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문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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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땅 좋은 벗 - 안혜령
1999년 12월 214호
세간에는 지진으로 널리 알려진 충청남도 홍성은 예로부터 논농사가 성한 곳이다. 그 홍성군 홍동면의 문산마을은 문당리와 동골, 이웃 금평리를 아우르는 자연부락으로, 역시 논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다만, 전체 예순 집 가운데 마흔여섯 집이 오리농법으로 논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 여느 농촌 마을과 사뭇 다르다. 한 마을 사람들로 영농조합법인이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오리농사에서 판매까지 함께한 지 칠 년이 되어가니, 요즘 나라 안 곳곳에서 활발한 유기농 생산자조합 또는 공동체들이 흔히 넓은 지역의 여러 마을에 흩어진 생산자들의 모임인 것과도 경우가 다르다.
이 마을에서 유기농사가 시작된 것은 이십 년 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주형로 씨가 논 오천 평에 학교에서 배운 바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웃 팔괘리에 자리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는 무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학교이며, 한국 정농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산실이자 중심지라 할 만한 곳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기농업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농업학교이다.
1958년 설립 때부터 “농업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이고 고향, 또는 지역 자립의 중요한 기초”임을 인식하고 농업학교를 자청했으며, “위대한 평민”, “더불어 사는 평민”을 목표로 내세웠다. 평민이란 “자각한 존개”로서, “믿음과 교양과 독립하는 생활력을 갖춘 사람”을 일컬으니, 그 이념대로 머리와 손을 함께 쓰는 전인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민생의 창업생”으로서 학교를 졸업한다.
졸업생들은 거개가 홍성 지역에 터를 잡고 활발한 지역 살림 운동을 벌임으로써 학교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풀무생협 유기농업 생산자회, 풀무 신용협동조합, 갓골어린이집, 도서 조합인 시골문화사, 재생비누 협동조합들이 학교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주민들이 자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단체들이며, 우리니라 지역신문의 효시를 이루는 홍성신문, 국산 콩으로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바른 식품, 자가배합한 사료를 먹여 건강한 소를 키우는 홍동한우 또한 졸업생들이 꾸려가고 있다.
이렇듯 지역 학교 출신들이 그 지역의 생산유통조직과 가공산업, 교육, 문화활동, 환경, 농민단체, 언론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지방 기초 분야에 틀을 잡아 나가고 있으니, 홍동면은 자각한 지역민들이 지역 살림을 튼실히 일구는 진정한 자치지역으로 보기 드문 곳이라 할 수 있다. 문산마을 또한 이 다양한 가지의 하나로 시작하여 굵고 탄탄한 줄기로 벋어가고 있는 풀무의 산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성싶다.
유기농사초기에 이에 매달린 선구적인 이들이 그러했듯 주형로 씨 또한 고군분투했으니, 논 오천 평을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매다 지쳐 쓰러져 잠들면 꿈속에서도 내처 김을 밸 정도였다. 식량 증산이 지상 과제이고 농약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는지라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과 냉대가 대단했다. “그 쌀 먹으면 백 년을 사나?” 어느 장날엔가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던지는 빈정에 논둑에 서서 통곡하기까지 했다.
십 년이 넘도록 그렇게 애면글면하던 차에 스승이자 크나큰 의지처인 풀무학교 홍순명 교장이 그에게 새길을 열어 주었다. 일본 잡지에 실린 오리농법 기사를 손수 번역하신 글을 보내 오신 것이었다. 서슴없이 실행에 옮겼으니, 홍성 농촌지도소의 지원을 받아 이웃 친구 하나와 함께 만평 논에 오리를 풀었다. 1993년, 홍성군에서 처음 시도된 오리농사였다.
대성공이었다. “미쳐도 많이 미쳤다”며 수근대던 마을 사람들은 농약없이 오리가 지어 놓은 참한 농사를 보고 그저 “허, 참”을 연발하며 기막혀 했는데, 그는 이 “기막힌” 농사법을 저 혼자 차지할 것이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룹을 져 가며”, “둥글둥글 모지지 않게 같이 잘 돌아다니”는 오리들을 보면서 그 모습이 사람 사는 모양과 다를 바 없다 느끼고 그렇게 살이야 되겠다 마음먹은 터였다.
