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위기에서 새로운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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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장기표
1997년 12월 190호
보통 한 해를 보내면서 “다사다난”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97년을 보내면서는 다사다난이라는 말을 쓰기가 적합할 것 같지 않다. 다사다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전체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라 그런 말을 쓰면 오히려 너무 한가하다는 느낌을 주겠기 때문이다.
연초에 터져나온 노동법사태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사건이거니와,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은 전국민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들었고, 여중생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포르노를 찍은 사건은 이 사회의 도덕불감증이 이제 그 끝을 알수 없는 곳까지 깊어졌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전국민을 경악시킨 KAL기 괌추락사건, 중소기업의 기록적인 도산에 이은 재벌급 기업들의 잇따른 부도, 정리해고와 대량실업, 증권시장의 몰락과 환율의 급등 등, 사건 사고의 치원을 넘어 우리사회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사태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사건사고없는 해가 언제 있었으며 힘들지 않은 삶이 언제 있었을까마는 1997년도의 어려움은 통상적인 어려움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특히 97년은 대통령 선거의 해라고 할수 있겠는데 대통령 선거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 커녕 실망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어 국민은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1997년을 보내고 있다.
불과 한두 해 전만하더라도 사회가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OECD 가입으로 선진 공업국 대열에 들어섰으며, 삶의 질을 강조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생존조차 영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놀랄만한 일이 아닐수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생활의 전부문에서 더욱더 움츠러들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위기와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사회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있음은 역사적인 안목이 없이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하겠다. 따리서 우리는 오늘의 이 사태를 미시적이고도 일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거시적이고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원인을 통찰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할것이다.
전세계가 지금 문명사적 대전환에 직면해 었다. 산업구조, 인구구성, 사회관계, 사회구조, 인간의 욕구와 희망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생산의 원동력, 국부의 원천, 사회의 운영원리, 가치관 등이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처럼 삶의 총체적 양식인 문명이 바뀌고 있는데도 지난날의 국가경영방식으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사실상 위기의 단계를 넘어 붕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지금 전면적인 변화에 앞서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먼저 시대적 과제를 통찰하고 사회의 발전을 주도해야 할 기성정치세력이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붕괴하고 있다.
집권여당의 분열과 좌충우돌은 단순히 내분의 차원을 넘어 집권세력의 몰락을 말해 준다. 여당의 분열이 없었던들 야당의 집권은 불가능한 정치구조에서 야당의 집권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부터가 여당의 몰락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더욱이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와 총재가 모두 비정치권에서 영입된 인사라는 사실은 집권세력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정도되면 정치를 오래 해 온 사람들은 물러나야 마땅하다.
집권여당만이 아니라 야당도 붕괴하고 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해온 것이 한국야당의 특징인데, DJT연합으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특징으로 하는 야당은 없어졌다. 지난날에 야당이 체제와 권력에 야합할 때가 있었으나 야당으로서의 모습은 갖추고 있었는데 이번에 DJT연합으로 최소한의 야당성마저 상실함으로써 한국적인 의미의 야당은 붕괴한 것이다. 여당은 분열함으로써 붕괴하고 있고, 야당은 통합함으로써 붕괴하고 있다. 기성정치세력만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야출신의 정치세력도 붕괴하고 있다.
민주 개혁 세력이 신한국당, 국민회의, 개혁신당 등으로 분산한 것도 붕괴의 한과정이지만, 스스로 주장한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더 큰 붕괴이다. 설사 기성 정치 세력에 편입되지 않더라도 구시대의 잘못된 이념과 관행에 매달려 세상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붕괴를 자초하는 일이다.
