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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마을 보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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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7년 08월 186호
지난 95년 12월 26일,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의 한 사회복지시설에서는 영하25도의 혹한을 녹이는 뜨거운 잔치가 있었다. 시설물의 준공식 날이자, 시설의 장애자식구 가운데 서로의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귀가 되어 평생을 의지해 나가기로 마음 먹은 세 쌍이 합동 혼례를 올리는 날이었다.
평생에 이런 반듯한 옷 한번 입어본 일 있었던가. 생에서 앞자리 한번나서 본 일 있었던가. 오늘은 일천오백 하객들을 모신 자리의 주역이었다. 입고 나온 새옷보다도 그들의 기쁨에 찬 얼굴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왔다. 가락지도 하나씩 나눠 꼈다. 히객들은 뜨거운 박수로써 그들의 시작을 축하했고, 마을의 탄탄한 앞날을 기원했다. 법당에 새로 모져진 부처님, 점안식 거치면서 비로소 눈 뜨셨으니 부디 그 눈 다시 감지는 말아 주십사고, 일천오백 마음들이 손 모아 합장했다.
이 날이 마을에게는 어떤 날인가. 고아와 정신 및 지체 장애자와 노인들을 거두고 섬기는 “살아 있는 보살”로 소개된 사람이 어느 날 사기한으로 뒤집혀 텔레비전 화면에 소개된 뒤로, 마을이 쑥대밭이 된 지 다섯 달 만이었다. 죄 지은자는 외국으로 몸을 피했고, 죄 없이 남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목숨일 서러움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사건이 난 뒤 십여 차례에 걸쳐 부정적인 내용의 방송이 텔레비전으로 보도되고, “당연히” 후원의 손길은 뚝 끊겼다.

95년 9월, 곡절 끝에 소쩍새 마을 원장소임을 맡게 된 중앙승가대의 보각스님은 쏘쩍새 마을을 찾은 첫날의 참담함을 잊을 수가 없다. 노인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는 아이들은 극심한 영양실조였고, 식구가 백삼십명이 넘는데도 목욕 시설 한 군데 없었다. 비닐 움막 숙소의 마룻장은 내려앉아 있는 데다 유리창은 깨져 있고, 방은 파리 천지였다.
평생에 밥먹기가 그렇게 고역스러웠던 적이 없던 식당에는 쥐가 왔다갔다 했다. 후원자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 겪게 된 재정 문제도 큰일이었지만, 무엇보다 화급한 것은 식구들이 몸 담고 생활하는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이미 전임자들이 그 해 안으로 시설을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시설물 신축 허가도 어려운 일이었다. 땅도 이쪽 명의가 아니었으니 신축은 차라리 불가능해 보였다.
종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기부 취하소송을 준비 중이라 협조할 리만무한 가운데 보각스님이 처한 형편은 “전쟁 상황”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어렵사리 신축허가 얻어서 한밤중까지 불을 밝혀 언 땅 녹여 가며 집을 짓는 한편으로 법인 설립 신청을 시작했던 것이, 중앙승가대에서 운영, 관리하는 “사회복지법인 승가원”의 이름으로 석 달 만에 성사를 본 것은 “이적”이라할 만한 것이었다. 출가한 뒤부터 어른 스님들에게서 곧잘 듣던 말이 “기도해서 이적을 세 번쯤 봐야 큰 어려움 없이 중노릇으로 회향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 두 가지 이적이 그 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부처님 감은 눈 뜨시던 그날은 소쩍새 마을을 뒤덮었던 어두운 구름사이로 말끔히 걷히고, 밝고 힘찬 앞날을 기대하기에 족한 날이었다.
무엇보다도, 혹한을 무릅쓰고 참석해서 마음을 모아주었던 일천오백 하객들이 그들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 줄터였다.
그로부터 두 해가 채 못 된 지금, 소쩍새 마을은 “변화”가 아니라 “개벽” 이라 할 만큼 면모를 일신했다. 땅은 천오백 평을 사서 전체 부지가 오천 명으로 늘어났고, 삼백 평 규모의 시설물에는 장애자 교육을 위한 ‘특수 교실, 의무실, 치과 진료실, 법당, 목욕탕, 식당’ 등이 들어섰다. 구십 명 남짓 되던 식구들도 이백삼십오명으로 늘어났고, 소문듣고 몰려든 대기자가 오백 명이나 된다. 교육에나 재활에 대한 의식커녕, 거의 방치되다 시피했던 식구들은 남녀노소로 구분되는 방사를 따로 갖게 되었고, 장애 정도가 심하여 학교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별도외 교육도 받는다.
