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논실에는 먹을 거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방문을 열면 마당의 감나무 뒷산의 밤나무, 골목을 지나 어린이 걸음으로 한참 걸어나오면 안동 지례 국란으로 흘러가는 냇물 속에는 어찌나 고기와 다슬기(우리는 골부리라 하였다)가 많았던지. 동네 아재들이 밤새 쳐놓은 그물에는 꺽지, 피리, 붕어, 뚜구리, 메기 등이 가득 걸리고 그날 밥상에는 얼큰한 매운탕이 올라왔다. 골부리는 정말 많았다. 골부리를 삶은 그 푸른 남빛 물을 조금 마시고 난 후 시무나무 가시로 기술 좋게 까먹던 맛을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강물 바닥 바위 돌 틈이나 그 사이에 앉아 골부리 줍던(잡던) 추억도 아련하다. 내 생일은 음력 칠월 그믐이다. 늦여름 또는 초가을에 내가 태어났는데, 지금 기억으로 그 때 우리 논실에는 유난히 먹을 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옥수수 고구마 같은 농사 지은 것 외에도 앞 뒷산강 건너 우리 할배 무덤 옆 밤나무, 거기서 한참 오른쪽 위로 올라가다보면 골짜기 안에 꽃인지 열매인지 붉게 휘둘러 있던 보리둑, 어렵게 어렵게 나뭇가지 위로 두둑두둑 달려 있던 멀구 등. 특히 보리둑은 따먹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입술이나 혀는 붉어지고(버얼거지고) 보리둑 따먹은 내 입은 무슨 어린애 귀신 같았을 것이다. 포도보다는 훨씬 작았으나 흡사 포도같이 송이송이 달려 있던 멀구(머루)의 경우는 잘 골라 따먹으면 그 새콤달콤한 맛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달려 밤나무의 그 덩치 큰 품 아래 한 알 두 알 떨어져 방긋 웃던 알밤은 떫으면서도 고소한 그 맛. 먹는 일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주로 먹는 것이었다. 추석, 한가위 명절은 옷 하나 얻어 입어 신명나기도 했지만 특히 먹을 게 많았다. 추석 지난 바로 뒤 배탈이 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까. 추석이 지나도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그 애는 병이 들었거나 매우 음식에 대하여 초연하여 지금은 무슨 성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콩서리, 밀서리, 수박서리, 포도서리, 무슨 서리의 그 추억은 지금도 아찔하다.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는 “야들아, 딴 것은 마자(마저) 먹어라”하셨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주인은 “요놈들, 게 섰거라”하며 호통을 치셨다. 우리 아이들은 먹는 둥 마는 둥 ‘걸음아 나 살려라’하면서 혼비백산 냅다 도망갔다. 어느 고요한 늦여름 밤 우리 몇몇은 작전을 꾸몄다. 밤에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수박밭에 접근하면 밤의 그 색깔과 하나되어 원두막 주인아재가 우리를 못 보게 된다는 이상한 이론에 입각하여 우리는 옷을 훨훨 벗어 강가 돌멩이 위에 얹어두었다. 그런 후 살금살금 맨몸으로 달덩이 같이 둥글 둥근 수박 곁으로 다가가 그 무겁던 놈을 하나씩 따서 들고 뒤뚱뒤뚱 강가로 달음박질쳐 밤이 이슥하도록 누드차림으로 배터지게 먹던 그 수박은 지금 내 몸의 어떤 구성분으로 남아 있을지…?서리 가운데도 콩서리 맛이 좋았다. 이마저도 도둑질이라는 눈으로 본다면 이 땅 이 하늘 아래 천지자연에 대하여 어느 누구라도 도둑놈 아닌 놈이 있겠는가. 콩을 밭에서 뽑아다가 몇 놈이 둘러앉아 집 부엌에서 몰래 가져온 다항(성냥)으로 이쪽 저쪽에서 끌어모은 마른나무 가지에확 불을 붙여 그 위에 올려 놓으면 몇 번 연기에 캑캑거리고 나서 드디어 맛있는 햇콩의 그 고소함은 우리 입안을 가득 채운다. 우리 입술은 시커매지고, 붉은 귀신 검은 귀신이 그렇게 되었다.