농민 운동, 농촌 운동에 대해 평소 생각이 많기도 했다. 홍성 지역만 해도 생협 운동이 활발했고, 그자신 정농회원으로서 정농회 홍성지회장이자 전국 수도분과위원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각 단체 안에서나 단체들 사이에서는 일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지만 그 힘이나 성과가 마을에 미치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는 또한 평범한 문산마을 사람이기도 한 터였다.
기존의 운동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끼리” 자신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는 있으나, 옆으로, 아래로 확산하여 커지지는 않는다고 보았고, 그것이 바른 운동일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곳곳에 조성되고 있는 생태마을이니 생태공동체들 또한 그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본다. 개인 사람들끼리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그는 나날이 피폐해지는 우리 농촌을 새롭게 일구는 일이 더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일이라 여긴다.
가깝게는 그가 개별적으로 벌인 우리밀 공장의 운영을 맡고 있는 풀무학교 후배이자 부인 정예화 씨로부터, 마을 안의 같은 정농회원들과 풀무 졸업생들, 젊은 귀농자들, 그리고 대대로 마을에 뿌리내리고 살아 온 마을 어른들. 그 이들 모두가 “우리 마을” 사람인즉, 기독교인도 있고 불자도 있는 이 다양한 구성원들을 함께 껴안고 가는 것이 “더불어 사는” 바른 길이라 믿는 것이다. 종내 그는 정농회 홍성지회장 자리를 물러나 마을운동에 열성을 쏟고 있다.
첫 농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 해 겨울, 그는 제 마을의 열아홉 집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경쟁력 있는, 특별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우리 농업은 망합니다”하며 오리농사를 권했다. 우르과이라운드가 한창 화제에 오르고, 농촌이 “우르르 쾅쾅 무너진다”고 입을 모을 때였다. 그 사회 경제적 상황이 그의 설득에 힘을 실어줘 열아홉 집 모두 그와 뜻을 함께하겠노라고 나섰다.
나아가 그는 “도농일심”, 도시와 농촌이 함께 짓는 농사를 제안했다. 유기농업이란 땅을 지키며 바른 양식을 만드는 일인즉, 생명을 살리는 이 좋은 일에 소비자들도 참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협 총회에선가 “오리를 보내 주세요”라고 한 그의 청이 중앙 일간지 한 귀퉁이에 실렸고, 사흘 동안 전국에서 삼백삼십 명쯤이 천구백오십만원을 보내 주었다. 그 돈으로 오리를 사고, 필요한 시설도 갖추었다.
95년 6월 6일, 정농회와 함께 성금을 보내준 소비자들을 초대해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행사인 “오리 진수식”을 성황리에 치렀다. 사백 명이 넘는 도시 소비자들과 마을 사람들이 그야말로 “일심”이 된 뿌듯한 자리였다. 이 오리농법과 오리 진수식은 이내 홍성군내와 나라 안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니, 한동안 그는 이 새로운 농사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농촌 지역을 돌아다니며 강사 노릇도 했다.
한편, 그는 흑미로 눈을 돌렸다. 색깔 있는 쌀은 본디 중국어나 일본에서 잘되는 품종인데 이를 중국에서 들여온 이에게서 씨를 몽땅 사서 재배한 결과,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맛도 좋은 데다 검정색이 특색 있는지라 홍동농협에서 특산품 제의를 해왔고, 판매도 잘되었다. 흑미 재배가 다시 마을에 전파되었고, 96년부터는 일반미와 흑미의 생산량 전체를 홍동농협과 사전계약하여 선수금을 받고 생산하고 있다.
오리쌀이 무농약 품질 인증을 받은 터에 지난 해에는 정농회와 손잡고 만든 ‘정농 환경보전 오리농업단지’의 단체 명의로 특산물 품질 인증도 받았다. 이어 마을자체만으로 ‘홍성 환경보전농업 시범마을 영농조합법’을 만들었고, 농림부로부터 환경농업 시범마을 계획에 대한 인가를 받았다. 그 삼사년 사이에 그는 환경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법인의 전체 수익금에서 일정액을 떼어냈고, 이 태전에 법인 명의로 마을 가운데 들어 앉은 산을 샀다. 오백 년은 좋이 넘을 소나무들이 청청하니 늘어선 삼천 평 산자락에 ‘홍성 환경농업 교육관’을 지을 계획이다.
