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하나의 돌기둥이여,
하늘을 받치고 땅을 받치나니
그대 야 문으로 들어오고자 하는가.
모든 망상을 놓아야 하리.’
아하, 일주문을 대신한 돌 하나로 승과 속의 경계를 삼으셨구나 싶어 마음 자세부터 가다듬게 된다. 고즈넉한 자리에 산 아래가 연꽃처럼 펼쳐져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토굴은 도심 같으면 버리고도 남았을 헌 목재로 구석구석을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았다.
이미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탓에 원인스님은 청주의 어느 절로 법문하러 떠나고 안 계셨다.
늦으면, 기다리지 않는다는 스님의 단호함을 보는 느낌이었다. 스님 없는 토굴 문앞에 빛 바랜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모든 방문객이여,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일이 큰데 어찌 한가로이 지낼 수 있으랴, 부질없는 세상일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있겠는가. 산 송의 뜻이 이러하니 우리 함께 신심으로 고요히 정진하지 않겠는가.’
방문을 열자, 빈 방 안엔 또 스님 이 직접 써 붙인 두 장의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 도량은 항상 묵언 정진하는 곳이므로 누구나 묵언을 원칙으로 한다. 사중의 물품은 용도에 맞게 하고 항상 제자리에 두며 … 이 도량에선 누구나 오후 불식해야 한다. 철야 정진중에는 일주석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며 정진 시간을 엄수한다.’
‘정진 시간표
결제일-불기 25401년 병자년 음력 12월 10일, 해제일-불기 2543년 을묘년 음력 9월 6일 3시 : 도량석, 예불, 천수경 입선/5시 : 방선/6시 : 아침공양/7시 : 입선/10시 : 방선, 사시 마지, 오공/12시 : 휴식/1시 : 운력 (화목, 군불, 청소)/3시 : 입선/5시 방선/7시 : 입선/10시 : 방선 취침’
벽지에 붙어 있던 풀이 말라 덜렁거릴 만큼 삼 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원인 스님의 천일 동안의 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묵언정진에 오후 불식, 그리고 하루 열 시간씩 계속되는 정진에 운력까지, 얼마나 단단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생활했던 것일까.
먼 길 찾아온 우리에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며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신 원인스님을 다시 뵌 것은 그 다음 주였다.
부처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
신심 깊은 불교 가정이라 스님의 어린 시절, 많은 큰스님들이 집에 둘러 하룻밤을 묵고 가곤 하셨다. ‘커서 뭐가 되고싶냐’는 스님들의 질문에 어린 소년은 ‘저는 커서 부처님이 되겠습니다’하고 답했고, 그 답에 스님들은 넉넉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꼭 그렇게 되라’고 격려하곤 했었다.
속가의 부친은 지금 해인총림의 방장이신 법전스님께서 태백산의 토굴에서 정진중이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이후 부친을 따라 해인사를 찾아갔던 것이 1969년의 일이다. 그때 뵈었던 법전스님이 초등학생인 그에게 ‘나는 출가하는 게 좋겠다’라고 했고 그 말은 어린 가슴에 꽂혀 버렸다. 그 시절부터 소년은 해인사로 출가하기 위해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6학년까지 마치고 오라’는 것이었다. 학수고대 끝에 졸업과 함께 소년은 해인사를 찾아간다. 부친께서 일주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가족의 후원 속에 떠난 출가의 길이었다.
물어물어 법전스님 계신 곳을 찾아간 곳이 퇴설당이었다 그 곳에는 성철 큰스님과 지월 큰스님, 그리고 법전스님이 계셨다. 나이 어린 소년이 찾아가니까 곁에 계시던 성철스님이 ‘고녀석 똘똘하게 생겼네, 공부 좀 하겠는데…’ 끊임없이 놀려대셨다.