노인이 서른 명쯤이고, 정상인은 전체 식구의 오 퍼센트쯤밖에 되지 않지만, 움직임이 가능한 만큼 몸을 놀려 종이 상자 만들기, 염주 만들기, 상자 끈 끼우기 등의일을 해보케 하고, 채소도 가꾸고, 관음죽 따위를 길러 보게 한다.
성치 않은 몸이나마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피폐되어 재활은 더욱 요원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올시월 초파일에는 식구들이 모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서울대공원, 어린이대공원에서 놀다가 오후에는 손수 만든 등을 들고 제등 행렬에도 참석했다. 몸무게가 백이십 킬로그램인 아이도 생전 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그날 밤 그 아이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소쩍새 마을이 다른 복지 시설과 차별화되는 것은 “열린 시설”이라는 점이다.
“저희 마을은 식구의 반 이상이 가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설이라고 하면 무의무탁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죠. 실제로 현실이 그러하고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내다버리고, 시설에 입주하게 되면 찾아보지 못하게 되지만, 저희는 언제든지 찾아오게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버려졌다는 생각도 덜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일요일이면 방문하는 가족이 여럿 됩니다. 내가 늘 이야기 하지만, 가정보다 더 좋은 시설은 없습니다. 형편이 안되어 이런 시설에 맡겼다가도 사정이 나아져 데려가겠다면 얼마든지 데려가게 합니다.”
무슨 일을 도모함에 있어 뜻만으로 추어 나갈일도 없지 않겠지만,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현실화되기가 불가능한 것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일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재활 및 자활커녕, 제 몸 가누기도 쉽지 않은 식구들을 거두어야 하는 사회복지 사업이란 것일 터였다.
그 점에 관한 한 보각스님의 인식의 기반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확고해 보인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될 일 아닐 뿐만 아니라, 엉망이 되어 있는 마을에 대한 인상은 원장 소임을 맡은 자신이 몸소 나서서 적극적으로 고쳐 씻어야 할 일이었다.
남이 뭐라든 말든 법회를 통해 부처님 법을 알리는 일은 열심으로 해 온 터였다. 이제는 소쩍새 마을 후원에 대한 권선의 “엉큼한 속셈”을 가지고 법회 , 텔레비전 방송, 인쇄 매채를 십분활용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깐쉬는 동안도 방생 가는 버스편에 올라 후원 안내 팜플렛을 돌리는 일은 물론이고, 일요법회 때는 두시간 전부티 마을의 입구에서 안내장을 나눠 준다.
그가 좋아하는 말씀은 “중생이 없으면 보살은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 는 것이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로 84년부터 승가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쳐 왔거니와, 요즘도 산업복지, 개별 사회사업, 사회복지 실습 등을 강의한다. 그러나 사회복지란 현장을 전제로 하는 학문인 만큼, 교수노릇 십 년 만에 현장으로 뛰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복지”를 불교 용어로 바꾸면 “보잘행”이 될 터인데, 보살행이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로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 임을 그는 힘주어 말했다. 종교가 그 사회의 가장 어렵고 힘든 편에 서 줄 수 없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외면해서는 종교는 존재 의의를 잃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표현했듯이 “전생에 복을 많이 못지었는지” 잘 되어 나가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적은 없고, 어렵고 안 풀리는 일만 맡겨졌다. 그러나 소쩍새 마을 원장 소임을 맡을 무렵 함께 맡았던 삼전종합복지관이나, 지금 그가 소장인 불교사회복지연구소 경우만 해도 운영을 정상화시키는 일을 어렵잖이 해 내 학생들 가운데서는 그를 “해결사”로 부르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가 “문재”를 풀어 나감에 있어 산문에서는 드물게도 “생산적”이라 할 만한 방법도 큰 몫을 하는 점이 이채롭다. 부전살이, 시다림 따위로 돈을 모아 등록금을 마련해서 대학을 다녔고, 서울에서도 월부책 장사, 김 장사, 조기 장사까지 했다.
휘문출판사의 월부책을 팔려 다닌 일을 두고, “승복 입고 책 장사한 유일한 경우일 것”이라 했다. 그 일이 삼전종합복지관 일을 시작한 뒤에까지 이어졌다니 그의 “생산 활동”은 최근까지 계속되었던 셈이다.