구 정치 세력의 최대 결전장인 이번 대통령 선거판이 그야말로 정치의 기본을 결여한 3무無의 정치판이 됨으로써 붕괴를 촉진하고 있다. 무윤리, 무이념, 무비전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이념과 비전이 없고 인간의 근본 도리인 윤리를 저버린 정치가 국민을 잘살게 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더욱이 국가지도자여야 할 대통령 후보들이 이기주의와 야합, 배은망덕과 표리부동의 표본이 되고 있으니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걱정일 정도이다. 국정을 담당할 지도자를 뽑는 선거라면 당연히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21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도약을 이룰 정책과 비전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데도 아들병역문제나 92년 대선자금문제, YS신당지원설 등 비본질적인 문제로 상대방 흠집내기에 피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기성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신인들조차 원칙과 소신은 고사하고 참신한 맛도 없이 이합집산과 줄서기에 여념이 없으니 국민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 특히 지역주의가 여전히 각 후보의 최대 선거전략이 되고 있어서 선거가 끝났을 때 과연 국민전체를 대표하는 정부가 들어설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대통령후보 누구도 국민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토록 많은 정책토론회를 했건만 어떤 후보도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을 정책을 한 가지도 제시하지 못했다. ‘정권교체’, ‘세대교체’, ‘3김청산’이란 말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특히 우리사회는 지금 정보화 사회, 지구촌 시대, 아시아태평양 시대를 맞아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이룰 절호의 기회인데도 지난 시기의 찌꺼기를 끌어안고 싸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은 기업도산과 대량실업 등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도 국민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는 커녕 국민을 짜증스럽고 불안하게 하고 있으니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잘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
이처럼 기대와 희망의 축제가 되어야 할 대통령선거가 무윤리, 무이념, 무비전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이것은 기성정치판 전체의 붕괴와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수 없다.
정치만 붕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도 붕괴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도산과 영세상인의 몰락에 이어 재벌급 기업이 연이어 부도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기업의 경영부실에서 빚어진 문제이기보다 정경유착과 성장제일주의에 기초한 한국경제가 지구촌경제와 기술혁신시대를 맞아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해 가는 과정이다. 특히 한국경제를 주도해 온 재벌들은 그동안 특혜금융과 부동산투기, 독과점가격, 세금포탈, 문어발경영을 통해 치부를 해 왔으나 이제 개방경제시대를 맞아 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을 통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인원감축을 해야 기업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기업의 유지조차 어려워졌다. 그동안 특혜금융으로 많은 융자를 얻어 계열기업확장과 부동산투기를 해 왔는데 개방경제가 되면서 바로 이 계열기업과 특혜금융이 오히려 재벌기업 붕괴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4대재벌의 경우 금융부채가 약 이십조원 가까이 되는데 해마다 약 이조원의 이자를 부담하고서 재벌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재벌은 누가 해체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문어발 경영과 금융부채로 말미암아 저절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경제를 주도해 온 재벌기업이 도산하면서 온갖 경제적 어려움을 몰고 오게 되었으니 한국경제가 파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경제만이 문제가 아니다. 고지가, 고금리, 고임금, 고물류비용, 고커미션의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 때문에 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함으로써 산업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동시에 공장자동화와 사무자동화에 따른 정리해고와 해외노동자의 대량유입으로 대량실업이 불가피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제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정치나 경제만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교육, 문화, 환경, 종교등 사회의 전부문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 긴 설명이 필요없는 상황이다.
전국민에게 실업의 공포를 갖게 한 노동법 파동으로 시작된 1997년이 비전부재의 대통령선거로 마무리되는 것은 우리사회가 아직 문명사적 대전환에 대처할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총체적 위기와 총체적 절망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한다. 구체제, 구세력의 붕괴 자체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문명의 전환이거니와 문명의 전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정치파탄, 경제파탄, 사회파탄 등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특히 구정치권이 무윤리, 무이념, 무비전으로 붕괴해가는 모습에서 새로운 비전,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국민적 각성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데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오늘의 이 혼돈과 위기와 전망은 최근 유행하는 물리학의 여러 법칙들이 잘 시사해 준다. 물리학에서는 요즘 카오스이론, 블랙홀이론, 빅뱅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등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 시대의 상황과 과제들을 잘 설명해 준다.
곧 오늘 전세계가 문명의 전환과 문명의 충돌 때문에 직면하고 있는 대혼돈 곧 카오스를 블랙홀이 흡수하여 대폭발(빅뱅)을 함으로써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한 대중주체의 인간해방을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카오스, 블랙흘, 빅뱅, 불확정성이 이 시대를 철학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정보화, 세계화, 사이버,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인터넷, 네티즌 등은 이 시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가상공간을 의미하는 사이버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사이버뱅크, 사이버마켓, 사이버데모크러시, 사이버가번먼트, 사이버파티, 사이버커뮤니티, 사이버월드 등은 단순히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롭게 펼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뉴월드)가 열리고 있는 지금 구시대적 논쟁과 처방에 매몰되어 있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전 세계가 문명사적 대전환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방안을 강구한다면 오늘의 이 총체적 위기는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새로운 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