내성적인 성격이던 소년의 어린 가슴은 오직 스님에 대한 부푼 존경심으로 찾아간 자리에서 놀림감이 되자 어찌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리고 큰스님이 농담을 한다는 것조차 몹시도 화가 났다. 속을 끓이고 앉아 있을 때 법전스님께서 손을 이끌고 자리를 나오셨다. 퇴설당에서 장경각으로 가는 뒷길을 법전스님께선 어린 손을 잡고선 수 차례 왔다갔다하시면서 ‘얼마 동안 생활하다 보면 곧 비구가 될 것이다, 큰스님이 돼야 한다, 중노릇이란,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자상한 가르침을 들려 주셨다.
은사 스님의 ‘출가하는 게 좋겠다’는 한마디에 고무돼 열네 살에 단행한 출가의 길. 사미계를 받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승복을 입던 날, 날아가는 듯 싶었다. ‘원인’이란 법명은 애지중지해 주시던 성철 큰스님께서 지어 주선 이름이다.
보살계를 받자 마자 은사 스님이 짐을 꾸리라고 했다. 기차를 타고 차를 몇 번 갈아타고 서너 시간 걸어 올라간 곳이 수도암. 그 곳에서 은사 스님의 시봉을 들면서 공부를 했고, 비구계를 받자마자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이십이 년 만에 수도암의 젊은 주지를 맡기 전까지 긴 세월 선방 생활을 했다. 해인사를 떠나 통도사 경봉스님 계신 극락암에서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고, 덕유산 토굴생활도 했다. 전국 선원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다니며 진리를 찾아 정진을 거듭했다.
“강원 공부활 때부터 가슴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어요. 무명이 왜 생겼을까, 본래 부처인데 왜 원죄처럼 무명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진리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강원에서도 애늙은이라고 불릴 만큼 혼자 생각하고 앓곤 했어요.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없더라구요. 결국 신경성 위장염에 걸리고 노이로제 초기 증상까지 왔어요. 성격 탓이죠. 서른살 무렵에 덕유산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읽는데, 거기에 꽁꽁 앓던 의문의 대답이 들어 있더라구요. ‘무명의 실 성품이 그냥 참 불성이요, 환화의 빈 몸뚱이 그대로 법신일세無明寶性 郞佛性 幻化空身郞法身’ 머리가 맑아지는 게 십 년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어요. 그 자리에서 증도가를 놓고 삼배를 올렸지요.”
참수행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삼년결사
수도암 주지 소임을 여섯 해 가까이 보았다. 검소하게 사는 게 승가의 역할이 라고 여겨 기름 때는 것조차 죄 짓는 것 같아 한겨울에도 저녁 여덟시쯤 한 시간만 보일러를 돌렸다. 냉방에서 자다 보니 감기는 달고 살았지만, 아침에 죽 한 그릇 먹고 화두 들고 앉으면 이내 감기조차 사그러 들었다.
“요즘 선방을 보면 절절 끓는 방에서 반팔 차림으로 수행하더군요. 그건 공부하는 모습 같아 보이지 않아요. 수도암에서 선원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수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과거에 저렇게 편안하게 살았던 건 아닌가를 고민했지요. 저들이 내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정체된 삶을 살면 안 된다. 철저히 개혁하자.”
원인스님의 수도암 주지 시절, 더 열심히 포교에 임했다. 전국 수도회 회원들을 모아서 특별 정진을 했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 신도들이 나설 수 있는 길을 텄다. 그러나 마음은 늘 세속을 떠나 출가할 때의 그 굳은 신심과 도를 이루겠다는 의지는 어디 갔을까, 도리어 업만 짓는 것은 아닐까를 고민해야 했다.
