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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비, 그리고 자기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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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12월 214호
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헬라어 아가페agape를 ‘사랑’이라는 우리말로 번역한 것에 늘 감탄한다. 반면, 중국의 불자들이 산스크리스트어 마이트리-까루나maitri-karuna를 아이(愛)로 번역하지 않고 찌베이(慧悲)로 옮겼으며, 한국의 불자들 역시 이것을 사랑으로 번역하지 않고 중국어를 그대로 쫓아 자비로 부른 것에 늘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적확的確하기로 말하자면 불자들의 번역이 훨씬 더 낫다. 아가페나 마이트리-까루나를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히려 오역에 가깝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말마디의 사전적 의미는 ‘남녀가 정을 쏟아 서로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나 행동’인데, 아가페나 마아트리-까루나에는 이러한 남녀간의 성애性愛의 의미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남녀간의 성애, 곧 에로스eros의 의미만을 담고 있던 사랑이라는 우리말을 ‘희생적인 헌신’을 뜻하는 아가페의 번역어로 과감하게 선택했다. 그래서 남녀간의 애정을 뜻하던 우리말 사랑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 의해서 희생적 헌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곧,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적확한 단어가 아님을 분명히 알면서도, 인간의 정서에 가장 민감하고 절실한 단어를 선택해 그것을 자신들의 고유 언어로 만들어 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수 많은 말마디 가운데서 모든 말을 버리고 오로지 딱 한 단어밖에 가질 수 없다면 과연 어떤 단어를 고를 것인가? 기독교와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섣부른 편견일까?

사랑과 자기 버림
사랑은 기독교 신앙에서 알파요 오메가다. 기독교 2,OO0년 역사를 통해서 무수한 말이 난무했지만 그 모든 말들은 사랑이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된다 과연 이 한 때로 기독교 정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마디에 담긴 함의는 몹시 복잡할 만도 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랑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은 아주 간결하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 7:32)

이 유명한 표현을 두고 사랑의 황금률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는 아주 간단하다. 이 표현 그대로 ‘자신이 받고 싶은 그대로를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 이 사령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사랑은 두 곳을 향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 22:37)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태 22:39)

이는 그 유명한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이 두 구절에서 나타나는 중심 주제는 ‘자기 버림’이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계명은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 없다. ‘모든 것을 다하되 끝내 목숨까지 다하라’가 이를 웅변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자기 버림이 사랑의 실천이다.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야말로 자기 버림의 극치이다. 사랑은 세상인 이웃과 내가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 앞에 놓인 모든 네가 너로서 있는 한, 나는 나로서 있다. 나와 너로서의 모든 세상이 대립적으로 마주 서서 둘로 있는 한, 완전한 사랑
은 이룰 수 없다. 둘로 있는 한내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라는 이기심이 있는 한 무한경쟁의 대립과 반목은 종식되지 않는다. 둘이 아닌 하나는 내가 부정되어 사라짐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나와 네가 둘로 있고서야 어찌 너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으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 있어야만 너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은 자기 버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자기를 내세웠던 죄의 결과인 부자유(사망)와 불화를 극복할 수 없다. 나와 세상이 하나 됨으로써만 이를 극복한 자유(영생)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비와 자기버림
불교의 자비사상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문헌은 「유마경」이다. 문수(文殊, Manjusri)가 유마의 병 문안을 갔다. 유마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노병사를 모두 초월한 붓다 나 보살로 간주되는 분이었다. 그런 유마가 병을 앓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수는 유마가 병을 앓는 까닭을 물었다. 유마는 답한다.

“문수여, 나의 병은 무명과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오며, 모든 중생의 병이 다하지 않는 한 낫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중생의 병이 다할 때 나의 병도 낫습니다. … 문수여, 마치 대부호의 외아들이 아플 때 그의 양친이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아프듯이. 문수여, 그와 같이, 보살은 모든 중생을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자식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고, 중생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문수여, 그대는 보살의 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물었습니다. 보살의 병은 대자비에서 생깁니다.”

진정한 자지는 내가 포기됨으로써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깨달음 위에서 이루어진다. 너와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네가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이다. 중생이 아프니까 중생을 자기 몸처럼 여기는 보살이 아픈 것이다. 너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임을 알고 보살피는 것이 보살의 위대한 자비, 곧 대자비이다. 대자비가 실천되는 장場에서는 주는 자든 받는 자든 주어지는 행위나 대상이든, 저마다 자기가 모두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 존재하는 한 덩어리의 세계만 있을 뿐이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부자유〔생노병사〕와 불화를 극복할 수 없다. 나와 네가 하나됨으로써만 이를 극복하고 자유〔해탈〕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기 버림의 자유와 평화
사랑과 자비는 이렇게 자기 버림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읽힌다. ‘깨달음’과 ‘받음’이 불교와 기독교의 특징을 변별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 주는 말이라면, 두 종교의 유사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은 ‘자비’와 ‘사랑’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수많은 차이점은 궁극적으로 자비와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늘 자기를 지켜서 자유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붓다와 예수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자유를 얻으라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지키는 힘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붓다와 예수는 자기를 버리는 자비와 사랑만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죽음을 포함한 모든 부자유의 원천이다. 교단의 불화를, 국가간의 불화든 모든 불화는 이기심으로부터 태동하고, 종교간의 평화든 민족간의 평화든 모든 평화는 자기 버림, 즉 사랑과 자비로부터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이 자비와 사랑의 위대한 힘을 깨닫고 믿는다면 온 세상이 자유와 평화로 가득할 것이다. 아니, 불자와 기독교인들 만이라도 참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땐 온 세상이 자유와 평화로 넘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분들의 그러한 가르침을 들은 지 2,OO0년을 더 넘긴 오늘도 여전히,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위하는 죄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느냐고. 진정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나 평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