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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극적(劇賊)의 활동과 승려세력의 거사계획 - 극적 장 길산(張吉山)의 활동과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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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엮는 한국불교사 - 정석종 1987년 05월 63호
조선 후기 숙종년간이 되면 사회 세력의 동향과 대외 관계의 변화에 따라 당색(黨色)의 집권이 변모하여 간다고 사료된다. 숙종 초기의 남인(南人) 집권에서 경신(庚申) 대출척으로 노론(老論)이 등장하는 정변의 경우를 봐도 그러하다. 중국 청나라에서 이른바 오삼계(吳三桂)난이 일어나서 양자강 이남이 한족(漢族)인 오삼계군에게 장악되고 이때에 조선 정부에서는 백호(白湖)·윤휴(尹鑴)와 같은 인사들에 의하여 북벌(北代)이 주장되기에 이르거니와 청(淸)의 강희제(康熙帝)가 오삼계군을 토벌하여 중원의 재통일이 가까워지는 숙종6년(庚申)이 되면 조선 정부의 군왕은 자신의 군왕권이 청의 비위를 거슬린 북벌론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고 걱정하게 된다. 따라서 조정 내부에서 북벌을 주장한 인사들을 제거함으로써 청측의 우려를 불식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이 때는 또한 자연적인 재해 등으로 백생들의 인심이 이반되고 있었으므로 정권을 담당한 남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청의 환심을 사고 대내적으로는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방편을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노론(老論)이 이후 10년간 정권을 담당한다.
숙종6년(1689)이 되면 비대하여진 신권(臣權)의 견제를 위하여 기사(己巳) 환국이 이루어지거니와 이것은 당색간(薰色間)의 반목을 이용하여 군왕이 왕권을 강화한 경우가 되겠다. 그러나 이 때에도 소농과 작인이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양주(揚州)의 미륵 신앙 사건(彌勒信仰事件)이 정권 교체의 계기였다고 보인다. 대지주의 권익을 옹호한다고 생각되는 노론(老論)에 대신해서 중소 지주와 소농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남인(南人)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 환국은 왕자를 낳은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폐서인 된 민비(閔姐)를 대신해서 왕비가 되는 왕비 교체가 정권의 교체와 궤를 같이 하거니와 희빈 장씨의 친족이 돈많은 역관(譯官)이라는 사실로 해서 그녀가 정비가 된 것이라 생각된다. 군왕의 입장에서 보면 장희빈을 정빈으로 발탁함은 역관 세력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이점이 생긴 것이다. 역관들은 정치 자금도 풍부했을 뿐더러 대외 관계에서도 군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여 줄 수 있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역관들은 대일·대청 무역의 중계 무역으로 큰 부를 누릴 수 있었으며 중인 세력으로 정치 무대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생각된다. 그것은 연암 박 지원의 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서울 최대의 갑부 변 승업(卞承業)으로 확인되거니와 그는 왜역(倭譯)하던 실제 인물임이 실록에 나온다. (숙종 실록 권 30. 숙종 15년 己巳 윤 3월 戊成조)
숙종 20년(1694)에는 이른바 갑술환국(甲成換局)이 이루어져 남인에 대신하여 소론(少論)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거니와 이 때에도 역관이 중심이 되는 중인층의 거대한 정치자금이 환국(換局 : 일종의 정권 교체)을 가능케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때에 소론 측은 해도중의 도적 세력인 정진인(鄭眞人)을 한성 내의 서인(西人) 가노(家奴)를 동원하여 영입하려는 계획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정변들은 거개가 사회 세력의 움직임과 대외 관계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숙종23년(1697)의 승려세력의 거사 계획도 저같은 정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실세의 남인이 승려, 극적, 서류층과 제휴한 사건이다.
계속되는 정변과 자연적인 재해는 백성들의 생활을 계속 곤궁케 하고 있었으며 자연히 전국적으로 도적이 치성토록하였다. 자연적인 재해를 보면 숙종 21년부터 25년까지는 매년 흉년이 들었다. 숙종 21년의 흉년에는 진휼청(賑恤廳)의 계사(啓辭)에 따라 버려진 아이를 노비로 삼을 수 있는 유기아수양법(遺棄兒收養法)이 반포되었으며 숙종22년에는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기에 이르고, 숙종 23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으로까지 가고 있었다. 실록에는 ‘용천부(龍川府)의 양녀(良女)인 금춘(今春)과 예합(禮合) 등이 동리의 양녀(良女)인 기생(己生)을 눌러죽여 그 고기를 먹었다’ (숙종실록 권 31. 숙종23 己丑 4월戊寅조)라고 했고, ‘도성 내에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다’고도 묘사되어 있다.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는 기민 형제가 서로 잡아 먹은 사건이 생겨났다. 숙종 24년에는 ‘근래에 치도(治盜)가 엄하지 않아서 투도(偸盜)의 근심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심지어는 시체의 옷도 벗겨가고 임시 매장한 것도 모두 파혜쳐서 그것을 매매하는 것이 자약(自若)하기가 거의 꺼리는 바가 없으며 포도청에서도 심상히 두어 둔다’(숙종실록 권 32. 24년 12월 경술 조)는 것이었다.
