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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요사채와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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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야 - 이상해 2001년 10월 236호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존 당시, 그리고 입멸하신 후 상당 기간 동안 ‘불교사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형화된 ‘불교사원 건축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교 수행자들은 출가·유행의 생활을 하였고, 우기雨期에만 일정한 곳에 머물러 지냈을 뿐이다. 이런 생활이 되풀이되는 과정 중에 비나 이슬을 피하기 위한 오두막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정주하며 수행하는 오두막이나 동굴을 아바사(avasa, 住處), 아람마(a-ra-ma, 園林) 등으로 불렀다. 아바사는 임시적인 것, 아람마는 반영구적인 거주처를 뜻한다.
그 후 비구들의 생활이 점차 유행·편력하는 것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정착해 감에 따라 아란야(Aranya, 阿蘭若), 비하라(Viha-ra, 毗訶羅, 精舍), 승가람마(San·gha-ra-ma, 僧伽羅摩, 僧伽藍摩) 등으로 불리는 안거를 위한 장소나 건물이 마련되었다. 아란야는 원래 세속을 멀리한 ‘숲속’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후일 ‘수행하기에 적당한 장소’로 그 의미가 전이되었다. 승려들의 거주처인 동시에 수행처가 된 건물은 오늘날의 승방과 같은 곳이었다. 승방에는 단독의 승방과 집단의 승방이 있었다. 비하라는 단독의 승방에 속한다. 흔히 말하는 토굴도 여기에 속한다. 비하라는 소승불교의 수행방식의 하나인 좌선을 반영한다. 승도들은 이 고요하고 정밀한 토굴 속에 단정히 앉아 명상을 하며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였다. 이런 작은 토굴은 그들이 선정에 드는 곳이기도 하였고, 또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 후 비하라는 점차 규모가 크고 제대로 된 건축물로 바뀌어갔다.
승가람마는 비하라에 비하여 규모가 큰 집단의 승방이다. 승가(San·gha-)는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뜻하고, 아람마(a-ra-ma)는 거주처를 뜻한다. 승가람마란 출가 수행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거주하며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뜻하고, 중원衆園 또는 승원(僧院, 僧園) 등으로도 번역된다. 한국과 중국에서 불교사원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가람伽藍’은 승가람마에서 유래하였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 불교사원은 원래 많은 불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불도佛道를 닦는 곳이었다. 불상을 모신 법당이나 사리를 모신 탑은 없었고, 승원만 있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스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법에 부합하며 사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을 베푼 것에 연유한다. 《사미율의沙彌律儀》에도 절(寺)이란 출가 제자가 불법을 섬겨 받들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곳, 곧 수행의 도량이 절이라고 하였다.
후세에 와서 가람은 좁은 의미의 ‘승원’이 아니라 승원, 당堂, 탑塔을 총칭하게 되었다. 넓은 의미의 가람을 이루는 승원·당·탑은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배치되어 불교사원 건축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사원은 먼저 승원이 조성된 다음에, 그 다음으로 탑,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이 세워지며 불교사원 건축형식을 갖추어 나갔다. ‘불교사원 건축제도’란 승원·당·탑의 배치관계와 건축형식 및 기법에 관한 것을 뜻한다.
우리 나라 사찰의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사원 안의 건물 자체를 지칭하지만, 불교사원건축의 발생의 차원에서 보면 가장 원초적인 사원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요사채가 스님들이 공부하며 정진하는 승당이나 승방과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있는 것도 불교사원이 비하라나 승가람마에서 출발한 것을 반영한다. 스님들이 수행하고 생활한 공간이 정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대소의 방을 비롯하여 대중방, 공양주 및 불목방, 부엌, 곳간, 수각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 부엌, 식당, 곳간 등이 있는 공간을 특별히 후원後苑이라고 하여 스님들이 정진하는 공간과 구별하여 부른다. 후원에는 돌확, 절구공이 등 음식을 장만하는 도구들과 갈무리하는 그릇들이 있어서 절간이 스님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이 도구들과 그릇들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노라면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스님들의 말뜻을 알게 한다.
