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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절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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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희선 1987년 05월 63호
부처님의 나심은
온 누리의 빛이요
뭇 사람의 목숨이라
빛이 있어 밖이 없고
목숨도 때를 넘나니
이 곳과 저 땅에
밝고 어둠이 없고
너와 나에
살고 죽음이 없어라.
거룩한 부처님
나신 날이 왔도다.
향을 태워 받들고
기를 들어 외치세.
꽃머리와 풀 위에
부처님 계셔라.
공경하여 공양하니
산 높고 물 푸르더라.

-만해 한 용운 대사의 「성탄」

올해도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며 오월을 맞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고의 진리임을 믿으며 또한 불은을 입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부처님 나심을 경축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사의 고통에서 헤매이는 중생들에게 살고 죽음이 없는 빛의 세상을 알려 주신 거룩한 부처님 나신 날에 마땅히 향을 태워 받들고 공양해야 하리라.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니, 이 세계의 모든 괴로움을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我當安之).”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읊으셨다는 이 탄생게에는 부처님의 사바 세계 출현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생 구원의 대자대원행이 멀리 동방의 우리나라로 전래된 지1,600여년, 불교는 우리 민족에게 삶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더불어 민족 문화의 팔십 퍼센트에 이르는 거대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토를 순례할 때마다 조상의 얼 속에 뚜렷이 뿌리박혀 있는 불교의 신앙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모진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 밑에서 스님들이 도성 출입이 금지되고 천민 신분으로 전락한 가운데 탐관오리들의 온갖 공물 수탈을 견뎌내며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 온 것은 불교의 위대한 저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로 쓰러져 가는 봉건 왕조에 대항하여 갖가지 민중 봉기의 선봉에 섰던 수많은 스님들의 활약이나 실학과 개화 사상의 밑받침이 되었던 불교의 평등사상과 구세사상은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값진 역할을 하였다. 곧 불교는 끈질기게도 외세의 침탈을 극복하고 살아 온 우리 민족의 생명력과 그 흥망성쇠의 길을 함께 걸어왔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종교이자 곧 민족의 얼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을 크게 경축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2531번째 불탄일을 맞는 올 오월은 경축에 앞서 더욱 마음이 무거워짐은.
지난 해 민주화의 열기가 전 세계를 뒤덮으면서 중남미에 이어 필리핀의 영구집권을 꿈꾸던 마르코스 정권이 붕괴하고 아이티의 뒤발리에가 프랑스로 처량하게 망명가게 되었을 때, 온 세계의 눈은 한반도에 집중되었다.
한국의 군부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가 달성될 날이 머지 않을 듯하였고, 정부는 그동안 강력한 공권력으로 봉쇄해 왔던 개헌 논의의 금기를 깨고, 합의 개헌을 하겠다고 4.30 청와대 3당 대표회담을 통해 밝혔다. 신민당의 개헌 추진 시-도위 결성 집회에는 수만, 수십만의 대중이 운집하여 한국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전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 및 학생의 잇따른 분신, 정부의 농정 실책에 항의하는 농민의 자살, 언론 자유와 공정 보도를 요구하는 KBS 편파보도 거부운동, 전국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과 개헌 서명 운동, 한국 불교 최대의 9.7 해인사 전국 승려대회와 봉운사 10.27 법란 규탄 시위, 그리고 각 대학의 계속적인 민주화 요구시위가 올 봄에 고 박 종철 군 2.7추도집회 및 3.3 49제봉행집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올해에는 기필코 민주화의 서광이 비치는가 했더니, 그동안 설마 하면서 한편으로는 예기해 왔던 ‘신호헌론’ 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그리고 강력하게 재창되고 있다.
시국이 마치 꽃샘추위처럼 옷속을 을씨년스럽게 파고들고 새벽 미명의 짙은 어두움처럼 이 땅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이 깊어갈수록 오월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월, 잔인한 오월.
오월이 되면 꽃들이 흐드러지게 산천을 뒤덮고, 이름모를 풀들이 그 연초록의 풋풋함 생명력을 뽐내며, 농부들의 일손은 바빠지고, 아녀자들의 옷차림이 한결 경쾌해질 참으로 한해 중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 오월에 맞는 부처님 오신 날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다같이 크게 경하해야 될 축제의 날로 걸맞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월은 너무도 무자비했다. 갓 피어나려는 민주의 꽃망울을 가지채 꺾어서 짓밟아 버린 그것은 인간 세계의 일이 아니다.