교육관은 크게 마을회관과 숙박시설, 박물관으로 나뉜다. 마을회관은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서, 마을 총회장이자 결혼식이나 생일 잔치 같은 마을잔치 마당이 되기도 하며, 아이들의 독서실과 어른들을 위한 찜질방도 마련할 것이다. 농민교육과 연수를 실시하며,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또 마을을 떠난 이들의 고향 방문 때에 숙소로 활용할 수도 있다. 회관 안에는 주방 시설을 갖추어 마을부녀회에서 관리하게 한다.
“자기 조상들 사는 모습이 죽은 나라”가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서 농업을 비롯해서 홍동 지역의 옛 생활을 보여 주는 작은 박물관도 구상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대장간을 되살리려 한다. 실제 농기구를 만들기도 하거니와 농기구 모형 기념품도 만들어 팔 생각이다.
교육관과 별개의 식당 운영도 계획에 들어 있다. 손님들의 식사는 물론, 농번기 점심이며 참을 전담하면 일손을 훨씬 댈 수 있으리라 본다.
이 교육관을 중심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다. 농민이 살아 숨쉬는 마을, 농업과 환경, 생태에 관한 어린이 교육, 농업 기술의 보급. 홍동농협의 퇴비장을 만드느라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곳을 갔으나 가르쳐 주지 않는 바람에 허탕을 쳤던 그는, 오히려 일본에서 꼼꼼히 복사해준 자료를 들고 와 참조한 경험이 있다. 그뿐이랴, 오리농사 또한 그가 첫 시도한 바는 아니니, 일찌감치 오리농법을 알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이 새로운 농사법을 제 품에만 품고 있지 말고 진작에 주위에 널리 알렸더라면 그의 고생도 한결 멀어졌을 터이다.
이런 폐쇄적인 자세가 우리 농업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니, 이 교육관은 “나눔의 집”이 될 것이다. 지식을 나누고 농업 기술을 나누며 양식과 마음까지 나누니, 마을의 꽃은 일, 기쁜 일이 품앗이로 이루어지던 옛 전통을 되살리고 보존하며 살려나가고자 한다. 이 교육관을 짓기 위하여 이미 황토벽돌 사만장을 찍었고, 연목을 세 차나 사서 깎고 있다.
이제 바라기는 이 교육관을 중심으로 문산마을에 이른바 생태마을로 자리잡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제까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일들을 앞으로는 마을 전체의 틀 안에서 마을 사림들의 협의에 따라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내 땅”을 주장하며 버섯 재배를 위해 몇 십 년, 몇 백 년 된 참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림으로써 마을을 헐벗게 하는 행태들이 규제를 받을 터인즉, 마을의 생태 환경을 위한 계획의 하나로 집집이 들쑥날쑥 들어선 축사를 마을 외곽에 땅을 공동 구입하며 빼내고 공동 관리하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 계획을 좀더 전문적이고 계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에 용역을 주었다. 마을의 생태환경을 비해서 농업 기반, 도로, 관광문제까지 포함한 장기적인 계획이 내년까치 세워질 터이고, 큰 장애가 없다면, 문산마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존의 농촌마을이 자체적으로 재정비하여 생태마을로 자리잡는 경우가 될 것이다.
칠 년 사이에 문산마을은 크게 변했다. 물론 마을사람 모두가 “생태적 각성”을 이루었다 할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오로지 유기농으로 떼돈 벌겠다는 식의 경제적 동기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천적에 의해 순환되는 생태계 도감을 집집이 돌린 일은 있지만 “제대로 된” 생태 교육을 가진 바도 없건만, 많은 이들이 자연계의 순환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유기농업에 대한 자부심에 차 있으니, 그 스승은 학문이나 지식이 아니라 자연이다. “유기농업 자체가 자연을 보고 배우는 거라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 스스로 변해”간 결과인 것이다.
필리핀의 국제 농촌재건협회 창설자인 제임스 앤은 말하기를, 진정한 목적은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지 “농업과 지역 개발은 그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문산마을 사람들은 오리를 보면서, 온갖 천척들이 함께 뒹구는 맑은 논물 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워진 것이니, 자발적인 변화를 겪은 이들로 하여 주형로라는 지도자가 세운 마을 운동의 뼈대에 여물게 살이 오를 터이다.
농촌이 버려진 공간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이들 스스로 버려린 제 마을을 보듬고 추려 새롭게 일구고자 하고 있으니, 이해 관계와 개성이 각기 다른 구성원들을 함께 껴안고 나아가는 이들의 삶이 참으로 미덥다. 생태마을이란 전혀 새로운 마을이 아닌즉, 잃어버린 옛 두레 공동체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