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만난 것처럼 다행한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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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샘 - 보광
1997년 08월 186호
보통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천오백사십여년 전에 성불하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부처님의 호를 여래라 붙인 것을 보면 부처님은 과거, 이미 한없는 전생에 성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중생이나 부처님은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본디부터 깨달아 있는 것이지 새로 생긴 깨달음이 아닙니다. 중생이 부처와 다른 점은 무명업장이 눈을 가렸기 때문에 광명을 못보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없애 버리고 눈을 뜰때, 비로소 업장중생과 부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선 수억겁전에 깨달았는데 다만 중생을 교화하려고 이 세상에 방편으로 오신 것 뿐입니다. 과거에 이미 팔천 번이나 부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이 그 분을 뵙지 못한 것은 무명업장이라는 구름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무명업장이 없는 사람은 늘 보름달을 보지만 무명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달은 보지 못하고 구름만 봅니다. 부처님의 출현은 달이 구름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에서 왔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부처님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다시 진리에 합해 버렸기 때문에 가도 간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하나같이 의식주가 넉넉하기를 바라고 남보다 나은 벼슬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충족되면 행복하고 잘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중생을 구제하려 여기부터 맞춰야겠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최상으로 구하는 훌륭한 왕궁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지혜와 복덕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나 왕궁에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조그마한 기도로도 안되고 앉아서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큰복덕을 지은 결과입니다.
바르게 깨달은 것이 부처님의 의미입니다. 근본은 부처와 중생이 같은데 중생은 삿된 삶, 전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 근심걱정, 얽힌 인연을 벗어난 분이고 범부 중생은 늘 인연업보에 끄달려 근심 걱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금생에서도 그렇게 살고 내생에서도 그렇게 살수 없는 범부입니다. 사람이 한번 전도되고 나면 삿되집니다. 삿되지 면 속에서 자꾸 어리석은 생각만 올라오게 마련입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돌이켜 깨닫는 것을 정각이라고 합니다. 범부가 부처되기 쉽다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내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생각은 하지 않고 부처님은 따로 어디에 계시고 우리는 스스로 영원한 범부인 것으로 못을 박아버립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왕궁의 부귀를 누리는 가운데 인간의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하시고 출가를 단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집착하는 부귀영화가 결국 내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방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불자라면 부처님은 어떤 분이고 이 세상에 어떻게 오시어 어떻게 살다가셨는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범부중생이 여러 수만년 지어온 인연업보를 벗어나려면 참으로 각고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됨을 부처님이 육년고행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처님의 출가와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금강경」에 ‘부처님이 우리 부처님 앞에 있는 다섯 연등 부처님에게 법을 받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부처님께서는 ‘나는 다섯부처님에게 법을 받은적도 없거니와 연등 부처님이 나에게 법을 전해 준적도 없다. 다만 연등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전도된 망상을 돌이키고 깨달았을 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은 누구도 붙들래야 붙들수도 없고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누구도 붙들 수도 말릴 수도 없이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한 예순살쯤 되면 재산을 상속하려고 생각합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상속때문에 걱정하다 죽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친자에게 넘어 가게 되어 있는 상속은 하려고 애쓰면서도 싱속하려고 해도 상속할수 없는소중한 것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공수래 공수거라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생전에 지은 업보는 똘똘 뭉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았다, 기도한다, 참회한다는 게 뭡니까.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고 상속할 수도 없는 업을 소멸하려고 하는 것이 기도요 참선이요 염불입니다. 그런데 염불하고 참선하려고 하면 ‘뭐 받을 것이 없는가’ 그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전도요, 망상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부처님은 오직 바른 생각으로 바른 삶을 영위했고 우리는 죄 되는 짓만했기에 동시에 출발했지만 가는 길은 정반해로 간것입니다. 부처님은 생사업을 벗는 길로 가고 우린 생사업을 보태는 길로 간것입니다.
집착은 어리석음만 보태 갈 뿐입니다. 도를 배우는 것은 어리석음을 버려가는 것입니다. 모두 버리면 나를 구속할 것이 없습니다. 사리불존자에게 외도들이 질문했습니다.
“당신들이 도를 닦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열반을 얻기 위함이오?”
“열반이 뭡니까.”
“열반은 한마디로 멸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멸하는 것이오?”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것을 열반이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소멸시킬 수 있습니까.”
“팔정도가 있습니다.”
바른 삶을 살아가면 두려워할 것 없고 근심할것 없습니다. 경우에 막히지 않으면 떳떳하고 당당할수 있습니다.
불자로서 불교에 입문할때 비로소 내가 헛살았고 잘못살았다, 이제 바른 삶을 찾았다, 이제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대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부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평소에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업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부모가 부처라도 안 됩니다. 스스로 지신의 허물을 모르면 팔만대장경도 소용없습니다. 불법 만난 것을 ‘비로소 우리는 영원히 살수 있는 곳을 찾아왔다. 이 이상 다행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사십 년 전, 나이 열일곱에 해인사에 들어오며, ‘아 살았다’ 하는 생각이 쑥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부처님의 제도를 받고 못 받고는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이키고 행동을 돌이키느냐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출현한 적도 열반한 적도 없습니다. 상주불멸로 언제나 부처님은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열심히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