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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현지조사 -북한산성 원증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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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09월 235호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북한리 북한산성(사적 제162호) 내의 북한산 중턱에 태고사太古寺가 있다. 태고사 중심 경내에는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보물 제 611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 경내에서 벗어난 뒷산 중턱에 원증국사탑이 건립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도괴되었던 것을 근년에 복원하였다. 필자는 복원하기 전 1960년대에 현지를 조사하였는데 각 부재가 완전함을 알 수 있었다. 이 때 현지에 가서 조사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 어려움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하다.
북한산성 어귀에서 길을 따라 오르면 아취형의 성문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또 하나의 아취형 성문이 나온다. 이 문을 지나면서 곤란이 닥쳐온다. 당시 이 일대는 군부대軍部隊의 작전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그 때 성내에는 중흥사와 태고사가 있어 스님은 출입할 수 있었으나 일반인들은 사찰의 신도증을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입구 통제선의 보초군인에게 통사정하여 상관에게 허락을 얻어내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군사기밀은 절대 촬영하지 않는다는 조건부였다. 한시간 정도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걸어 올라가 현지에 도착했다. 이미 부도의 상륜부는 물론 탑신부재도 땅 위에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부재를 실측하여 복원도를 그렸으며 사진촬영도 병행하였다. 내심 ‘이 부도가 복원된다면 고려시대 말엽의 귀중한 석조부도 하나가 생기고 보물 1점이 추가되는구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하산의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다시 통제선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 보초병이 ‘무엇무엇을 찍었느냐’고 묻기에 ‘쓰러진 부도탑의 부재들을 찍고 실측하였다’하면서 실측도면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필름을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필름은 밝은 곳에서 꺼내어 볼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상관에게 연락하여 물어보라’고 하였더니 자기를 무시한다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의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필자와 이야기한 끝에 필름은 무사히 가져올 수 있었다. 후일에 들은 바는 이러한 요충지대의 조사나 촬영은 필자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필름을 보자’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고 했다.
석조부도의 현지 조사에서 널찍한 축단과 기대석들이 제자리에 잘 남아 있었다. 따라서 부재들이 산란함에도 불구하고 원위치에 복원하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국의 배려로 전체높이 4m규모의 완전한 석조부도가 옛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넓은 대지 위에 장대석으로 축단을 구축하여 탑전塔殿을 마련하였는데 그 중앙부에 장대석으로 정사각형의 탑구塔區를 이루고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을 건조하였다.
부도탑의 구성은 일반형과 같이 기단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평면 구성은 부분적으로 같지 않다. 즉 기단부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으나 하대석은 정사각형이고 중대석은 8각이며 상대석은 원형에 가깝다. 하대석 측면에는 각 면에 양우주와 2개의 탱주를 모각하고 상·하단에 갑석형과 굽형을 돌렸으며 3구씩의 직사각형 편액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면에는 널찍한 복련 8판을 굵게 조식하고 그 중심부에는 1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 여덟 귀퉁이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면에는 4엽문을 큼직하게 조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면에 낮은 2단의 팔각받침을 각출하여 중대석 상면에 놓이게 하였는데 측면에는 하대 상면의 복련과 대칭으로 굵게 조식한 앙련 여덟 판을 돌리고 각 판내는 고사리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옥개석 윗면의 굵은 괴임 위에 마치 원구를 상·하로 자른 것과도 같은 고복형高腹形 부재를 놓았는데 표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나 부드러운 치석과 유려한 곡선은 주목할 만하다. 그 위의 보개석은 팔각인데 하면下面의 처리와 낙수면의 형식, 여덟 귀퉁이 전각의 귀꽃문까지 옥개석과 같아 마치 옥개석의 축소형처럼 보인다. 다만 옥개석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전각부의 장막문이 두 곳 뿐이라는 점이다. 옥개석 위에는 연화문을 장식한 대석 1매를 놓고서 정상의 보주석을 받치고 있다. 보주석은 방주형方柱形인데 하부의 네 모서리에 앙련을 1판씩 장식하였으며 상부의 보주는 4귀퉁이에서 구슬을 물고 있는 형식으로 주변에 화염문 등의 장식은 없다.
이 부도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기단부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통일성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정사각형 위에 8각과 원형의 부재들이 그런 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고려말기에 건조된 부도탑으로서는 규모도 크며 가작佳作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 부도탑의 건조연대에 관해서는 태고사 경내에 건립되어 있는 원증국사탑비에 의하여 추정할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우왕禑王 8년(1382) 12월 23일 국사가 입적하였으며 다음해 정월 12일에 다비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향을 보내어 다비하게 하였으며 「원증圓證」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중흥사重興寺의 동쪽 봉우리에 세워 「보월○공寶月○空」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종石鐘을 조성하여 사리를 가은양산加恩陽山, 양근사나楊根舍那, 차사此寺(지금의 태고사) 세 곳에 안장하였다.
한편 탑비를 건립한 시기는 비문 말미에 「홍무십팔년을축구월십일일洪武十八年乙丑九月十一日 문인전송광사주지대선사門人前松廣寺住持大禪師 석굉石宏 입석立石」이라 하였으므로 곧 우왕 11년(1385)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도탑의 건립은 언제인지 정확한 연대가 보이지 않는다. 국사의 입적은 우왕8년이나 다비한 것은 우왕9년이며 비는 우왕11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우왕9년부터 11년 사이에 부도탑도 완성되었을 것이다. 부도탑을 구축하고 치석과 부재의 조성 등을 감안할 때 부도탑의 건립연대는 우왕11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현재 이 석조부도는 태고사원증국사탑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749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근년에 이르러 이 곳의 통제구역이 완화되어 등산객들의 출입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점차 방문객이 많이 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