정한 일을 함께 도모해 나아갈 도반으로 여김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선방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꿈에 차 있고 밝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힘을 주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거니와, 그의 양명한 기질을 짐작하게 하는 면모이기도 할 터였다. 강한 끌힘으로 학인들을 제접해 나가되 기골이 장대한 외양과는 달리 섬세하고 따뜻하며, “학인의 애로는 곧 나의 애로”임을 몸으로 펴 보이는 그를 혼연히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그가 나라 안의 빼어난 다른 강백들과 차별되는 점은 다른 무엇보다 십 년 넘게 선방에서 닦은 수행력이 그가 오늘에 이룬 교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일 터였다. 출가 본사인 범어사 강원을 거쳐 64년에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뒤에 일주문도 나서 보지 않고 내디딘 걸음이었다. 일업청산 갱불환, 이 길이 내 마지막 길이 되게 하리. 그런 각오로 제방선원을 전전했던 바, 동산, 효봉, 구산, 향곡, 춘성, 전강, 성철, 서암스님 등 그 무렵 선지식이 운영하는 선방은 찾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서른해가 지나서 그의 나이 쉰다섯, 법랍이 사십에 가까운 지금. 시자들에게 이렇게 이른다. 진지하고도 순수한 의심이 안 나올 때, 판단컨대 달걀로 바위치기가 틀림없을 때 시간을 더 이상 헛되이 보내지 마라. 그는 아직도 진여의 길을 밝힘에 있어 풍부가 잘 되기만 한다면 참선이 가장 수승한 길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길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방도를 택해야 한다 여긴다. 그 차선책이란 경전과 조사어록을 통하여 제 마음을 닦는 한편으로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함께 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가 작정한 것은 제가 습득한 부처의 깨달은 이치를 말과 글로써 사부대중에 전하는 일이었다. 선과 교는 둘일 수도 없었고, 지내 놓고 보니 둘도 아니었다.
나라 안 수많은 법회의 법사로 설법을 하되, 그 말은 제 말이 아닌 부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되게 애썼거니와, 77년도에 법상용으로 범망경을 번역해낸 것을 시작으로, 금강경오가해, 무비스님과 함께 하는 불교 공부, 금강경 강의, 천수경 강의, 예불문과 반야심경 강의, 화엄경 완역, 보현행원품 강의 등을 책으로 펴냈다.
그가 굴린 대승의 수레 바퀴가 남긴 흔적 가운데서도 그 결정체로 볼 만한 것은 지난 94년도에 팔십 화엄을 완역한「화엄경」을 출간해낸 일일터였다. 팔십 화엄의 우리말 번역은 그가 처음으로 이룬 일은 아니니, 탄허 , 운허 등 이미 몇 사람의 전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본 영인본 두 권과 함께 모두 열두권으로 풀어 보인 화엄경이 전작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에게 전계를 내려 화엄의 강맥을 잇게 한 탄허스님도 이루지 못한 바, ‘빨래줄 같은’ 줄글로 적힌 것을 내용에 따라 과단을 치고 일일이 제목을 달아 낸 점이다. 화엄의 방대한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시도조차 어려운 일일 터였다. 그 일은 그가 스승으로 삼았던 지관, 탄허, 운허스님 등의 해석이 녹아든 종합적인 것이면서, 가르침의 흐름을 정리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는 화엄경에 이어 올해 강원 교재용으로 네 권짜리 화엄경 이차본을 펴냈거니와, 화엄경 강해본을 덧붙여 화엄에 대한 그의 행보를 이어 갈 생각이다. 팔십 권 중 두권 분량의 작업이 이미 끝났다 하니, 그의 말대로 “끝은 더딜 터이나” 언제고 회향이 되고 말 원력이었다.
그는 이즈막에 뛰어난 법문가로서의 역할도 접고, 이런 일 저런 인연 다 접은 가운데 승가대학원 꾸려 나가기에 시간과 정성을 쏟으니, 그 끝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승가 대학원이 단기간에 끝날 교육 기관이 아니라 경율론 삼장의 진지한 상설 연구처로 영역 확장이 되면서 이 나라 불교 연구의 본산으로 자리잡게 하는 일이 그 한가지이고, 역경원의 한글대장경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는 하나, 고려 대장경 이후 장경 사업이 다시 없으매, “통일한국대장경”이라 이름 붙일 만한 장경을 펴내 일천육백 년 불교 역사를 재결집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벙에 앉아 내다보는 길은 필연으로 어느 점에 이르러 끊어지고 마는 것이니, 그것은 발걸음을 내딛어 나아가는 사람에게만 끊김 없이 펼쳐지는 법일 터였다.
아침 예불 마치자마자 캄캄한 어둠속으로 무비스님 길 나선다. 간날비에 더욱 함초롬해진 뜰 앞 벚나무를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시나 했더니 그를 배웅하는 스님들에게 한마디 이른다.
“오늘 도량 비절 하지 마라.”
떨어져 누운 잎이 더 고운 비 갠 새벽이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