규모가 작은 사찰은 요사채가 한 곳에 모여 있기도 하지만, 규모가 큰 사찰은 요사채가 군群을 이루며 사찰 영역 여러 곳에 나누어져 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사찰에는 불전을 관리하는 노전과 주지·조실 또는 노장 대덕이 거처하는 방사가 법당 근처나 사찰 상단 뒤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후 성립된 초기 가람에는 요사채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익산 미륵사나 경주 황룡사, 감은사 터 등을 근거로 해서 요사채는 사원 중심 영역에서 뒤쪽에 해당하는 강당 주위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들은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건물 배치가 많이 바뀌면서 스님들의 거주 및 생활공간은 사찰의 앞 부분에 해당하는 중단이나 하단에 위치하게 되었다.
많은 사찰들에는 법당 앞 마당 양편에 마당을 향하여 큰방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뒤에 ㄱ, ㄷ, ㅁ자 모양의 평면으로 된 건물들을 세워 스님들의 생활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사찰에 따라서는 법당 앞 마당 한쪽으로만 요사채가 배치되고 그 맞은편으로는 나한전, 명부전 같은 불전이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법당 맞은편에 요사채가 자리잡은 경우도 있다.
요사채의 중심이 되는 곳은 사찰에 거주하는 스님들의 방이다. 요사채에는 건물의 한 쪽, 또는 앞뒤 양쪽에 툇마루가 길게 설치되어 있고, 이 툇마루를 통해 마당에서 각 방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건물들은 측면이 한 칸인 것도 있고, 측면이 두 칸인 것도 있다. 측면이 한 칸인 경우, 방들은 사방 한 칸이 단위가 되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측면이 두 칸인 경우, 가운데에 벽을 설치하여 두줄배기로 방을 배치하며 건물 앞뒤에서 각 방으로 출입하도록 한 것도 있고, 가운데에 벽을 설치하지 않고 두 칸을 모두 터서 하나의 방으로 만들어 건물 앞뒤에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한 것도 있다. 최근에 세워지는 요사채의 방들은 두 칸을 하나로 터서 깊숙하고 길게 만든 것이 많다. 하나로 트인 이런 방의 앞부분은 공적인 성격이 강한 공간, 뒷부분은 사적인 성격이 강한 공간으로 되어 스님들이 공부하며 정진하기에 적합한 실내공간을 형성한다.
우리 나라 요사채의 당호는 몇 가지 명칭으로 집약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많이 보이는 당호는 심검당尋劍堂, 설선당說禪堂, 적묵당寂默堂 등이며, 이외에도 탐진당探眞堂, 회승당會僧堂, 궁현당窮玄堂 등이 있다. 심검당의 ‘심검尋劒’이란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보검을 찾는다는 뜻으로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써 중생의 근본 무명無明을 베어내는 수행의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적묵당의 ‘적묵’은 선종 용어로서 언어가 끊어진 자리, 곧 말없이 명상한다는 참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인사 경내에 거주하는 스님들의 수도 및 생활공간은 구광루와 대적광전 사이에 있는 정중삼층석탑 마당 동·서쪽에 있는 건물들이다. 동쪽에는 관음전觀音殿과 정수당 등 요사채가 있고, 서쪽에는 궁현당 등 해인사승가대학(강원)이 있다. 궁현당 뒤 서쪽 일곽에는 경학원經學院과 적묵당이 있으며, 경학원 서북쪽 뒤에는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학사대는 최치원 선생이 독서하며 노닐었다는 곳으로, 손수 심었다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관음전은 규모가 큰 요사채로서 심검당으로도 불렸다. 건물 이름 관음전은 관음암觀音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관음암은 학사대 서북쪽에 있는 지금의 운동장 자리에 있었는데 1850년 화재로 전소되어, 그 소속 재산을 심검당에 옮겨 속하게 한 후 관음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관음전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817년 해인사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908년 회광晦光 대사가 개창改創하여 심검당으로 부르다가, 1945년부터 다시 관음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 관음전은 염불당으로 사용되다가 1946년 가야총림이 설치되면서 해인사 하선원下禪院으로 사용되었으나 선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는 강원과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 기둥에 걸려 있는 “일곱 겹 보수가 극락세계를 에워싸고(七重寶樹圍金界), 일편 빙심이 옥 항아리 속에 들었도다.(一片氷心在玉壺) 이 때 물푸레나무 향내를 맡았느냐(此時聞木犀香乎).” “구름은 청천에, 물은 병 안에 있도다(雲在靑天水在甁)” 등의 문구는 이 건물이 선원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한다.