중심사에서 초파일을 준비하러 시내에 니왔다가 피흘리며 신음하는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송하던중 허리에 총알이 박혀 영영 두 다리를 못쓰시게 된 어느 스님의 이야기는 두고 두고 눈시울이 시큰하다. 또 금남로에서 쓰러져 망월동에 묻힌 동수 법우의 그 소박한 웃음이 떠오를 때마다 그 법우의 투박한 손이 그리워 가슴 속에 멍울진다.
저 미치도록 푸른 오월의 봄 하늘에 뿌려진 흑장미 같은 피의 광주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사월 초파일이 우리 민족의 진정한 축제의 마당이 될 수가 없다. 모두가 부처님의 은덕을 감사드릴 수가 없다. 숨쉴 수조차없이 지독한 최루탄 가스와 더불어 살아가는 대학생들이나, 저열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 및 장시간의 노풍 조건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공장 노동자들이나, 생산비도 안 나오는 농사를 어쩔 수 없이 지어야 하는 영세 농민들이 어떻게 불은에 감사할 수 있으며 구속자나 그 가족들이 어찌 불탄일을 기뼈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불탄절을 맞아 역설적으로 미륵부처님의 하생을 빌고 싶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 바라문 출신의 청년 미륵.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이땅에 용화세계를 세우신다는 미륵 보살님.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루지 못한 정토장엄의 임무를 띠고 십선만이 있고 십악이 없는, 기아와 질병이 없고 인종과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없으며 심지어 높은 산마저 평평하게 된다는,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행복한 세상이 어서 빨리 오길 염원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모진 삶을 이끌어 왔던 데에는, 그 굽이굽이 험한 세상을 혜쳐온 데에는 미륵 부처님의 가호를 빌고 미륵의 세상을 빌었던 별처럼 많은 백성들의 원망이 진하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평등사상과 구세사상의 극치인 미륵용화세계야말로 저 우금치마루에서 숨진 수십만의 동학 농민들의 꿈이었으며 자신을 미륵의 후신이라고 한 증산의 꿈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미륵세계에로의 동경의 저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이 가공할 역사의 저력은 우리 불교가 옛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역사의 책무와 민족의 여망을 짊어지고서 떨쳐 일어날 때에 되살아날 것이다.
미륵의 세계는 신앙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구원을, 일시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륜성왕이 출현해야 된다. 모든 사람은 십악을 끊고 십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전륜성왕은 불타의 중생 구원의 대원이 일시에 성취될 수 있는 큰 조건이 된다. 정치적 자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공정하고도 풍부한 분배 정책은 우리 인간이 정신적, 물질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데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의 제 l요인이 됨을 미륵의 사상가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개개인의 윤리적, 정치적 각성 또한 인간의 동시 구원을 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훌륭한 정치 지도자와 그에 따르는 각성된 민중들이 결합되었을 때에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서 그 세계를 정토로 장엄할 미륵 부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 따르는 미륵 부처님의 제자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새 시대와 옛시대, 새사람과 옛사람의 확실한 변화를 요구한다. 과거의 죽은 불교와 현재에 생명이 샘솟는 불교, 미래의 주역으로서의 불교를 확연히 구별하도록 요구한다. 모든 부문에서의 변화를 촉구한다. 과거와 현재의 보수적인 가치 지향을 깨뜨리고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가치 지향을 추구할 것을 엄명하는 것이다.

비상한 시국 속에서 맞는 불탄일이어서 그런지 길에서 나시고 길에서 돌아가신 부처님의 중생 구제를 위한 대비대원행이 몹시도 우러러뵈고 한편으로는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 애쓰신 보람이 겨우 이것인가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이면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은전이라 하여 주어지는 양심법들에 대한 사면이 있다. 불전에 의하면 부처님나심을 축하하여 부왕이 모든 나라의 죄수를 석방하고 재물을 나주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태어나질 때는 모두 그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미륵 부처님이 하루 빨리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되고 좀더 풍요롭게 되어 불성으로서의 인간적 제가치를 마음껏 꽃피울 수 있기를 간절히 대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