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선우에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머물고 싶은 경구 - 영덕 1997년 08월 186호
열나흘 달빛을 밟으며 장군평에 나간다. 다리 아래 흐르는 은빛 물살을 지나 하얗고 파란 도라지 밭으로 간다. 아아한 정적이 있고 흘릴 듯 신비스런 달빛이 있다. 영혼이 맑은 소녀 같은 도라지 꽃은 때로는 허리를 잡고 까르르 웃어대지만 때로는 바람 부는 대로 맡긴 채 침묵할 줄도 안다. 물소리에 귀를 씻고 호롱불 하나씩 밝힌 채 우리는 마주앉았고 밤은 깊어만 간다. 용케도 기온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얕은 기침이 지나 간다. 망각의 강을 지나 신라로 돌아가면 검모를 사모하던 연화가 되기도 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던 무월랑이 되기도 하며 한생아니 난 듯 꺾어 쥐고 절벽 끝에 앉은 나한이 되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넘나들며 익힌 중생심이 하루 아침에 불성이 되어 탁자 위에 올라앉을 수 있을까? 바쁜 마음도 내지 않는다. 이 생, 이 자리 한치의 후회도 없다.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부단한 정진이 있을 뿐이다.

너를 향해 다시 펜을 드는 것이 강산이 한번 바뀐 세월이 지났지만 영겁의 그 자리에서 보면 고야시古也是, 금야시今也是일 뿐이다. 다만 풍대風大의 작용으로 꽃이 피었다 지고, 너는 자라 어른이 되었고 나는 하나 둘 주름이 늘어가고 있을 뿐이구나. 서로 함께 하지 못한 지난날을 아쉬워 하지도 말자.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왔고 한순간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놓은 적이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갖은 듯 행복하다.
지난번 의논하고 싶다던 일에 대한 나의 견해는 이렇다. 아무리 지성과 감성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스물아홉의 나이를 지내지 않고 묶는 시집을 나는 거부한다. 스물아홉의 나이는 이십대 전부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비중이 있다. 온전한 자기 의지로 좋든 싫든지 간에 한획을 그어야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획을 긋기까지의 갈등과 번민! 그래서 스물아홉은 아름답다. 너의 이십대 살림을 온전히 묶고 싶다면 스물아홉의 체험을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구나. 저력과 긴 호흡을 위해 먼 길을 돌아 오늘에 이른 것을 알기에 시집을 묶는 일도 그런 자세로 서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씌어진 현학적인 시를 만나는 일은 재미없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삶의 뒤안길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살아 있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글은 매너리즘의 두꺼운 각질을 터트려 줄 수 있는 얼음을 깨는 도끼여야 한다. 선우의 건필을 빈다. 그 일은 그러하고, 좀 아이러니컬 하지만 일곱종류의 아내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싶구나.
부처님 때에 사위성에 수닷타 장자가 옥야라는 며느리를 보았구나. 세상에 비길 데 없는 미인이며 친정의 재력을 믿고 교만한 그녀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교화하셨다.
“비록 그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마음의 덕을 쌓지 않는다면 지금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있으랴! 마음이 얌전하고 행동이 바른 것이 단정함의 근본이다. 이런 단정함은 마음을 한결같이 공손하게 가지는 일에서 비롯된다. 세싱에는 일곱 종류의 아내가 있다. 어머니 같은 아내, , 누이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내, 며느리 같은 아내, 종과 같은 아내, 원수와 같은 아내, 도적과 같은 아내가 그것인데 겸손과 순종으로 정성을 다하여 집안을 화목하게 다스리는 것이 한 집안 지어미의 일이다.” 「옥야경」
이젠 선우가 지어미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스님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가볍게 한숨을 쉬는 너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구나. 아직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면이 다되어 그만 쓴다.

호거산에서 영덕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