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참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시누대밭이 있고, 골짜기 하나가 끝나는 곳에서 서서히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길을 계속 가면 산정상을 향해 오르다가 우람히 솟은 저 앞산과 어우러지는 어디쯤에서 아마 물 하나를 건너면 상원암으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오늘은 여기서 돌아 가야만 한다. 속내는 그러면서도 발길은 계속 내닫는다. 조금만 더 저 모롱이를 지니면 또 어떤 길이 나올까. 쉬이 돌아서지 못한다. 아직 남아 있는 몇 잎 단풍이 햇살에 투영되어 더욱 곱다. 전류같이 지나는 그리움. 가슴이 시리다. 이렇게 햇살이 곱던 오월 마당가 목단꽃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눈을 씻던 할머니, 반듯한 이마 동그란 얼굴 하얀 가리마…. 내 삶이 곤하여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주문같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초하루, 보름 새벽별이 뜰 때면 미동도 없이 고요히 일어나 빗첩을 내려 쪽을 다시 찌시고, 어린 나를 깨워 총총히 머리를 땋아 리본을 꼭 매어 주신다음 우물로 가신다. 아직 누구도 떠가지 않은 물을 동이에 가득 채워 돌아온 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별빛을 받아낸다. “할머니, 저는 뭐라고 해야지요?” “이담에 학교 가면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빌거라.”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뒷전에 서서 손을 모았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가족 모두의 축원이 끝나면 아궁에에 불을 지피시고 나는 들어와 따뜻해지는 등뒤의 온기를 느끼며 잠이 들었다. 때로는 사랑채에 나아가 단정하게 가부를 맺고 앉으신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훨씬 자라서 밤늦도록 공부하다 손발이 꽁꽁 얼어 안방에 들어서면 손과 발을 당신의 가슴에 품어 녹여 주시던… 절대의 사랑은 이러해서 물리치거나 나무람이 없었다. 어쩌면 그토록 알뜰히 받기만 하고 단 하나도 드린 것 없이 보내야 하는 연이었는지… 어느날 그 우물가를 지나 황망히 가시기에 벌써 가시냐고, 어디로 가시냐며 꿈에서도 안타까워 치마폭을 즈려 잡았는데… 그 뒤론 영 소식이 없으시다. 지금 어디쯤에서 편안하신지….
갈참나무 숲은 겨울비 오는 날이 적격이다. 진눈깨비 오는 날의 숲은 시다림의 과보다 무겁고 처연히 누운 잎들이 붉은빛을 띠며 마지막 윤기로 반짝인다. 이들을 앞에 놓고 미리 준비해간 요령을 흔들며 원각경 보안보살장을 독송한다. 듣는 것이 어찌 갈잎뿐이랴.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일체 유주무주 애혼고혼을 향한 염불은, 더욱 간절해지고, 간절함으로 모든 힘을 써버리고 빈손과 빈마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지금 내 육신은 네 가지 요소로 화합된 것. 털, 손톱, 이빨, 살갖, 근육, 뼈, 골수들은 다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침, 콧물, 피, 눈물, 대소변은 물로 돌아갈 것. 더운 기운은 불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가지 요소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이 허망한 육신은 어느 곳에 있을 것인가. 이몸은 본디 자체가 없는 것인데 화합하여, 형상을 이루었으니 사실은 헛것이며, 네 가지 인연이 거짓으로 모여 육근이 있게 된 것이요, 육근六根과 사대四大가 안팎으로 합하여 이루어졌는데 반연하는 기운이 허망하게 그 안에 모이고 쌓여 반연하는 것이 있는 듯한 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오. 이 허망한 마음도 육진六塵이 없다면 있을 수 없고, 사대가 흩어지면 육신도 없을 것이라.
모든 실상의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에 한몸이 청정하고 한몸이 청정하므로 여러 몸이 청정하며 여러 몸에 청정하므로 시방세계 짧의 원각도 청정합니다. 한세계가 청정하므로 여러 세계가 청정하고 여러 세계가 청정하므로 마침내는 허공과 삼세를 두루싸 모든 것이 평등하고 청정해서 움직이지 않소. 그러므로 생사와 열반이 지난밤 꿈과 같아 생사와 열반,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것이지요.”
원각경 보안보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