원래 관음전 일곽은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사방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당 서쪽, 즉 대적광전 앞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쪽으로는 심검당, 마당 북쪽으로는 요사, 마당 동쪽과 남쪽으로는 ㄴ자를 엎어놓은 모양의 평면을 한 고방이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 옛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1991년 정면 아홉 칸의 ㄷ자형 평면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관음전 동쪽에는 1994년 완성한 정면 아홉 칸 규모의 정수당正修堂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하층은 스님을 포함하여 해인사를 찾는 참배객들도 공양을 들 수 있는 식당으로 사용된다. 一자형 평면의 정수당과 ㄷ자형의 관음전 사이에는 네모난 마당이 형성되어 있다.
궁현당은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성종 21) 왕실의 지원으로 학조學祖 스님이 해인사를 크게 중창할 때 이미 포함되어 있던 건물이다. 1621년과 1750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1908년 중창하여 세 동의 건물을 지었다. 당시 상량문에 의하면, 궁현당은 모든 요사채를 관할하는 해인사의 중심 건물이었으며(一寺之樞要 衆寮之管轄), 1917년 궁현당중수기에 의하면, 궁현당은 강당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始創講法之堂曰窮玄). 현재의 건물은 1988년 기존 세 동 건물을 모두 철거한 후, 1990년 사방에 퇴칸을 두른 정면 아홉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해인사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현窮玄’이란 ‘깊고 오묘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궁현당은 ‘부처를 가려 뽑는 곳’이라는 뜻의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학원은 본래 1892년(고종 29)에 범운梵雲 스님이 가의대부嘉義大夫 민형식(閔炯植, 1859-?)의 간청으로 왕과 왕비, 그리고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삼전축이소三殿祝釐所로 창건하여, 이름을 경홍전景洪殿이라 하였던 건물이다. 그 후 1946년 환경幻鏡 스님이 경학원으로 건물 이름을 바꾸고 내부를 고쳤으며, 1968년 건물을 중수하여 이듬해인 1969년 해행당에 모셔져 있던 해인사 조사祖師의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1975년부터 해인사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 기단 앞면 양측 끝에는 용두가 설치되었고, 그 사이의 좌측부 면석에는 쥐, 우측부에는 용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조각은 경학원을 왕실의 원당 건물로 지었음을 알게 한다.
본래 적묵당 자리에는 1893년 경학원을 지을 때 경학원 단 아래 남쪽에 수월문을 짓고, 그 좌우에 붙여 지은 동익랑(행자실)과 서익랑(강주실, 삼소굴), 그리고 창고 등 건물 네 동이 있었다. 이 건물들이 낡고 협소하여 1989년 법전法傳 스님이 전·후 퇴칸을 가진 정면 아홉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적묵당을 다시 지었다. 현재는 해인사 강사채로써 강주실, 강사실, 중강실 등이 있으며, 궁현당·관음전과 함께 해인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 사찰의 많은 요사채 건물과 주변 자연을 보면 건물과 자연이 따로 있지 않다. 거기에는 서로 경계를 지어 마치 불순한 음모를 도모하는 것처럼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현대도시의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담겨 있다. 어느 누가 소유하기보다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공동의 삶을 추구하며 생활을 함께 하는 장소로 요사채는 만들어졌다. 그래서 요사채 건물을 보면, 자연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당과 건물들을 잇는 통로, 공간, 방 모두가 열려 있고 비어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사찰 요사채의 공간과 건축형식은 분별 없이 지어지는 현대도시와 건축에 던지는 공동체적 삶을 위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이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사람들을 만든다. 그래서 요사채가 가지는 건축적 의의는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