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의 종은 왜 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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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정찬주
1997년 12월 190호
법전스님.
스님을 뵌 지가 석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초여름 6월 14일에 스님이 계시는 퇴설당에서였습니다.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반개한 듯한 두눈과 소탈한 미소가 스님의 매력 같았습니다. 퇴설당 방에서 저는 삼배를 올렸고, 스님께서는 미안한 듯 저의 예에 미소를 살짝 띄며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인터뷰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지요. 스님께서는 슬슬 재미있게, 어떤 대목에서는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퇴설당에 들어가기 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지요. 시자 스님은 제가 혹시 실수를 할까봐 이런 주의를 주었거든요.
“방장 스님께서는 이야가를 길게 하지 않고 늘 단답형으로 밀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쓸데없이 길게 캐묻거나 이야기를 끌어 스님께 부담을 주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님의 얘기는 물 흐르듯 하였고, 기억도 아주 분명하여 더듬거리는 부분도 없었습니다.
퇴설당을 나온 시자스님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방장 스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오늘 가장 재미있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정선생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스님께서도 감개가 무량하셨는지 ‘오늘 내가 한말을 반살림 때 대중에게 이야기해야겠다’ 하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스님. 그런데 저는 막상 스님의 얘기를 듣는 동안 소설의 대상이 되는 성철스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웬지 스님의 얘기에 더 흥미를 느끼고 말았습니다. 성철스님과 스님의 인연이란 어쩌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스님의 수행담은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 스님들에게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전설 같은 수행담이 있구나.’
스님께서는 토굴살이 수행담을 담담하게 들려주셨는데, 그 때 저는 한동안이나마 스님과 마주하고 있다는게 아주 감격스러웠답니다.
스님. 오늘 다시 기억을 더듬어 스님께 들었던 얘기를 옮겨보겠습니다.
“노장님이 계시는 성전암에서 묘적암으로 갔지요. 노장님이 한산시를 읽어 보라고 해서 읽어 봐도 마음에 와닿지 않고, 더구나 노장님 법문도 다 내 얘기가 아닌 것 같고… 어딘가 체한 것처럼 통쾌치 않아요. 어딘가 늘 찝찝하고 석연치 않더란 말이오”
그래서 스님께서는 마침 비어 있는 묘적암으로 갔는데, 윤필암에 계시는 비구니 스님들에게 약속을 했다구요.
“혼자 있는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종을 칠 것이오 그러면 올라오시오”
화두는 조주 무無자.
누에고치처럼 암자에 있는 것들을 다 먹은 뒤에는 자결하겠다는 각오로 문을 닫아 걸고 화두를 들었다는 스님의 얘기에 저는 문득 숙연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먹는 것은 시늉만 낼 뿐이었다구요. 한번에 쌀을 닷되씩 앉혀 밥을 많이 해서 양지기에 퍼 놓고 보자기를 덮은 뒤 윗목에 놓아두었고, 반찬은 딱 한 가지 단지 안에 든 김치였다구요. 목이 칼칼하면 돌샘으로 나가 찬물을 한모금 축이는게 전부였고.
밀씀 도중에 스님께서는 쓸쓸하게 웃기도 하셨습니다.
“요즘 스님들 토굴을 가보면 복잡해. 냉장고에 깨소금, 참기름 등등 부족한 것이 없어요. 그래가지고는 토굴 살이가 안돼.”
스님.
성전임을 가기 얼마 전이었다구요. 이 때는 스님이 허기가 져 식광識狂이 들어 한순간에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는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무자 화두와 혈투를 벌이는 스님의 각오로 보아 그렇게 짐작이 됩니다. 스님의 외모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과 진배없었을 것입니다. 조주 무자를 들고 암자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세수와 양치질은 물론 방청소도 공부에 장애가 될까 봐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니 밀입니다.
바로 그런 때 윤필암 비구니 스님들이 암자문을 따고 들어왔다구요. 스님이 버럭 “종을 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올라왔느냐” 하고 소리치자 비구니 스님들이 “종소리가 나서 올라왔다”고 대답했다구요. 한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들었다니 스님으로서도 달리 할말이 없었겠지요.
더구나 비구니 스님들은 스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순두부를 닷되들이 차관에 가득 담아 왔다고 합니다. 먼저 순두부를 한사발 먹고 기운을 내신 다음, 스님께서는 다시 깊은 정진에 드셨던 것 같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순두부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바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느닷없이 차관이 보입디다. 그러나 몇 날이 지나가버렸는지 새카맣게 곰팡이가 끼어 있었어요.”
윤필암 비구니 스님들어 갖다 준 순두부조차 잊어버렸을 정도셨는데, 무자 화두가 깨뜨려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암자문을 닫아건지 석 달이 채 못된 어느날, 마음에 변화가 와서 성철스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구요.
마침 팔공산에는 눈이 내려 산길은 몹시 미끄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스님께서는 석 달동안 죽기 살기로 한 정진 끝이라 힘이 다 소진돼 한발한발 내딛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허기가 져 솔잎을 따서 씹고 흰 눈을 한줌씩 먹고 갔지요. 눈하고 솔잎을 하도 먹었더니 뒤에는 마취주사를 맞은 것 마냥 입이 얼어붙어 얼얼했어요”
밤 12시쯤 도착한 스님은 성전암의 철조망을 뛰어넘어 마당에 서서 팔공산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할을 했다구요.
그러자 성철스님이 뛰어나왔고, 당신은 그제야 방으로 들어가 드러누워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철스님께서는 공부가 안 된다고 수좌들이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너 정말 공부해 봤냐. 이 곰새끼야” 하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철스님께서는 스님을 보시고는 웬 떡장수처럼 행자를 부르더니 “떡 헐까” 하고 스님의 토굴살이 정진에 만족해 하셨다구요. 그러나 스님은 “떡은 무슨 떡을 합니까. 잘 먹지도 않는 떡을” 하고 거절하셨다는데. 이 부분도 두 분의 곰살가운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져 그저 미소가 지어집니다.
법전스님.
토굴이 꼭 윤필암, 묘적암이 있는 사불산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깊은 청산이 있고, 또 거기에 토굴을 한 채 지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토굴에서 스님처럼 자결할 각오로 작가는 작가로서의 화두를, 장사는 장사치로서의 화두를 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화두를 하나씩 들고 정진한다면 무엇인들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스님의 토굴살이 이야기가 웬지 자주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스님. 안녕히계십시요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