그는 대접받는 일에 인색하기로도 호가 난 사람이다. 밥이야 승가대 구내 식당에서 함께 먹으면 될 일이니, 그럴 의사가 있다면 후원금으로 내시라고 이른다. 쓸데없는 밥 얻어먹지 않는다는 그의 뜻은 쓸데없는 밥 안사주는 것으로 여겨져 주위로부터 “밥 한끼 내는 법 없다”는 불평을 살만큼 된 모양이다. 그 비난의 속사정이 그러하거니와, “수중 돈은 시주돈이니 만큼” “쓸데없는 자리”나 자신을 위한 일에는 결코 헛돈을 쓰지 않는다는 그의 굳은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암동 승가대학 건물에 있는 그의 처소는 온돌방이 아니다.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하여 “해외 나들이 전무”의 경력을 깨고 돌아왔더니, 그의 방벽이 벽지로 발라져 훨씬 방다운 방이 되었지만, 사무실이기는 여전한 그 곳을 처소로 삼은지도 네 해쯤된다. 겨울이면 아스타일 바닥에 전기 장판을 깔고 자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몸 닦는 일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풀어 나갈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는 십 년 세월 동안 월급, 법사비, 강사료 따위를 모은 돈을 내놓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강화도 선원사 대웅전 부지비로 일억 원, 승가대 발전 기금 및 도서관 기금으로 일억이천만 원, 그리고 몇몇 사회복지 시설에 기부한 금액은 모두 삼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소쩍새 마을의 직원들은 재량권이 많이 주어진 만큼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할수 밖에 없는 가운데, 일 주일에 두 번씩 새벽같이 길을 떠나 마을을 찾는 원장스님에게서 한결같은 당부의 말을 듣는다. 전화세, 전기료, 수도료 따위의 경상비는 아끼되, 식구들을 위한 치료비, 교육비, 식비 따위는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끼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사건” 뒤로 후원자의 수효가 절반으로 떨어졌다가 간신히 그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단체가 많이 떨어져 나가 후원금의 액수는 본디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형편임에도 그런다. 새삼스러운 말이 아닌가. 그러나 거개 사회복지 시설 운영자들의 인식이 아직까지도 “버림받은 사람들을 먹이고 채워 주기만 해도 어디냐”는 식의 수준에서 소중하다고 그는 간곡히 말한다.
시설물 이전을 위해 부지를 보러다니면서도 식구들에게 가장 쾌적한 환경이 될 조건을 갖춘 곳인지를 면밀히 따져 본 일도, 아마도 그가 강의 시간 중에 누누히 강조했을,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 권리, 헌법으로도 보장되어 있는 행복권”의 구현으로 풀어 봄직한 것이다.
십만평쯤이 될 새로운 부지는 선정 단계가 끝나고 매입 직전에 있는 듯했다. 학교 교무위에서 “서건”이 터지고도 엉망으로 일이 꼬인 소쩍새 마을의 원장 소임을 권고받으며, 자신이 맡기는 하겠으되 임기 십 년은 보장해 달라고 했다. 십 년 소신껏 일해서 멋진 결과물로 교단이나 학교에 회향하겠다는 그의 말은 웃음과 박수로써 동의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일은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소쩍새 마을을 법당,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 학교, 재활 농장, 일반인과 스님을 위한 양로원, 직업 재활원, 체육관 따위로 구성되는 종합 복지 마을로 바꾸는 것이다. 내년부터 터갂기 작업을 시작으로 삼천명 식구의 공동 이용의 장이 될 중앙의 센터 건물을 짓고, 법당 및 부대 시설을 지어 식구들이 모두 이사할 수있기까지는 네댓 해쯤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부지 매입이 끝나면 그는 “땅 한평 사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급하게 서둘러 한꺼번에 사들이는 식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으나마 여럿의 마음을 모으는 식이 도게 하려 한다.
그는 사회복지시설 발전의 요소로 네 가지를 꼽는다.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 될 터이고, 그 시설에 후원금을 모아주는 일, 보살심을 내어 자원 봉사의 형태로 도와주는 일, 그리고 네번째가 기도해 주는 일이라 했다.
“우리를 관심있게 지켜봐 주고, 잘 되기를 바라는 염려(기도) 없이는 다른 조건이 아무리 잘 갖춰져도 종내는 무너져 버리고 말아요.”
한 사람의 큰 힘보다는 여럿 모인 작은 마음들이 더욱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이다. 시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곳에 격리되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어야 할 또다른 자신으로 보려는 인식이 소중하다고 그는 간곡히 말한다.

그는 부처님께 기도한다. 소적새 마을을 맡자마자, 그는 지난날 해 오다 슬그머니 그만두었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에 많으면 칠백 번 이상을 외었다.
“아이구, 부처님, 나 좀 살려 주세요.”
스무 해 넘게 해 온 백팔배와 「금강경」독송,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그가 마지막 세번째 이적을 보기까지 계속될 부처님과의 전화 통화선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