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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의 인로왕보살이 된 첫 새벽예불 -지안 / 통도사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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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1년 09월 235호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통도사 선방, 강원 스님들과 노스님 등 백여 명의 수행자가 토해내는 예불은 장엄했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천상의 음성으로 내 영혼을 흔들고 지나갔다.
‘유원 무진 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어느 음악이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어떤 소리가 그보다 더 영혼을 맑힐 수 있겠는가.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데 아름다운 예불의 환희로움 속에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노을이 아름답되 어떤 슬픔을 품고 있듯, 그 장엄한 합창의 감동 끝에 밀려왔던 것은 또 덧없음의 슬픔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간의 나는 무엇이었던가’ 하는 물음 속에 솟구쳤던 눈물. 태어나서 처음 해본 그 겨울 첫 새벽예불은 그렇게 황홀했고, 나는 그 황홀함 속에서 마음을 굳혔다. ‘내가 갈 길은 이것이다’, 그렇게. 스물 셋일 때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맑은 별빛 속의 새벽예불에 서 있노라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법희法喜를 느끼곤 한다.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서른 몇 해 전 그 겨울 새벽예불은 내 출가의 길에 인로왕보살이 되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열어 주었다.

예불을 드린 다음날, 속가에서 가지고 온 책을 모두 태워 버리고서 어느 행자에게 머리를 밀고 원주스님께 법복을 얻어 입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원주 스님께서 행자 아홉 명에게 ‘천수경’을 외우라고 나눠주었다. 천수경을 행자들 중 가장 먼저 외웠는데, 그 때 ‘불연이 깊구나’ 하는 생각을 비로소 했다.
추운 겨울 새벽 개울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한 다음 법당으로 들어가 예불을 올렸던 행자시절이었다. 그 당시 통도사 극락암엔 경봉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셨고 큰절 뒷방엔 월하 스님, 그리고 나중에 내 은사가 되신 벽안 스님 등 노스님들이 많이 계셨다. 굉장히 순수하고 거룩해보였던 그 분들을 대할 때면 부처님처럼 존경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좋은 분위기에서 출가의 마음을 북돋워 정진할 수 있었으니 시절인연이 참으로 좋을 때 출가하는 복을 누린 셈이다. 몇 해 전 조계사사태 때, 한 후학이 울면서 전화를 할 때는 정말 그들을 바로 볼 면목이 없었다. 예전에 내가 스승이나 선배 스님들에게 느꼈던 존경스러움을 후학들에게 오늘날 ‘나는 보이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 뼈아픈 자책의 시간을 가졌었다.
물자가 넉넉치 않았기에 암자의 감나무로 가서 장대 들고 홍시가 다 된 감을 따먹거나 채마밭에서 무를 뽑아 먹는 낭만도 있었고, 떨어진 양말을 기워 신는 조촐함도 함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전에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 스님께선 코 푼 휴지를 볕에 말려 두었다가 뒷간에 가실 때 한 번 더 쓰시곤 했으니, 후학들에겐 대중 스님들 언행 그대로가 공부였던 분위기였다.
그 시절엔 정말 대중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강원에서 공부하던 학인 스님들이 경 공부를 끝내고 저녁이면 선방 스님들과 합류해 밤새 용맹정진하는 게 예사였고, 단식을 해가며 공부에 몰두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초저녁에 들어갔다가 밤새 정근기도하고 나오는 선배스님들의 맑은 눈빛에서 신심을 키웠던 것이다.
