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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당우(堂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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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원택 1987년 06월 64호
구광루(九光樓)
해인사의 모든 집들 가운데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구광루는 마치 해인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듯 헌출하고 우선 보기에도 기상이 넘치는 건물이다.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보광법당(普光法堂)을 비롯하여 모두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고 중생을 교화하셨다고 한다. 그때마다 설법하기 전에 먼저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그 빛이 비치라고 백호(白毫)에서 광명을 놓으시고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시어 그 기쁜 마음에 설법하셨는데 구광루라는 이름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옛부터 대부분의 절에는 누각이 있고 그 누각은 큰 법당과 서로 마주 보면서 큰 법당을 올려 보도록 배치되어 있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이는 누구나 법당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법당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한정되어 있어서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이 주로 출입하였고 일반 대중들은 누각에서 큰 법당을 바라보면서 예배를 올리거나 큰 법당의 마당에서 예배를 올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법당과 도량(道場)에 대한 신성함을 강조했음이리라. 그러므로 누각은 운집대중(雲集大衆)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경청하기도 하는 장소로 쓰여졌던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큰 법당 드나드는 일을 예사로 생각하는 세태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현재의 구광루는 건평이 67평으로 일곱칸 양면 집이다. 개산 당시(開山當時)에 세워졌으나 순조 17년 정축 대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던 이 누각은 순조 19년, 서기 18l9년 경상감사 김 이재(金履載)의 주선으로 중건하였고 그뒤 퇴락한 것을 1949년에 그 당시 주지 금봉(錦峰)화상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광루(九光樓)라고 쓴 편액의 글씨는 당시 명필이셨던 남천(南泉)스님이 쓰셨다.
지금 이 구광루는 해인사의 사중보물을 보관하는 보물보 관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모인 보물들은 상당히 귀중한 불교 재산이므로 보다 나은 환경의 박물관 시설이 따로 마련돼야 하겠다.

심검당(尋劍堂)
심검당은 총 평수가 293평이나 되는 큰 요사채로서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순조 17년 대화재에 소실되고난 뒤 서기 1908년에 불심이 장했던 상궁 천일청(千一淸)의 시주로 새로이 중창된 것이 기록에 있다. 이 때에 스님들의 요사채로 지어졌으며 이름도 심검당이라 하였다.
심검(尋劍)이란 슬기의 보검(寶劍)을 찾는다는 뜻으로 즉 날차로운 지혜의 칼로써 중생의 근본 무명(無明)을 베어내는 집이란 말이다. 흔히 심검당은 관음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본래 학사대(學士臺) 너머 옛 관음전이 불타 버린 뒤 그 소속 재산을 옮겨 이에 속하게 하고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한 것에 연유한다. 현재는 주지실과 강사실 등 학인(學人)들이 생활하는 강원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경학원(經學院)
이 건물은 1892년 고종 2년에 범운(梵雲)소님이 민 형식(閔炯植)의 간청으로 세웠다. 본래 왕과 왕비 그리고 태자의 삼전위축소(三殿爲祝所)로 지어 그 이름을 경홍전(景洪殿)이라 하였으나 얼마 전 환경(幻鏡)스님이 경학원(經學院)이라고 그 이름을 고치고 조사(祖師)의 상(像)을 봉안하였다가 1976년부터 그 당시 강사였던 보광(普光)스님과 뜻있는 학인들의 원력으로 해인사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사운당(四雲堂)
지금의 사운당은 근년에 명진스님이 주지일 때 새로 중창한 건물이지만 본래의 사운당은 지금의 우화당 건물이었다.
사운당(四雲堂)이란 말은 사방(四方)에서 수행하는 운수납자(雲水納子)들이 와서 운집한다는 뜻이다. 초창 연대는 알 수 없고 순조 17년의 정축 대화재 이후 다시 중창하였으나 도편수를 잘못 만나 지은 지 얼마 안되는 건물이 못쓰게 되었으므로 다시 적환(賊還)스님의 원력으로 중건되었다. 그후 설호(雪醐)스님이 주지일 때인 1939년 다시 중창불사를 한 다음 퇴락한 사운당을 얼마 전인 1980년부터 당시 주지이시던 명진스님이 새롭게 중건하였는데 현재 이 건물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보경당(普鏡堂)
지금 현재 보경당 건물은 근래 도성(道成)스님과 도견(道堅)스님께서 주지일 때 불교회관으로서 지어졌다. 여러 큰불사에 집회장(集會場) 겸 법당으로 쓰이도록 설계된 건축물로서 지하층도 크게 내어 여러모로 쓸모있게 지어진 집이므로 불사 때에는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본래 보경당이 있기 전에 이 자리에는 명월당(明月堂)이란 당우가 있었다. 명월당은 건평이 170평이었고 순조 17년 정축 대화재 이후 요사채의 일부로 지었으며 본래 주지실과 강원의 부속 건물이었는데 방 뒤쪽으로 회랑이 있어 들창을 열고 남영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취있는 집이었다.
명월당은 광무 7년인 1903년에 해붕(海鵬)선사가 중건하였고 1908년에는 회광 스님이, 1947년에는 당시 주지였던 환경(幻鏡)스님께서 중창하였다. 근년에 명월당이 있던 자리에 지하실을 콘크리트로 지어 후면에서는 2층집으로, 구광루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도록 하고 다락을 만들어 여러 용도에서 쓸 수 있도록 설계한 보경당이 크게 들어섰는데 해인사의 고유한 배치의 아름다움이 이 보경당의 크기로 인해 전체의 균형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무릇 집을 지을 때는 건물의 쓰임새도 중요하지만 자칫 전체와의 조화를 잃어 이제까지 가꾸어 온 아름다움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국사단(局司壇)
국사단은 해인사의 사내(寺內)를 수호하는 호국신(護局神)을 모신 단(壇)이다. 국사단은 천왕문과 해탈문 사이에 있는 6평 넓이의 작은 삼칸 건물로서 순조 17년 정축 대화재 때에도 화마를 면한 곳이다. 철종 6년 서기 1855년에 중창되었으며 고종 3년인 1899년 범운(梵雲)스님께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를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국사단을 만들었으며 이 곳에서는 매해 정월 망일(望日)에 국사와 사천왕에 대한 법요가 성대하게 거행된다. 또 이 국사단은, 아래 마을 사람들 사이에 ‘국사단에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꼭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주련의 글씨는 해강 김 규진의 글씨인데 그 뜻은 이러하다.

局司大神振玄風
消災降福願皆從
洞察人間如反掌
敎化群生一切同

국사대신이 현풍을 떨쳐
화근은 없애고 복을 내리니 모두 다 따르도다
인간의 일을 손바닥 보듯이 통찰하시니
모든 군생을 한가지로 교화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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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말
‘가람의 향기’에서는 이제까지 해인사의 지리적 위치라든지 창건 당시의 설화와 정신, 창사에 얽힌 이야기, 팔만대장경각과 장경에 대한 역사 그리고 각 당우 등을 대략적으로 소개해 보았읍니다. 이제부터 각 부속 암자의 연혁과 역사 이야기 그리고 시중의 보물 및 거쳐간 고승들의 이야기 등 주로 정신적이며 해인사의 문화적인 것을 중심으로 시명스님께서 계속 집필해 갈 예정입니다.
그동안 집필에 많은 도움을 준 여러 자료와 해인사에 관계된 여러 관계 문헌에서 많은 지식을 얻었는데도 지면 관계상 이를 일일이 다 소개 올리지 못하는 허물을 용서하시기 빌면서 독자 여러분의 계속적인 성원과 지도 편달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