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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계율이 지켜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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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경성 1997년 08월 186호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룩하는 길은 정각에 있다. 그것은 삼학의 실천으로만 가능하다. 삼학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계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불교 교단에서의 행위 규범이며 죄악 행위에 대한 금지조항이다. 올바른 수행을 위하여, 교단의 청정함과 화합을 위하여, 그리고 교단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 계율인 것이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지켜질 수 없는 계율이나,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인식을 히지 못하는 불감증이나,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자율적인 수행의 풍토 등으로 해이해진 요즘의 교단 현실을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더 늦기 전에 치유하기 위해서는 종단의 원로 스님들과 율사스님들이 대중의 공감을 얻을수 있는 규제의 명문화를 이룩하여 파계자에게는 어떤 방법으로든 불이익을 감수하게 하여 청정한 수행 풍토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타율적인 제재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우선하여 저마다의 자율적인 의식의 전환으로 투명하고 떳떳한 수행 종단으로 거듭나야만 할 것이다.

불교에서의 계율은 수행자의 생활을 중심으로 하여 설해진 것이므로 그 실천의 대상자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지금 승단에서 지침서로 삼고 있는 불교 윤리의 구체적 계율 덕목인「사분율四分律」은 부처님 때에 인도라고 하는 특수한 풍토와 사회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더욱이 이 소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한 성문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그 무렵의 특정한 집단의 생활지침이었다. 그리고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을 상대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서 수범수제隨犯隨制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승불교권의 한국사회는 그때와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종교윤리의 지침으로서의 계율은 오늘날 한국사회 속에서 도송가라고 하는 수행집단의 구성원이 수지해야 할 계상인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히는 모든 불자들의 덕목이 되므로, 계율이란 비단 승가뿐만 아니라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할 생활지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불교윤리로서 생각되어 온 「사분율四分律」중심의 소승불교의 계율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대승불교적인 견지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계율제정의 근본적인 목적이 지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계를 통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획득하려는 방법론에서 시설되었다고 볼때, 인도사회의 특수성과 우리가 서있는 현대 사회의 상황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무시할 수가 없다. 만일 율장 그대로의 문자 해석에 사로잡혀 지금의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당위성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 실천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본의를 저버리는 집문미지執文迷旨의 어리석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율장중심의 계율에는 오늘날의 사회에 비추어 보아 도리어 비윤리적인 요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십파일제九十波進提 가운데 제십굴지계第十提地械를 보면 “만약 비구들이 스스로 땅을 파거나 또한 타인을 시켜 파게 하는 자는 파일제波進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율은 출가수행지들의 생산적인 노력이 허용되지 않던 그무렵 인도사회의 습관으로는, 땅 속에 많은 생물이 번식하기 때문에 땅을 파게 되면 아무래도 생물을 죽이게 되므로 열대지방의 이러한 상황에서는 불살생不殺生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계율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계율을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이승二乘의 수행자와 바람직한 수행자의 표본인 보살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타인을 위한 전교활동에서 쉽게 알수 있을 터인데, 소승 율장에서는 여인과의 접촉을 금기시하고 있으나, 여자든 남자든 많은 사람을 접해야 하는 전교는 종교의 생명이며 이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종교인의 사명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십주비파사론十住 毗婆沙論」 에서 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려고 마음내어 무거운 짐을 걸머졌나니 나쁜 이와 원수와 도둑들을 마음에서 언제나 버려서는 안된다. … 만약 한 사람이라도 버리게 되면 부처님의 은혜를 등지는 것이니 그러므로 나쁜 중생이라도 버리지 밀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사회의 정의 실현과 불국토의 실현을 위해서는 마음에 늘 사명감을 가지고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교화하는 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교단과 사회의 변화로 부득이 지키지 못하는 계율조항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며, 교단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계율 이외의 현실적이지 못한 세세한 계율에 대한 재정비는 당면한 문제인 것이다.
한편 계율은 금지적禁止的인 방향으로 행동을 제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준수적遺守的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율성을 더욱 중요시 한다. 금지적인 지지계止持械는 악에 대한 여실상을 미리 알고 이에 대한 예방조치를 스스로 결행하여 죄악 행위를 경험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사정근四正動에서 표함하는 것과 같이,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하고, 이미 생긴 악은 영원히 끊어 버려야 한다. 또한 아직 생기지 않은 선함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선함은 더욱 증장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계율은 무조건 부정적인 금지조항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권장하여 그 선행을 증장하도록 격려하는 덕목을 더욱 중요시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권장격려의 방향을 작지계作持械라고 한다.
현실적인 유혹세계에서는 마음과 몸 그리고 입을 지키는 노력이 윤리적 한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이고 종교적인 세계에서 선행을 지향하는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신앙의 순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려면 해의 의지에 바른 견해(正見)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보거나 대상을 관찰함에서 맑고 바른 시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의 정견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정직관正直觀도 이루어질 수 없다. 지계를 견지하면서 바른 견해를 갖도록하고 바른 말(正言)을 하는 확고한 신념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우리의 마음은 나약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심원육적心猿六願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마음은 순간의 찰나에도 눈에 보이는 물질적 대상에 유혹당하고, 귀에 들리는 음향적 소리에 매혹되고, 코, 혀, 몸이 모든 대상에 고혹되고 정복당하여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흥분에 의하여 타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향락에 치우친 삶이 인생의 전부인 양 전도된 자리에서 몽상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선도하고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각성시켜야 할것이 계율이다. 그러므로 금지조항을 강요하기에 앞서 선행의 실천방안이 무엇인지를 계몽하는 입장을 지녀야 한다. 계율이란 얽매임이 아니라 풀림과 자유를 동시에 향유하는 최선의 정도이기 때문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