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에 의해 세상을 건설된다.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제4에, 보현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끝없는 여러 세계를 비로자나께서 모두 장엄하시니 세존의 경계 부사의함이여 지혜와 신통력이 이와 같도다.〔所說無邊衆刹海를 毘盧遮那悉嚴淨하시니 世尊境界不思議여 智慧神通力如是로다]
세상은 모두 중생의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마음이람 ‘중생이 좋아하는 욕구’이다. 이 욕구에 따라서 업이 이루어지고 그 업은 다시 모든 세계를 건립한다. 그러므로 착한 불자가 이루는 세상은 불국토일 것이요, 악한 중생이 이루는 세상은 혼탁하고 투쟁으로 얼룩진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신통력과 원력은 모든 중생을 자신과 똑 같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자나의 모든 장엄은 곧 ‘원력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願周法界〕’ 이다.
제불께서 갖가지 방편의 문으로 온갖 세상에 출현하셔서 모두중생의 좋아하는 마음을 따르셨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좋은 방편력이로다.〔諸佛種種方便門으로 出興-切諸刹海하사대 皆隨衆生心所樂하시니 此是如來善權力이로다〕
제불의 방편력이란 중생의 욕구를 따르는 듯하지만 중생이 오탁악세五濁惡世로 가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는 않는다. 구경에 가서는 욕구가 만드는 고통의 세상을 마감하고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섭四攝의 보살방편행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동사섭同事攝’ 이리라. 그래서 중생의 욕구로 건립된 세상에 불보살은 저마다 그 한 국토에 원력으로 몸을 나투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 열반의 적광토寂光土에 부처님이 사시지 아니하고 오탁악세에 계시는 것이 아닐까!
보살은 중생을 위해 한량없는 몸을 버리신다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 제5에도 보현보살의 게송은 이어진다.
광대한 구름같은 대비大悲가 모두에 두루하여 몸을 버리심이 한량없이 미진수세계에 평등하시니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한 힘으로 지금이 사바세계에 어떤 번뇌도 없게 하시도다.
〔廣大悲雲 -切하사 捨身無量等刹鹿하시니 以昔海峰修行力으로 今此世界無諸垢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제불의 대비하신 방편의 힘으로 사섭을 행해사 구경에는 중생을 번뇌없는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청량소에서는 오랜 세월 수행한 힘이란 풍륜세계風輪世界 등 숙세에 닦으신 보살행〔宿世〕올 말하고, 금차세계란 바로 우리의 화장세계〔現緣〕를 말한다고 하였다. 화장세계란 여러 부처님이 보살피는 바로 이 ‘사바세계’를 가리킨다. 고통에 찌든 사람이 보면 ‘고통스런 세상’ 이겠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연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세상’이리라.
‘버리신 몸이 한량없다〔捨身無量〕’고 하였으니 지옥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지옥에 나시기도 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루나富樓那처럼 외도에게 몸을 버리기도 하고 목건련目健連처럼 법문을 펼치다가 어머니를 구제하려고 돌을 맞기도 하고 또 지옥을 찾기도 했던 것이다.
천 개의 태양 같은 부처님
다음으로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제6을 보자. 그 때에 대위광태자大威光太子가 법의 광명을 얻고 나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으시니 청정하고 크신 광명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출현한 듯 널리 법계를 비추는도다.〔世尊坐道場하시니 淸淨大光明이 譬如千日出하야 普照虛空界로다〕
얼마전 덕유산 한켠에 비구니 수선도량修禪道揚으로 자리한 영각사靈覺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조그만 법당에 참배하려 계단을 오르다가 주련 글씨를 본 순간 잠시 탄성歎聲을 발하였다. 바로 이 게송을 보았던 것이다. ‘거룩한 부처님이 계시니 그 밝기가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출현한 것과 같다’ 하였으니 함께 갔던 일행들이 “비유법일 뿐이다” 하였지만 화엄에 관심 있는 나는 경전을 대하고 있을 때에 느끼지 못한 감동이 가슴 가득 전해져 옴을 느꼈다. 얼마나 밝았으면 천 개의 태양일까, 천 년의 암흑 동굴 속에서도 하나의 촛불만 켜게 되면 어두움이 한꺼번에 달아난다는데 하물며 천 개의 태양이겠는가!
여기까지의 6품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곱도량의 아홉 번 법회〔七處九會〕’ 가운데 첫번째인 적멸도량寂滅道場 설법이다. 다음의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제7부터는 보광법당普光法堂에서 두 번째 법회가 열리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게송에서 말한 내용을 한번 더 음미하자. 중생을 위하여 보실이 버린 몸이 불가설의 화장세계 숫자와 같다고 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일생을 투자하고 버리고 있는가? 세상사람을 우리는 흔히 하찮은 자신만의 이익, 가정이나 사랑하는 그 누구를 위하여 산다고 하여 ‘중생’이니 번뇌에 끄달린다’느니 하여왔다. 오늘날 출가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사회에 비쳐지고 있는가? 갓바위 부처님 앞에서 벌이는 낯뜨거운 싸움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래도 갓바위 부처님은 천 년의 침묵으로 내려다보신다. “너희들 도대체 왜 그러느냐?” 하시면서.
조계사의 주면이 누가되든 ‘종권을 위하여 또 그 무엇을 위하여 헐떡거리는 모습’은 이 겨울에 모두 끝내야 한다. 그리하여 불기 2544년이자 서기 2000년에는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출현한 밝고 건강한 새해 첫 일출日出을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