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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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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6월 64호
공(空)의 이중적 구조
사제님, 오늘은 우리의 이야기를 불교의 중심되는 문제로 옮겨 시작할까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그것 자체로서 중요한 것 아님이 없고 다 불교의 중심 문제로서 이해할 수도있지만 그 중에서도 불교도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향하고자 하는 점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무엇을 지향하는 목적 의식을 ‘회향(回向)’이라고 합니다. 근자에 와선 이 회향이란 말을 불교 행사를 끌낸 뒤에 그 일의 공덕과 가치를 이웃이나 사회 등에 되돌린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읍니다만, 정작 회향의 본뜻은 어떤 행위가 끝나고 난 뒤의 사항이 아니라 행위 이전부터의 목적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옳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행위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그 끝에 이력까지의 일관성있는 목적 의식, 그것을 회향 의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모든 실천과 의지는 결국 세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향되고 귀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삼처회향(三處回向)’이라고 합니다.
첫째, 보리회향(菩提回向)-올바른 깨달음(시각)을 얻기 위한 지향 의식.
둘째, 실제회향(實際回向)-올바른 시작을 통해 드러난 존재들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한 지향 의식.
셋째, 중생회향(衆生回向)-모든 삶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과 지향 의식.
이 세 가지 문제는 서로 나뉠 수 없는 동일한 차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모든 실천과 관심은 최종적으로 우리 삶들의 문제 때문인 것이며 (중생회향),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 우리의 삶을 포함한 이세계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실제회향), 그러기 위해 먼저 올바른 시각 곧 깨달음의 눈을 갖춰야 하기때문(보리회향)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천에서 ‘중생회향’을 말할 때나 선종(禪宗)에서의 깨달음의 추구(보리회향)를 말할 때나 통일한 문제에 대한 강조점이 다를 뿐이지 그 본질에서는 삼처회향을 함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실천적 노력들, 이를테면 아낌없이 베푸는 것(보시)이나 도덕적 덕목을 실천하는 것(지계)이나 참음, 노력, 집중하는 맑은 정신(선정), 밝은 지혜 등의 6바라밀이나 모두 최종적으로는 보리, 실제, 중생의 세 가지 문제로 지향(회향)하는 것이며, 나아가 삶의 일거수 일투족도, 또 직업, 환경, 습관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노력들도 최종적으로 이 세 가지 문제로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 세 가지 문제는 통일 차원의 연장선에 있지만, 내용을 보면 그 최종 목표인 중생회향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최우선의 과제인 보리회향부터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보리회향이야말로 모든 수행자들이 욕락과 명예와 수면을 잊고 밤낮으로 정진하여 추구하는 ‘깨달음’의 문제로서, 구도의 일차적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요?
‘깨달음’이란, 지난 몇번의 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의 가르침’ 곧 ‘연기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나 불교인들이 공(空)이란 무엇이며 변화와 관계의 법인 연기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또 남에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커다란 깨달음(大覺)’을 얻었다는 확신은 자타가 다 가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합니다. 그는 연기의 법을 또는 공(空)에 대해 명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공’이나 ‘연기’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은데, 재차 따지고 보면 뭔가 미진한 것 같아 다시 경전을 반조하거나 화두를 들고 여전히 정진할 수 밖에 없읍니까? ‘공의 가르침’이란 그토록 어렵기만 할 것일까요? 조금이라도 불교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교리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그 ‘공의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확실한 나의 깨달음의 세계로 체득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공의 세계’를 체득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세계를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을 각각 분해해 놓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사고 버릇은 비단 서구적 세계관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빠질 수 밖에 없는 통념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듯 통념이 되어 버린 가장 심각한 잘못된 사고 버릇을 떨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식주관’과 ‘대상존재’가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먼저 인식에 대해 살펴보면,
1 인식은 순수한 인식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존재를 머금고 있을 때 곧 내용을 가질 때만이 인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그럴 때 인식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며, 존재에 의해 형성되며 규정되어 간다.
그런 반면에 대상존재는,
1 인식되지 않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존재는 인식되어진 만큼 존재한다.
3 존재는 인식에 물들어 있다. (인식에 의해 규정된다.)
위와 같은 이유로서 ‘인식’과 ‘존재’는 순수 독자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이루어져 가는 공동의 장임을 알 수 있읍니다. 공의 표현을 빌면 인식도 공하고 존재도 공한 것입니다. 인식은 부단히 대상존재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해 가며 동시에 대상 존재를 파악하고 규정해 갑니다. 이런 점을 철저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문제를 풀어 감에 있어 모든 것을 ‘마음먹기에 달린 것’ 또는 ‘정신적인 면을 훈련하고 조절하면 될 것’이라는 식의 심리주의로 흐르거나 아니면 문제를 대상적인 것으로만 파악하여 물질적인 측면이나 제도적인 면으로만 치달리는 객관주의적인 모습으로 귀착하게 될 것입니다.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은 대상 그 자체로서, 인식은 인식 그 자체로서도 공한 것(변화와 관계)이지만, 대상은 인식에 있어서, 인식은 대상에 있어서 서로가 공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 구조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유념할 때 통상시 ‘공(空)’이란 표현에서는 객관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평면적인 느낌을 받는 듯하여, 좀 번거롭고 현학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는 ‘공’에 대해 두 가지의 복합적 구성을 띤 이해를 하고 있읍니다. 첫째는 ‘인식적 공’이란 면과 둘째는 ‘존재적 공’이란 측면입니다. 인식은 존재와의 관계에 있어서 공이란 뜻에서 ‘인식적 공’이란 말을 썼고, 역시 존재는 인식에 있어서 공이란 뜻에서 ‘존재적 공’이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과 ‘존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온전히 결부되고 삼투되어 있는 점을 부각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쉽게 도출할 수 있읍니다. 인식의 영역을 정상화시키려면 존재의 영역을 정상화시켜야 하고, 마찬가지로 존재의 영역을 정상화시키려면 인식의 영역을 정상화시켜야 된다고 말입니다. 즉 인식의 해방과 존재의 해방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며, 따라서 인식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는 선후 절차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이고도 역동적인 구조를 통찰하고 체득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은 선후 절차에 따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맞게 되는 것으로서 점진적인 인과성을 떠난 ‘혁명적인 상황’ 입니다.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지칭할 때 돈오(頓悟)-나는 이를 혁명적 깨달음이라고 번역합니다만-라고 표현함도 이런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읍니다.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 깨달음도 동일함은 당연한 것인데,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일러서 돈오(頓悟)라고 표현함은 공의 가르침을 보다 요령있게 나타냄도 나타냄이지만, 공을 체득하는 수행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도 그 요체를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돈(頓)’이란 말은 참 함축성 있으면서도 멋진 말이라 생각되는데, 이를 이해하는 일은 불교가 가지는 깨달음의 세계를 그 중심에서 이해하는 일입니다.
‘돈’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갑자기’, ‘순간적으로’, ‘단숨에’ 라는 시간적인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란 말은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식과 존재의 이중적 상관성이 동시적으로 풀리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또 그 내용에서는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과 이후의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상정합니다. 기존의 관점이나 의식에서의 노력을 단련하고 훈숙(정제)한 결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관점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의 노력이 짧든 길든 관계없이 어떠한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적인 전환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는 말은 수행이나 깨달음을 점진적인 노력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단숨에 제거하는 지침적 선언이 되었읍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