먹을 거리는 땅 밖 땅 위 물 속에도 많았지만 땅 속에 땅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도 더러더러 많았다. 모래가 많이 섞여 있는 땅에는 땅콩이 한 움큼 있었고 늦봄 동네 어귀 언덕에는 짠대, 도라지 등등도 많았다. 특히 짠대 맛이 좋았다. 깊은 산골 우리 아이들에게는 맛있는 그것이 모두 훌륭한 간식이었던 셈이다. 아이의 눈에는 먹을 것이 온 천지에 깔려 있었다지만 우리 집은 실로 가난했던 것 같다. 쌀밥이 귀했고, 간고등어 그 짭짤하지만 형용할 수 없이 그 맛있던 반찬이 밥상에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 삼십리 길, 산 넘고 물 건너 진보장에 가서 우리 아부지가 오랜만에 사오신 간고등어 구운 것이 밥상에 오르면 먼저 침이 꼴딱거렸고, 할배 밥상에서 남은 그 놈을 드디어 먹을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가끔 나는 할배와 겸상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 간고등어 지느러미 부분이나 갈색에 가까운 등쪽 껍질 근처 고깃살을 먹을 수 있었다. 할배는 손자녀석에게 양보하셨던 것이다. 꽁보리밥이나 꽁조밥, 물을 많이 부어 끓인 수제비, 갱죽, 감자밥, 무밥 등은 아마 가난한 우리 집 살림의 표현이었던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음식의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던 우리 어른들의 힘겨움이 꽁보리밥 깊숙히 스며 있음을 그 때 나는 알 리가 없었다. 우리 집이 몹시 가난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엄마 태어난 집(외가)은 엄청 부자였다. 우리 외가는 청송군 진보면 고현리였다. 유명한 신촌 약수터가 외가 근처에 있고, 지금도 지나가는 길손들은 신촌 약수를 맛있게 마신다. 그 맛은 무슨 톡 쏘는 청량음료 같다. 우리 엄마가 외할머니의 맏딸이니 나는 맏외손자였다. 아들 하나 못 낳아 그 부유한 살림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서러움 받고 구박받으며 살던 외할머니는 나를 몹시도 귀히 여겼다. 외할머니 치마 속 쌈지돈에서 내 손에 건네진 100원짜리 푸른 지폐(그 당시 엄청 큰 액수였다)로 신촌 약수터로 내달려 약수와 함께 희고 누르스럼한 엿을 많이도 사먹었다. 엿을 먹어야 약수를 많이 마실 수 있다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외할머니 주무시던 외딴집 방 윗목에는 손때가 몹시도 묻은 동글동글한 돌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당신이 낳지 않았지만 둘째 외할머니가 낳은 나보다 조금 나이 적은 외삼촌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맏외손자인 나의 것이었다. 외할머니 말씀이 그랬다. 돌 하나 쓰다듬으며 ‘우리 아들 잘 되라’고 비시고 다른 돌 하나 만지며 ‘우리 외손자 잘 되라’고 빌고 또! 비셨다. 요즘도 우리 외삼촌은 자기를 낳지 않았지만 어머니(우리 외할매)의 제사는 꼭꼭 지내 드린다고 한다. 나 역시 자식을 셋이나 낳고 가끔 가르치고 때때로 배우며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다. 외할머니의 그 돌 덕분이리라. 먹는 이야기, 밑도 끝도 없이 하고 있지만, 외할머님께서 끓여 주시던 메밀국수 맛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먹고 이렇게 살고 있지만 그 때 거기서 많이도 먹었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하면 무얼 먹는 존재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