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한암스님 밑에서 보낸 행자생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7년 08월 186호
내가 머물고 있는 절에서 얼마전 사십구재를 지낸 적이 있다. 아침나절 내내 염불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연세도 드셨는데 의식을 혼자치르시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하며 놀란 얼굴을 했다.
올해 내 나이 일흔아홉. 그의 말대로 이제 절을 혼자꾸려가기에는 벅찬 나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하루 종일 일을 해도 고단한 줄 모르고 한평생을 살았다. 혹 고단하면 한숨자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하는 것 없이 하는’ 마음자세 그것으로 건강을 유지해 왔다. 아마도 이런 마음자세는 한암스님이나 탄허스님 같은 스승을 만나 공부할수 있었던 은덕이 아닌가 한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분과의 만남은 어린 시절 일찌감치 맛보아야 했던 가난탓이었다. 열두살나던 해에 부모님은 고향인 서산을 떠나 인천으로 갈 짐을 꾸렸다. 가세가 기울자 그곳으로 가서 염전이라도 일궈 살아보자는 생각이었다. 나는 덕산에 살던 작은 숙부가 공부시켜 주겠다는 말에 부모님과 함께 가지 않았다.
그럭저럭 집은 살만했으나 열두살이 되어서야 댕기머리를 자를 만큼 완고한 집안 분위기 탓으로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통감을 세 해쯤보니 옆의 현토가 떨어져 공부에 재미를 더해가던 터에 서당의 훈장 어른이 순사에게 이끌려 서울로 압송되어 공부가 지연스레 중단되었다. 한다섯 해 한문을 익히면 될 것 같아 공부를 시켜 주겠다는 숙부의 말에 두말않고 숙부댁으로 갔다. 그러나 세속과의 연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숙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공부를 더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일이 그렇게 되자 숙부는 수덕사에 가면 한문 공부를 더 할 수 있다고 하니 그리로 가보자고 했다. 수덕사로 가니, 마침 한암스님의 상좌가 머물고 있었는데, 오대산 상원사에 가면 한암스님에게 한문을 잘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서울로 가서 닷새를 걸어 상원사에 이르러 한암스님을 만나뵈었다.
그 때에 한암스님은 어린 사미들을 모아놓고 마을의 훈장처럼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내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 스님을 시봉하던 상좌가 다른 곳으로 가서 내가 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절집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공부하고 싶은 일념으로 그렇게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 내나이 열여섯, 어느날 한암노스님께서 이런 법문을 하셨다.
“오리의 다리는 짧고 황새의 다리는 길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황새의 다리를 잘라 붙일 수 있는가. 오리의 다리는 짧은대로 황새의 다리는 긴대로, 산은 높은 대로 바다는 깊은 대로 평등한 것이다.”
사실 가세가 기울어 그리도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왜 이리 세상은 불평등한지,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터였다. 스님의 그런 법문을 듣는 순간 그동안 마음속에 또아리 틀고 있던 불만이 단번에 풀어짐을 느꼈다. 이마 스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그때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으로 북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그런 가정을 하면 아찔함이 느껴지니 한암 노스님을 만난 인연에 고개숙일 뿐이다.
1935년 2월 상원사에 들어가 노스님 시봉을 들으며 각단 예불을 부지런히 하고 있는데, 사월 보름 결제법문을 하면서 노스님이 그러셨다.
“저 애가 각단 예불을 드리는데 계를 일러 장삼 입혀야겠다.”
절에 들어와 세 해가 지나야 사미계를 주는 것이 노스님의 방침이었는데, 그 동안 착실하게 노스님 시봉해 드리고 각단 에불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어여쁘게 보셨는지 빨리 계를 주었다.
사미계를 받던 날, 노스님이 누구를 은사로하겠느냐고 물으셨다. 넓은 방에 노스님을 중심으로 여러 스님네들이 앉아 있었따. 노스님의 물음이 떨어지자 나는 벌떡 일어나 탄허스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분 앞에 절을 올렸다. 박학다식한 탄허스님께 공부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턴허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탄허스님은 잘 알려진 대로 어려서 이미 한문학 전과정을 마치고 학문의 한계를 느껴 한암스님과 교유를 시작했는데, 세 해쯤 오고 간 서한은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문장이었다. 노스님과 그렇게 교유를 하다가 스물하나에 출가한 탄허스님은 내가 노스님 시봉을 드리며 지내는 동안 같은 방을 쓰기도 했는데 나를 퍽 귀여워 했다. 은사 스님은 내가 상원사에 오기 한 해 전 팔월에 와서 시월보름에 계를 받고 한암스님께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노스님께 「사집」을 익혔고, 은사스님께 「사교」와「대교」를 익혔다.
해방 이듬해이던가, 노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상원사에 불이나 불사를 새로하게 되었을 때 내가 원주소임을 보고 있었다. 여러해 동안 살림살이를 사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노스님에게 은사 스님이 싫은 소리를 했다. “공부를 시켜야지 언제까지 저렇게 살림만 시킬거냐”고 불만 섞인 소리를 하자, 노스님은 허허 웃으며 말씀했다. “저리 일 할 사람도 있어야지.”
공부와 연이 안 닿았는지 어느 해 감기 후유증으로 콧병을 크게 앓다 대수술을 받고는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고 그리도 하고싶던 공부를 놓아버혔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할 때 매우 명석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공부하고 싶어 절에까지 들어왔건만 공부와는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스승 복이 많아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을 시봉하며 공부하는 복을 누렸으니 별 회한은 없다. 당신 환갑날 아침 “자네가 끓인 시래기국 얻어먹으러 왔다.”며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은사 스님을 부처님 은덕 아니면 내 박덕함에 어찌 만날 수 있었으랴.
상원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해인가. 봉은사에서 어산을 하시던 박대웅 스님께서 상원사에 내려오셨다. 노스님 밑에서 참선을 하려고 내려온 것인데, 노시님께서 “예식 잘하는 스님 오셨으니 모두 예식을 배우라” 하며 우리에게 예식을 배우게 했다. 노스님은 원체 사리에 밝은 분이었으니 대웅스님이 소리 지어 어산하는 것을 교정 보아주었다. 자음을 떼고 붙이는 법까지 얼마나 세밀히 지도를 하는지 노스님께 배운 예식은 지금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노스님은 평소 부처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를 강조하셨다. 참선, 염불, 간경, 예식, 가람수호가 그것인데 재능이 있어 모두 다 갖추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한 가지만이라도 철저히 해야 양가득죄의 죄를 면할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생전에 부처님 제자로서 세상에 남길 것이 있다면 그때 철저히 배워 익힌 예식이다.
그저 한문을 익히고 싶은 간절함으로 산문에 들어온 지 어언 예순 해도 넘었다. 두 달 반의 짧은 행자시절을 돌이켜보려니 한암 노스님을 시봉하며 불법을 만날수 있었던 인연에 새삼 복되고 복됨을 느낄 뿐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