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당시 충청북도 충주시의 금융조합 전무이사로 계셨던 고모부께서 한번 놀러오라고 하며 “네가 이 곳에 오면 가볼 만한 유적지도 많다”고 하였다.
충주 주변에는 탑평리 7층석탑(일명 중앙탑, 국보 제 6호)을 비롯하여 충주 시내의 대원사 충주철불(보물 제98호), 임경업 장군 사적 등 많은 유적지가 있으므로 그 동안 여러번 답사한 적이 있었지만 유난히도 나를 귀여워해 주셨던 고모부 내외를 뵈오려 갈 겸, 혹시 중요한 유적 유물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하는 기대감으로 길을 나섰다.
청량리에서 기차편으로 중앙선의 제천역에서 내려 시외버스 편으로 봉양을 지나 유명한 박달재를 넘어 충주로 갔는데 고모부댁 가족들의 환대가 대단하였다. 며칠 동안 쉬면서 내어 주신 자전거를 타고 중앙탑은 물론 창동석불과 5층석탑 및 마애불, 탄금대, 임경업 장군의 사당, 대원사 내의 철불좌상 등 오랜만에 차분하게 견학하였다. 밤이면 그날 그날의 답사내용을 이야기하는데, 내일이면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날 밤에 고모부께서 “왜 충주 근처만 다니느냐”고 하시면서 충주에서 가까운 괴산에 각연사라는 절이 있는데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아직껏 못 가보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너는 절을 잘 찾아다니고 옛날 것들을 좋아하니까 한번 가보고 천천히 쉬었다 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방면을 공부하고 있으니 혹시 뜻밖의 귀중한 연구자료를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하루 이틀을 더 묵기로 작정하였다.
다음날 바랑 속의 조사도구를 정리하여 등에 메고 새벽같이 출발하였다. 수안보를 지나 이화령을 넘어가는 상주행 버스편으로 고개 밑 삼거리에서 하차하여 괴산 읍내로 향하는 버스를 갈아탔다. 괴산군 장연면長延面 태성리台城里에서 내려 약 20리길이 되는 산골길을 따라 보개산寶蓋山 중턱의 각연사에 도착하였다. 사찰의 행정적 위치는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번지이다.
지금은 절까지 찻길을 개설하여 차량을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으나 당시만 해도 산길이어서 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몇 번이나 건너가고 건너오고 해야만 절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절까지의 산길은 계속 오르막길이어서 등산하는 기분이었는데 징검다리가 놓여진 계곡물을 건널 때마다 옷 입은 채로 물 속에 앉아서 삼복의 무더위를 식히곤 하였다. 이러기를 몇 번 하다보면 옷은 젖었다 말랐다 한다. 그러다가 절에 도착했을 무렵이면 신발만 젖어 있고 옷은 언제나 거의 마른 상태였다.
새벽에 충주를 떠날 때 날씨는 흐렸고 태성리에서 각연사를 향하여 산길을 오를 때도 약간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걷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절에 도착하여 조사하는 것도 별 지장이 없었다.
각연사는 신라시대의 창건으로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고는 하나 필자가 찾았을 때는 대웅전과 비로전 건물뿐이었으며 작은 규모의 요사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당시 주지이신 이성출李聖出(63세) 스님의 말에 의하면 ‘근년에 농사를 지을 때 많은 기와와 자기, 석조물 등이 주변 밭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귀부龜趺 1좌와 옥개석 등이 주목되며 아직도 많은 유물이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지 스님의 안내로 뒷산 능선에 파손된 채로 있는 통일대사通一大師 부도와 밑의 석비, 그리고 비로전 안에 본존불로 모셔놓은 비로자나불 등을 조사하였는데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은 석불좌상이었다.
현재 각연사覺淵寺 비로전毘盧殿 내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하고 있는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이며 지금의 자리가 원위치로 생각된다.
나발의 머리 위에 낮은 육계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돌려졌는데 길게 늘어진 양쪽 귀와 잘 어울린다. 상호는 원만하며 이마에 백호는 없고 양미안, 비량, 구순 등이 정제되었는데 각부를 채색하여서 원래의 모습을 그르치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왼쪽 팔에 걸쳐 양쪽 무릎을 덮었는데 의문이 유려하다. 수인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통인通印인 지권인智拳印을 결結하고 있다.
광배는 2조선으로써 두·신광을 구별하였고 정상부에 3구의 화불과 좌·우 3구씩의 배치로 도합 9구의 합장한 화불이 연화좌 위에 조각되어 있다. 두광의 8엽 연판 밖의 간지間地에는 두·신광이 모두 운문雲紋이며 주연에는 멋진 화염문을 양각하였다. 한편 광배의 뒷면에는 복련을 조각한 위에 액額을 마련하고 그위에 장막을 겹겹이 내린듯한 보개의 장식이 있는데 이러한 연輦 모양은 혹시 보탑의 의장이 아닌가 주목된다.
이 불상은 옥내屋內의 유물임으로 보존이 양호한데 좌상의 양식이나 광배의 화염문, 화불의 배치, 대좌 각부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신라하대인 9세기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이 불상은 각부가 잘 구비되어 있고 보존상태도 좋아서 다음해인 1966년 2월에 「각연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433호로 지정 보존하게 되었다. 주변 대지와 밭 가운데 있는 석조물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하여 탑영榻影은 다음으로 미루고서 실측만을 서둘러 마치고 비로전에 들어가 석불좌상을 조사하였다. 한참 동안 실측한 뒤 역시 탑영은 다음으로 미루고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주지스님과 함께 낮공양을 마치고 요사채의 문밖을 나서니 비는 그 때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주지스님 말씀이 ‘하루 쉬고 내일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이니까 빨리 가면 막차를 타고 충주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여 달리듯 걸음을 채촉하였다.
얼마를 내려오면서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는데 물은 점점 불어나고 물살이 세어졌다. 마지막 건널목으로 기억되는데 계곡물의 폭은 두배로 넓어졌고 물은 가슴까지 차올라 떠내려 갈 지경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등에 메고 있던 바랑을 벗어 힘껏 던져 놓고 겨우 계곡을 건넜는데 마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신작로까지 정신없이 걸어 막차를 타고 충주로 향했다. 버스 기사와 손님들이 내 모습을 흘끔흘끔 보는 것이었다. 나는 모른 체하고 서서 악몽 같았던 계곡의 순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충주에 돌아와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니 오대산 월정사 계곡에서 고려대학교 학생 십여명이 조난당했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되었다. 순간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 후로 비가 올 때는 절대로 계곡을 찾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