삼년 결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년 결사를 목표로 1983년에 도성암에서 결사에 들었다. 그러나 두 해 만에 끝내야 했다. 한번 시작하면 철저하게 고행 위주로 정진을 하는 성격이라 사십구 일 동안 장좌불와를 하고 하루 한끼 반찬 없이 물 한 그릇으로 버티다 보니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1985년에 다시 수도암에서 도반과 함께 삼년 결사를 시작했지만 결국 여섯 달 만에 접어야 했다. 마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주지를 하면서 언제라도 정진을 다시 시작하면 더 ‘독하게’ ‘추진력 있게’ 해보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법전 큰스님의 강력한 만류가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주지 자리를 던지고 산골짝 도성암에 들어와 삼년 결사를 한 것도 ‘묵은 주지 때까지 말끔히 털어버리자’는 각오 때문이었다. 어차피 시작하는 삼년 결사라면 어줍잖게 할 수 없다면서 토굴 곁에 작은 법당하나 세워 놓고 그 안에서 살았다. 참으로 마장이 극심했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한두 번쯤 좌절이 없다면 인생이 아닐 것이다. 그 기로의 위험한 일도 있었고 이를 슬기롭게 넘기는 사이 삼 년이 흘러버렸고 이제 천일 결사의 그 모든 공덕을 원인스님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주위 분들의 지극한 바람과 외호자들의 희생적인 보살핌 덕이요, 불보살님들의 가호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족함이 많아 마장도 컸고 그것이 수행에 바탕이 됐다는 걸 스님은 잊은 날이 없다. 삼년 묵언 끝에 회향날 구름처럼 모인 신도들에게 회향법문을 하던 순간에 목이 잠겨 한동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천일 결사를 마친 스님께 축하하러 수백 명의 신도들이 작은 도량에 운집했다. 삼년 결사 회향식. 이 자리에서 스님이 읊은 게송이 있다.
‘진흙소가 바다에 뛰어들어 모래알을 헤아리고 석녀가 선정에 올라 달을 회롱하네 누가 만일 나에게 진면목을 묻는다면 깊은 골 흐르는 물 대해에 들어간다 하리’
존경받는 승가로 거듭나는 것이 원력
천일 동안 원인스님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스물한살 때부터 오후불식을 했던 터라 그런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나이 들고 상좌들도 있고, 신도들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나는 개인이 아니잖아요. 법랍 30년이 넘었는데 책임을 져야죠. 공부를 이뤄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습니다.”
지난해 종단사태가 터져 버렸다. 외부와 모든 것을 단절하고 사는 스님께 공양주 보살이 산문 밖에서 벌어진 종단사태를 조심스레 들려줬다. 이게 불교의 모습이 아닌데 싶어, 견딜 수 없었던 스님은 창피하고 원통한 심정으로 글을 썼다. ‘사자 존자의 구법정선을 배우자’는 신념에 찬 직선적이고도 날카로운 문구의 글이 불교계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해제 직후 또 다시 종단의 혼란 소식을 들었다.
“이 혼란은 강력한 선지식이 안계셔서 빚어지는 일입니다. 그 어떤 불사보다 시급한 게 진정한 공부를 하려는 스님들의 모습입니다. 이젠 스님이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돼선 안 됩니다.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하지요.”
토굴에서 천일 동안 정진한 스님이 해제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목욕탕 가서 때 한번 시원하게 벗겨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원인스님이 해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5대 보궁을 찾아 기도를 올린 것이었다. 노이로제 앓던 시절에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간절한 기도 끝에 건강을 회복했던 터라, 이번 해제와 함께 스님은 보름을 보궁을 찾아 회향을 알리는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또 다른 발원을 하는 일이 더 시급하계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야 은사 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그토록 원하던 목욕도 했다.
시간을 쪼개서 법문 듣길 원하는 이웃 곁으로 달려가 부처님 말씀 전하느라 며칠 동안 코피를 쏟기도 했다. 정선, 현풍 지역의 초라한 불교학생회원들을 위한 자리만큼은 여한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다. 미래의 주역, 그들의 가슴에 불법을 심는 일 만큼은 정녕 아깝지 않은 시간인 탓이다.
삼세 번이라고, 세 번 만에 천일 정진을 마친 스님은 앞으로 어떤 완력을 갖고 있을까?
“회향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죠. 제가 법답지 못한 점이 많다는 걸 느낍니다. 다시 백일 정진부터 시작할 겁니다.”
종단이 아무리 번다할지라도 늘 언제 어디서나 인적 드문 토굴에서 문밖출입조차 삼가며 투철하게 수행정진하는 스님들이 이렇듯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