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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를 심다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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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蘭雪軒 - 김선우 2001년 09월 235호
타르코프스키, 구도의 시학詩學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를 좋아합니다. 그의 영상은 긴밀히 짜여 있으면서도 여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스토리가 아닌 장면마다 한 편의 회화를 만나듯이 곱씹어 아로새겨진 롱테이크의 쇼트들은 관객에게 ‘창조적인 참여’의 여지를 남깁니다. 길고 느리게 클로즈업되는 인물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영상 속의 상징들을 되새김하며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요. 최초의 충격에서 여진까지, 한 상처받은 영혼의 미세한 떨림이 종내는 내 속에 하나의 소로小路를 놓습니다.
그 길은 명상으로 이끄는 길이며 나는 그 길을 따라가다 한 그루 죽은 나무를 만납니다. 나는 그 죽은 나무의 껍질에 손을 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요. 그것은 마치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평생 가난한 유생이며 농부였던 조부의 마지막 얼굴을 대하며 느꼈던 충동과 비슷합니다.
강포 수의에 싸여 긴 침묵의 시간 여행을 시작한 한 인간의 적막하고 주름진 얼굴에 나는 두 손을 대보고 싶었습니다. 그 주름살의 굴곡, 시간의 마술이 빚어낸 그 ‘늙음’ 위에 내 손을 포개면 ‘생’의 다른 이름인 ‘죽음’이 이미 꿈꾸기 시작한 또다른 ‘생’의 미세한 떨림이 만져질 것만 같았습니다. 고가의 서까래나 오래 된 돌탑에 피어나던 푸른 녹청처럼, 이미 죽어 있는 것들 속에 깃들인 두근거리는 ‘생’의 느낌 말이지요. 나는 천천히 스크린을 향해, 죽은 나무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껍질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러면 만져지지요. 봉인된 시간의 여울이 만들어내는 내밀한 무늬들의 움직임. 내 속의 오래 된 내가, 당신이, 불현듯 나를 돌아보지요….
이 ‘불현듯’, 이 ‘문득’ 만져지는 지극한 세계. 이 세계로 나를 이끄는 힘은 세련된 영화기법과 사건 전개의 흥미진진함에만 의존하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무엇입니다. 오히려 의식적인 과장을 불러 일으키는 모든 수단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이르게 된 어떤 완전함의 세계이지요. 무언가 별나고 의미심장한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는 필연적으로 과장을 동반하고 요란스러워집니다. 이 ‘요란스러움’을 ‘무언가 말했다’로 착각할 때 영화는 천박해지고 ‘문득’의 세계는 소멸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예술장르의 공통된 속성이 아닐까 싶어요.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은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매번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질감의, 다른 차원의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것은 의식적인 과장과 흥미를 철저히 포기한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상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방적이지 않은, 다차원을 스스로 확보한 영상.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데 논리적으로 분명한 이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말 ― 민감하게 깨어 있는 영혼이 필요할 뿐이지요. 진정한 예술작품은 거의 항상 양면성과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 삶 자체처럼 다多차원적이다, 라는 말은 분명 옳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창작의 의도로 획득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난해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그의 영화가 오히려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관객들이 느끼는 이 난해함은 어쩌면 하나의 영상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복잡미묘한 자신의 내면 풍경 때문이 아닐까요. 시간 속의 시간, 흘러갈 시간들이 이미 흘러온 시간의 저 편에서 문득 고개를 들 때, 알고 있으나 알지 못하는 그 얼굴을 대하며 느끼는 당혹스러움 같은 것 말이지요.
‘내면의 풍경…’ 이라고 써놓고 나는 잠시 쉬었습니다. 당신이 보내준 쑥차를 달였지요. 봄 들판 어느 양지바른 곳을 거닐다 당신이 문득 따 말렸을 어린 쑥잎들이 아슴거리는 향기를 피워올립니다. 찻잔을 들여다보니 세상에, 쑥잎 하나하나가 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부풀어 있습니다. 봄볕이라든지, 해토머리 무렵의 싸아한 이슬이라든지, 잠시 스친 미풍 같은 것. 이 어린 식물들이 간직한 시간의 기억은 순결합니다. 불변하는 현재성. 나는 찻잔에 코끝을 대고 시간의 회귀 가능성에 대해 잠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우리 영혼 속에 양각시킨 바로 오늘의 기억, 흘러간 많은 시간 속에서 살아남아 목이 좁은 유리병 속에 흘러든 그 정각正覺한 시간의 새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뒤쫓는 슬픈 존재인 인간은, 나는, 말이지요.


폐허의 지상에 하나의 <비밀 구역>이 생겨나고 <구역> 어딘가 인간의 소망을 실현시켜 준다는 <방>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찾아갔지만 돌아오지 못한 이 곳을 당국은 <금지 구역>으로 선포하고 비상 경계를 폅니다. 이 <방>의 안내를 자처한 잠입자,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이 곳으로 안내해 소망을 이루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잠입자와 한 작가와 학자가 <금지 구역>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많은 어려움 끝에 그 <방>에 도착한 작가와 학자는 그러나 <방>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누가 어떤 소망을 말하든, 말의 문제가 아닌, 그의 내면 깊숙한 가장 강력한 욕망을 성취시킨다는 <방>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소망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게 된 이들은 돌연 자신의 내적, 도덕적 상태가 비극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 이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의 이야기입니다. 인간 내면의 풍경을 탐구하는 절망적이고 아름다운 로드 무비. 누구나 열망하지만 함부로 그 문을 열 수 없는 방, 누구나 한 번쯤 서성거려 보았을 그 방문 앞에서 인간의 비극적 실존 양태가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우리는 누구나 그 <방>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 길의 아이들입니다. <구역>을 안내하면서 잠입자는 디코브라스의 얘기를 들려 주지요. 이 동경해 마지않는 방으로 오면서 디코브라스는 자기 때문에 죽은 형을 소생시켰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지요. 그러나 그가 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을 뿐, <방>은 그가 실제로 원했던 가장 비밀스러운 소원을 성취시켰던 것이었지요. 성취하고자 의식했던 것과 성취된 것 사이의 괴리. 이 불완전함, 이 불균형을 깨달은 디코브라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지요.
그 <방> 앞에서 나는 괴로웠습니다. <방>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가는 무수한 ‘나들’. 그’나들’의 옷깃을 부여잡습니다. 가여워라, 이내 놓아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