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내 곁의 부처'의 의미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7년 12월 190호
‘내 곁의 부처’ 를 연재해 온 지 어언 삼 년이다. 언제부터인지 ‘내 곁의 부처’ 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사회가 어수선해서 그런지 곳곳에서 거행하는 법요식에서 ‘내 곁의 모든 사람이 부처인 줄 알고 부처 대하듯 하면 사회가 정화되고 반목과 질시가 사라질 것’이라고 외쳐댄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대, 이 사회에서 더구나 요즘과 같은 병리적 상황에서 이 말을 듣고 ‘그래 너가 바로 부처야’ 하며 감격해서 주변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생각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불교용어를 남용하지 않던 옛날에는 이 말이 무게가 있었고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말을 들으면, 불교의 좋은 교리를 또 공염불로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난다.
물론 이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내 주변 사람들 모두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나 선지식으로 생각한다면 언제나 고마움 속에 살기 때문에 원만한 사회를 이룩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빡빡한 시대에 이런 좋은 의미가 제대로 통용될 리가 없다. 불교교양대학이 늘어나고 불교방송이나 잡지, 신문 등이 많이 생기면서 불교교리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건성으로 이해할 뿐, 불교를 생활에 적용시켜 자신의 삶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사람은 드물다.
불교를 믿어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불교를 믿어 무엇하겠는가?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은 자각하는 데 있다. 자신에 대한 자각, 타인에 대한 자각, 사회에 대한 자각, 더 나아가 우주만물의 이치에 대한 자각에 있다. 이 자각은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만 조금 열면 충분히 가능하다. 팔만사천 법문을 줄줄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데, 자신의 이기적인 심보부터 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한들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기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날마다 애먹이는 자기 아들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화를 줄이기로 결심한 보살이 있었다. 문제는 그 결심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하는 것이었다. 며칠 뒤, 그 보살은 아들을 부처님으로 본다는 생각조차 잊고 예전처럼 화를 내었다. 내 주변의 사람을 부처로 생각하는 것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친 보살은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마음대로 고쳐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잘된다면 왜 실천 수행이 힘들다고 하였겠는가? 서둘러 될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젖어온 습관이 하루 아침에 고쳐질 리 없다. 언제나 고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시도해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모습이 변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중생은 자신의 근기(業) 만큼 세상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 눈에는 부처로 보이고, 개 눈에는 개밖에 안보인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그렇다, 내가 부처를 보려면 내 자신이 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부처나 보살은 결코 그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서른세가지의 모습으로 화현한다고 한다. 서른세가지의 모습이라, 서른세 가지의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부처에서부터 아래로는 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중생의 모습으로 화현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만일 관세음보살이 거지로 화현한다고 했을 때 거지를 보고 관세음보살이라 알아 볼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초지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원효대사도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수행이 안된 우리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행을 해야 한다. 화엄의 세계관에서 볼때, 내 주위의 사람이 부처로 보이게 되는 경지는, 화엄의 궁극적 세계인 사사무애법계의 경지에서이다. 시사무애법계는 모든 사물과 사람이 한데 용해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걸림이 없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 들어가면 주체인 인간도 객체인 사물도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미망의 세계가 아니다. 마음(心)도 만경萬境도 자유자재하면서 더구나 인간적인 고뇌나 망념을 모두 초월한 대비大悲의 세계이다.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수행지는 비로소 부처님의 광명과 부처님의 대비를 알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하늘에는 태양이 비치고 산에는 새가 울며 바다에는 파도가 치는 대자연 속에서, 주체인 인간이 얽매이지 않는 강한 삶의 의지로 언제나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 세계는 주체와 객체 모두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이 확연히 살아 있는 세계다. 이 세계에 이르면 사물 각자가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본연의 자세에서 저마다의 본분을 다한다. 태양은 모든 사물에 햇빛을 비추는 것이 자기의 본분이므로 처연히 햇빛을 비추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식물은 식물 나름대로 삶의 생명력을 가지고 싱싱하게 자라고, 바다의 파도는끊임없이 일렁이면서 그의 본분을 다한다. 이러한 속에 인간이 있다면 그는 물신물신 솟아오르는 걸림없는 삶의 의지로써 우주의 이치에 순응해 처연히 살아갈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산이 나를 보고 미소짓는 듯이 보이고, 모든 사물이 부처님의 생명력을 발산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한다.
선종의 임제 의현스님은 이러한 경지가 되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거취去就가 자유로운 ‘무위無位의 진인眞人’ 이 된다고 하였다.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참다운 자유인. 이것이 우리 본래의 모습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부처님인줄 알기 위해서는 이런 경지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수행이 뭔지 모르는 우리에게 내 곁에서 부처를 발견하기를 바라다니? 꿈도 야무진 소리다. 오직 바라건데, 내 주변의 사람들을 부처로 보지 않아도 좋다. 아니, 그것은 꿈에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내 곁의 부처를 생각하기 전에 제발 각자의 비뚤어진 심보나 바로 고쳐 상식대로만 행동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다운 눈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제대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