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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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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재연 2001년 10월 236호
긁어서 부스럼을 키운 제 자신의 소행은 정당화시키고,거기에 반발한 상대만 비난한다.
여기에 원망과 미움의 기름을 부어 싸움이 벌어지고 그 싸움은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두 번 이기는 길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개의 싸움은 - 집단 사이의 다툼이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조차도 - 사실은 개인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사정을 법구경 첫 번째 게송은 “모든 것이 제 스스로 품었던 생각의 결과이니, 마음(mano) 위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수레바퀴가 소 발자국을 따르듯이, 나쁜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르는 법”이라는 것이다. 싸움은 곧 자신의 악의惡意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어서 생기는 고통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내면을 살피고 자신의 허물을 수긍하고 고쳐나가기보다는 우선 바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씌우고 떠넘기려든다. 상처받은 자존심과 멍든 권위를 부둥켜안고 외쳐댄다.

저게 나를 능멸했다, 나를 때렸다
저게 나를 이겨 먹었다, 내 것을 빼앗았다!

긁어서 부스럼을 키운 제 자신의 소행은 정당하고, 거기에 반발한 상대만 비난한다. 여기에 원망과 미움의 기름을 부어 끝내 ‘눈은 눈으로’ 식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 싸움은 끊이지 않는다.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가라앉지 않으며, 오직 이해와 자비로만 사그라든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천되지 않는 앎은 제대로 안 것이 아니다. 혹은, 그런 거야 약자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게 곧 요즘 우리가 보는 패권주의의 왕관을 쓴 초강대국 지도자들과 그들을 부추기는 언론의 행태일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폭력을 뿌리뽑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어느 순간에 갈갈이 찢기고 부서질 것만 같은 우리 인류의 현실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온 인류의 불행과 공멸을 막을 길은 무엇인가? 그런 길이 있기는 한가? 붓다께서는 상응부 아함에 인욕(khanti)이라고 이름 붙여진 경전[SN. 1. #4.]에서 전쟁을 치르는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극복할 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먼 옛적 천신과 아수라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천신들은 치열한 전쟁 끝에 아수라 왕 웨빠찌띠(Vepacitti)를 생포했다. 제석천帝釋天 앞으로 끌려온 아수라 왕은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신들의 왕 제석천은 패자의 욕설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제석천의 침묵을 보다 못한 그의 마부 마탈리(Mata-li)가 들고일어났다.
“오, 제석천이시여, 당신은 두려움에 떠는군요. 아니면, 저렇게 면전에서 험담을 퍼부어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입니까?” 제석천이 말했다.
“무서워서도 아니요, 더구나 나약해서도 아니다. 다만 지혜를 생각하는 자로서 마주 대거리하지 않을 뿐이다.” “제석천, 신들의 왕이시여, 바보들은 적절하게 막지 않으면 더 기승을 부리는 법입니다. 강단 있는 자는 그래서 엄하고 예리한 응징으로 바보들을 제압합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면 무서워서 참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달려드는 것입니다. 마치 달아나면 더 드세게 대드는 황소처럼!”
여기까지만 보면 요즘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사태의 결말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쪽에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번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빈 라덴을 인도할 경우 있을 법한 장면인 것이다. 제석천의 마부 마탈리의 주장은 단호한 응징을 요구하는 강경파 여론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테러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부모 형제, 친지들이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제석천은 이러한 주장에 동요되지 않고 대답한다.

“좋을 대로 생각케 하라. 그러나, 상대가 노기에 가득 차서 대들 때, 온전히 깨어 정념正念을 지키고, 평정심平靜心을 키우는 것, 오직 이 길만이 어리석은 자를 제압하는 바른 길이다.
수행에 인욕忍辱 이상 좋은 길은 없으니, 참아내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겨우 완력을 힘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는 자가 바로 약자가 아닌가? 중상과 욕설을 정념으로 받는 자는 곧 ‘두 번 이기는 것’이다.
자신과 남의 선善을 함께 추구하는 자는 남의 분노를 이해하고 정념을 지키며 평정을 키우느니, 이렇게 해서 자신과 남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다. 오직 이런 법法(진리)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만이 인욕하는 이를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이해와 인욕, 그리고 유연함을 ‘두 번 이기는 길’로 제시했다. 증오와 분노는 오직 상대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고, 부드럽게 싸안음으로써 풀릴 수 있다. 그러나 중생계는 어떠한가? 주먹에는 칼로, 칼은 총으로, 총은 폭탄으로 …… 싸움은 이렇게 줄어들기는커녕 되레 커지며, 개개인, 혹은 집단, 국가간 알력의 골은 더 깊고 멀어지는 것이다.
근래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련의 테러 사건과 거기에 대응하는 미국 정부의 태도는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마치 덫을 놓고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핵무기의 사용을 공언하고, 남의 나라 내란을 지원하고 요인을 암살하며 정부를 전복하는 따위의 소위 ‘추악한 전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우리는 저토록 어지럽게 돌아가는 먼 나라 일을 내 일로 삼아 자신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혹시 누군가가 나를 물고 대들 수밖에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힘없고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희생을 어떤 눈으로 보아왔는가? 베풀고 감싸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의 덕이다. ‘두 번 이기는 길’은 어렵고 어렵다. 그러나, ‘두 번 지는 길’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