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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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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재연 2001년 09월 235호
아무리 깨달음이 뛰어난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숨쉬고 살아 있는 한 세상과 담을 쌓고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불교의 연기緣起라는 가르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연꽃 그리고 오두막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나온 나들이 길에 전주 덕진 공원의 연못을 한 바퀴 돌아 걸었다. 늦봄 수면에 연두색 연잎이 생겨나던 것이 엊그제였던가 싶은데 이른 꽃대는 벌써 꽃잎을 떨구고, 따가운 햇살에 연밥이 여물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연못 위에 놓인 꽃길 다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거의 다 코를 벌름거리며 꽃보다 더 큰 미소들을 피워내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우아한 연꽃 향기는 예부터 감탄과 칭송의 바탕이 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단순히 예쁜 생김새나 향내가 아니라, 깨끗하지 못한 개흙이나 시궁창에서 자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전 여기저기에 여러 종류의 연꽃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게 아마 아래 구절일 것이다.

“보랏빛 수련이나 홍련, 백련이 물에서 나서 물에서 자라났음에도 수면 위로 솟아올라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여래如來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세속에서 자랐으나 거기 초연하여 물들지 않은 채 세상에 머문다.” [상응부 Ⅲ. 140.]

이처럼 세상을 물에 견주고,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깨달은 이의 초세속적인 태도를 연꽃의 생태에 비유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연잎에 머물지 않고 또르르 굴러내려 버리는 물방울을 탈속한 수행자에 견준 게송도 있다.

연잎 위의 물방울처럼
바늘 끝의 겨자씨처럼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런 이를 참 바라문이라 부르리!
[법구경, 401]

깨달은 이는 이렇게 시궁창에 피면서도 더러운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참 수행자는 연잎에 내린 빗물이나 바늘 끝의 겨자씨처럼 세상에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아무리 깨달은 이라거나 진실한 수행자라 하더라도 그가 숨쉬고 살아 있는 한, 세상과 담을 쌓고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삶의 태도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 우리의 승가는 출가와 재가자가 함께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룬 사부대중의 공동체인 까닭이다.
우리의 율장律藏은 곧 수행자 개개인이 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그 가운데 일어난 이런저런 마찰을 조정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선정 수행과 계율은 서로가 서로의 바탕이 되고 동시에 성취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을 옛 스승들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공空의 도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했다고 알려진 수보리(Subhu-ti) 존자의 예를 생각해보자. 장로게(Theraga-tha-)의 첫 머리 게송 네 편이 바로 수보리 존자가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번째 게송은 이렇게 되어 있다.

오두막 지붕 잘 덮이고 바람은 솔솔
비야 뿌리려면 마음껏 뿌려봐라!
잘 길들여 깨어 있는 마음 편안하기만.
비야 쏟아지려면 얼마든지 쏟아져라!
[데라가타 Theraga-tha-, 4.]

앞뒤 정황 설명이 없이 이 게송 하나만 보면 누구라도 뭐가 어찌 된 건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석서의 장황한 설명을 보면 필시 요즘 우리뿐만 아니라 옛적 스님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송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선 증지부 아함[A. I. 14]에 나오는 ‘외진 곳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평화롭게 머무는 데는 수보리가 제일이며, 공경할 만한 수행자로 수보리가 으뜸’이라는 부처님의 언급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두막(kut.ika-) 지붕이나 수행자의 삶, 빗물, 그리고 잘 길들여진 마음(susama-hita-citta) 등이 뜻하는 바를 요모조모로 궁리해 봐야 한다.
이내, 여기서 말하는 오두막이 정신(名)과 육체(色)의 조합으로써의 수행자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스스로 늘 깨어 있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관을 잘 제어할 때, 그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감각적 자극에 의연하게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세속적인 일들, 말하자면, 이해 득실, 명성 혹은 오명, 칭찬이나 비난, 쾌감 혹은 고통 따위가 몰아닥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외적 자극이나 충격이 쏟아지는 빗물이라면, 이런 빗물도 잘 덮인 그의 지붕을 뚫지 못한다. 그렇게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마른 통나무처럼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향한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염려하고, 늘 깨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보리 존자의 오두막이 통풍이 잘 되어 바람이 솔솔 통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보리 존자는 고립된 섬에 홀로 격리되어 바깥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너’가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란 이러한 연기緣起의 원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탐욕과 미움의 사슬에 묶인 것을 말한다. 불자佛子는 곧 세상과 내가, 이웃과 내가, 그리고 모든 너와 내가 투쟁과 시기,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부추기고 보듬어 안을 한 몸·한 생명임을 늘 새롭게 새기는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