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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마음 밝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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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성범 2001년 10월 236호
몇 해 전,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강의에 가기 위해 모 고등학교 앞 버스 주차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앞은 수험생과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몹시 북적거렸습니다.
통근 버스는 30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제사 수학 능력 시험 날은 출근 시간이 전국적으로 한 시간 뒤로 늦춰진다는 전날 밤 아홉시 뉴스가 생각났습니다. 덕분에 수학 능력 시험날 교문 앞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지요.
수험생들은 모두 시험장으로 들어가고, 육중한 교문은 둔탁한 금속음을 내면서 닫혔습니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떴습니다. 다만 수험생의 부모로 보이는 몇몇 분들만이 철문 넘어 아득히 안쪽에 자리잡은 교실을 바라보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남루한 차림을 한 어떤 아주머니께서 교문 앞에 꿇어앉아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까칠한 11월의 바람에 연신 누런 먼지가 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꿇어앉아 기도를 드릴 요량이었던가 봅니다.
한 시간쯤 기다린 후에야 통근 버스가 왔습니다.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아주머니 모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것일까?문득 한국병 가운데 ‘제 자식 제일주의’라는 병도 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제 자식 공부만 잘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일류’ 대학에만 들어갈 수만 있다면 수단이나 방법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식 제일주의’를 불순하게 볼 필요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제 자식 제일주의’는 우리 사회의 높은 교육열을 보여 주는 긍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열 때문에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개운치 못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땅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온 많은 어머니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자식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보상받고 싶어하는, 그리고 자식만은 자신처럼 고통스럽고 기구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많은 어머니들이 있을 테니까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는 그릇이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저는 개인에 따른 능력의 차이로 말미암아 사회적 불평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싫어합니다. 그릇이라는 말을 꺼낸 것은 ‘불평등이 필연적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잘 다듬어 주는 것이 교육의 본래적인 목적이 아닐까 해서 꺼내 본 말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는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은 곧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기에 모두들 ‘공부’ 잘하는 일에 그렇게도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에 집착하는 현상을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기가 십상이니까요. 친척이나 주위의 아는 사람 가운데 이른바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셈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아이에 따라 가지고 있는 그릇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오직 공부만 잘할 것을 강요하다 보니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이미 수험생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지요. 특히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의 거의 대부분은 교실에서 교과서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기회는 유보 당하게 됩니다. 결국 교실은 ‘붕어빵 굽는 틀’이 되고, 거기에 몸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삐뚜름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교육 제도가 마련되더라도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학연이나 혈연, 지연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있었다면 이제는 단호히 도려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보상도 일의 종류에 따라 주기보다는 노력에 따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능력과 소질을 개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외우기를 잘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됨으로써 다양성이 한 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지식만 많이 축적한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배움의 목적이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위험할 것입니다. 거기에다 거짓을 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까지 갖춘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물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아한 품성을 기르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지식이 오히려 세상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본바탕은 맑은 거울입니다. 가끔은 거기에 못된 때가 끼어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도 하겠지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고, 자연이 몸살을 앓는 것도 아마 마음의 거울이 흐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탐내고, 성내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묻은 때 때문이겠지요. 그 때만 닦는다면 온 누리가 있는 그대로의 밝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오후, 잠시 틈을 내어 산길을 걸었습니다. 나무, 흙, 돌, 바람, 물, 그것을 느끼며 걷는 자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도 아프고 발가락을 깨물어도 아픕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재의 본래 모습을 관조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면,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본래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면 정녕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