강원에선 매달 시험을 치고 성적을 발표했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학인들에게 노스님들은 ‘그렇게 공부하려면 밥값 내놔라’ 하시며 경책하시곤 했다. 행자시절을 마치고 경반에서 공부할 때 코피 흘려가며 열심히 불법을 익혔던 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경經 보는 것을 수행으로 삼아 한 길을 걸어온 것도 그 시절 분위기를 보고 익힌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노스님들의 애정어린 경책이 있었고 대중스님들의 신심이 깊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어디를 가나 대중처소에 붙어 있던 다섯 가지 규칙은 이러했다. 첫째, 하심下心하라, 즉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라. 둘째, 서로 공경하라. 셋째, 자비, 즉 상대방을 자비롭게 대하고 자기가 한 일이 자비정신에 맞는가를 돌아보라. 넷째, 차례를 지켜라. 다섯째, 남의 일을 말하지 말라, 즉 험담하지 말라.
이러한 경책 속에서 행자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자신을 낮추지 못해 통도사를 떠날 뻔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국을 끓이는 갱두 소임을 맡고 있던 때였다. 백여 명이나 되는 대중의 콩나물국을 끓이려면 큰 그릇 하나 가득 콩나물을 씻어야 했다. 지금처럼 무슨 고무장갑이 있던 것도 아니고 한겨울 찬물에 콩나물을 씻으려면 손이 시려 끓어질듯했는데, 한 번 그렇게 씻고 나니, 다음날엔 ‘물을 데워 더운 물에 씻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한 생각 일어나니 이렇게 수월한데, 사람 사는 것도 지혜로우면 이렇듯 수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이 어린 한 스님이 내가 데워 놓은 물을 써버리고 ‘물길어 와라’ 하며 일방적으로 시키는 게 아닌가. 스무 살이 넘어 있었던 나는 열예닐곱 살의 사미 스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전에도 그런 일 때문에 그 스님께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해서 ‘왜 내 물을 쓰냐’며 그의 어깻죽지를 한 차례 치고 말았다. 날카롭고 급한 성격이 순식간에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행자에게 맞고 가만 있을 스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 스님은 곧바로 강원으로 뛰어가 ‘갱두 행자가 때렸다’고 했다. 그러자 감로당 학인 스님들이 쫓아나오며, 도망치는 내게 소리쳤다. ‘저 놈 잡아라.’ 겁이 나기도 하고 잡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엉겁결에 도망을 쳐 무풍교까지 달아났다. 그 곳에 이르자 택시 하나가 서더니 원주스님이 내리는 게 아닌가. 저간의 얘기를 듣곤 택시를 잡아 타고 따라 나온 것이었다. 뛰어 달아나는 내게 원주 스님이 소리쳤다. ‘한행자(스님의 속성이 한씨이다) 멈춰라.’ 멈춰선 내게 스님께선, ‘다른 절로 가려고 한다면 나와 함께 돌아가자’고 달랬다. 나를 생각해 주는 스님이 고마워서 따라들어왔다. 대중공사 결과는 ‘참회.’ 법당으로 올라가 한 시간쯤 절을 하면서 참회하고 난 후 학인들이 머무는 감로당으로 가서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108배씩 절을 했다. 그리고 뒷방스님 일고여덟 분들에게도 참회의 절을 올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 때 그 나이 어린 사미스님은 나중에 나를 형처럼 잘 따르는 도반이 되었고, 원주 스님은 같은 은사스님을 모시는 사형이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심하지 못하던 성격이 !
바뀌었다. 설사 누군가 욕되게 하더라도 참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행자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 한토막이다.

행자시절을 끝내고 계를 받기 하루 전, 내 은사 스님이 되신 벽안스님은 지안志安이라는 이름을 내리셨다. ‘뜻을 세워 편안히 수도에 전념하라’는 뜻. 사미계를 받은 다음 가사장삼을 입고 은사 스님께 인사를 올렸더니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금생 한 생은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중노릇 잘해라’평생을 두고두고 음미하게 했던 ‘자신을 버리라’는 스승의 강한 메시지였다. 자기를 버릴 줄 아는 것이 곧 자기를 살리는 것. 헛된 데 집착하면 자신이 막혀 버린다. 행자시절을 마감하며 스승이 내린 말씀에서 터득한 값진 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