숙종 19년부터 25년까지의 6년 동안에 140여만의 인구가 통계상으로 줄어들고 있거니와 이로 보더라도 얼마나 격심한 자연적인 재해가 휩쓸고 있었나를 짐작케 한다 따라서 도적이 들끓을 수 밖에 없었다.
‘중외(中外)의 도적이 치성(熾盛)하니 청컨대 토포사(討捕使)를 죽산(竹山)에 가설하고 강원도 토포사도 도신(道臣)에게 물어서, 일처(一處)를 더 두도록 하십시오.’
숙종 21년에 좌의정 유 상운(柳尙運)은 이같은 계청(啓請)을 올리고 있으니, 이에 따라 토포사가 더 많이 배치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총포를 방포하는 명화적이 강원도 철원에 나타나고 있다. 이들 도적은 관에 고하는 자를 독하게 도륙(屠戮)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관에 고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도적은 오히려 토포관(討捕官)까지 살해하고 있었다.
숙종 22년에 들어와서도 흉년은 계속되고 도적은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요사이는 절발(竊發 : 도적)의 근심이 없는 곳이 없어서 행려(行旅)가 거의 단절케 되었다’ 는 것이며, ‘군읍(郡邑)에서 도겁(盜劫) 때문에 장계로 보고하는 것이 송정원에 매일 쌓인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거개가 유리걸식하는 유민이 모여서 도객이 되는 경우이다.
진위(振威), 천안(天安) 퉁이 도적이 많지만 양주(揚州)가 도적이 더욱 심하였다. 또 육지에서만 도적이 들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도 도적은 출몰하고 있었다. 경기 수사(水使) 민섬(閔暹)의 요청으로 교동(喬桐 : 강화도부근)에도 별도로 독진토포사(獨鎭討捕使)를 두게 되었다.
이때에는 이미 극적(劇賊) 장길산(張吉山)이 십여년간 활동하고 있던 때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군왕의 비망기(備亡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극적 장 길산은 표한무비(標悍無比)해서 제도(諸道)를 왕래하는데 종적을 헤아릴 수 없고 도당이 이같이 번성하여 1년, 2년, 이미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요사이 양덕(陽德)으로부터 군사를 풀어 위포(圍捕)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그 음흉한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이제 영창(榮昌)이 승복(承服)한 초사(招辭 : 공초 기록)를 보니 더욱 극히 통완(痛惋)하마 비록 그 말을 준신(准信)키는 어려우나 이 적(賊)이 나타나기 전에는 나의 과려(過慮)가 보통이 넘어 풀리지 않을 것이니 불가불 제도에 밀칙(密勅)하여 소재(所在)를 상세히 탐지하고, 따로이 군대를 풀어 초포(勦捕)하여 후환을 제거하라.’ (숙종실록 권31. 23년 정월 임술)
숙종 18년(壬申)에 양덕(陽德)에 숨은 장 길산의 체포를 관에서 시행하였으나 그가 잡히지 않고 있었음이 위 비망록에도 확인되거니와 1년, 2년, 10년이 지났는데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기록에서 이미 숙종 13년경부터 그의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음이 증명된다. 그는 제도를 왕래하면서 종적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숙종 21년 10월에 깃발을 앞세우고 총포를 발포하는 철원에서의 도적도 그의 부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당시 자기의 존재를 깃발로 알리는 도적은 그의 부대말고는 없었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장 길산에 대한보다 종합적인 기록은 성호(星湖)의 성호새설(星湖塞說) 인사문(人事門) 임꺽정(林巨正)조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사료된다. 소개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숙종때에 힐적(黠賊) 장 길산이 해서도중(海西道中:황해도 중)에서 출몰하였다. 길산(吉山)은 본래 창우(倡優:광대)로서 곤두박질을 잘 하고 용맹하고 경첩한 것이 보통을 넘어 드디어 와주(窩主)가 되었다. 조정에서 이를 걱정하여 신엽(申燁)을 감사(藍司)로 삼아 수포(搜捕)케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뒤에 그 도당을 잡았는데 그가 숨은 곳을 고하였다.
무사(武士) 최 형기(崔衝基)가 가서 잡는 데에 응모하여 파주(城州)에 이르니 상고(商賈) 수십명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말은 모두 건장한 암컷이었다. 그 고자(告者)가 말하기를 “적의 말은 모두 암컷이므로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제도의 군사를 풀어 각기 요로를 지켰다. 밤을 타서 쳐들어 가니 적이 이미 미리 알고 나와 맞아 욕설을 퍼붓다가 모두 도망쳐서 아무 자취도 없었다. 또 병자년(숙종 22.1697 : 성호는 숙종 23년을 22년으로 잘못 알고 있음)에 이르러 역초(逆招 : 역적의 공초)에 이름이 드러났으나 끝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