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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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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5월 63호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자는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 지난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마른 구근(球根)을 가진 작은 생명을 길러 주며……
-티 에스 엘리어트의 황무지 중에서

또 한번 계절이 바뀌고 지난 해의 추억과 새봄의 전망 앞에 섰읍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봄은 아름다운 탄식과 셀레임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의 빛으로도 다가왔읍니다. 비어 있는 벅찬 한해 앞에서 새 생명의 환희와 무럭무럭 샘솟는 욕망으로 몸이 자지러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난 겨울의 안락했던 잠과 또 준비를 핑계 대고 취한 휴식이 이제 떨칠 수 없는 익숙한 유혹이 되어 새로운 창조적 삶에의 도전 앞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끝없는 침잠으로 잠기기도 합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하는 탄생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점철로 이어지는 윤회의 과정 속에 있는 우리 삶의 비극성은 태고부터의 중대한 문제였으며, 불교 가르침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삶의 비극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좌절과 죽음의 경험이 단연 그것의 주요한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삶 주변의 모습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철마다 해마다 바뀌어져 갑니다. 인생도 길게 잡아 칠십년이면 생을 마감하며, 그 사이의 성패와 영고성쇠도 무상합니다.
사제님도 동의할 줄 압니다만 나는 윤회라는 것을 비단 어떤 사람이 철십년쯤을 살고는 죽고 그리고는 다시 태어나고 하는 식의(심지어는 개로도 태어나고, 새로도 태어나는), 계속되는 생명의 쳇바퀴 현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염불 구절에도 나오는 바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이 아니겠읍니까? 즉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합니다.
가끔 신도들이 이렇게 묻기도 하지요.

“삶들이 윤회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짐승으로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현대인들에겐 매우 쉽게 다가오지만, 윤회의 문제만큼은 증명이 잘 되지 않아 의문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들을 느끼지만, 이것은 사실 불교의 가르침을 잘못 아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희란 말은 본디 불교의 고유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 이전의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에서부터 진작에 이야기되던 것이었으며, B.C.6세기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상이었습니다. 즉 “생명은 한번 죽음으로써 그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는 재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식량과 일용품의 생산이 부족하고 사회 체제가 불합리하게 짜여져 있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삶이란 괴로움의 나날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삶도 그러하지만 그 어떤 형태의 재생도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았읍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현재의 삶도 되도록 원만히 마감하기를 바랐지만 그와 함께 더이상의 재생도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윤회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모크샤) 사상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해탈은 고행이나 제사, 기도와 같은 특수한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현재의 삶이 피괴고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긴 것은 비단 사회 체제나 생활에서의 불평등과 빈곤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아트만)의 삶은 ‘온전한 전체’의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는 당시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유래하기도 한 것입니다. 창조주이며 가치의 원천인 브라만(梵神, 大我)이 시공(時空) 속에서 미혹(마야)으로 제약된 모습이 개체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개체는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한 제약된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불교 가르침의 출발은 이러한 세계의 본체로서의 ‘브라만(大我)’이든 개아의 주체로서의 ‘아트만(小我)’이든, 이 모두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난 편지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존재의 모습이란 변화와 관계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으로서 주관과 객관의 영역이 서로 교감하면서 동시적으로서로 이루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적이고도 불변하는 실재성(實在性)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에게나 물질에서나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말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관계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존재 양태라는 뜻임을 거듭 강조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주의 본체로서의 신(神)적인 브라만도, 개체적 삶의 동질성을 계속해 가는 ‘나(我)’라는 것도 불교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식의 틀로서 부처님은 삶들의 모습을 새롭게 규명했읍니다. 그것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인 연기(緣起)의 가르침으로, 기존의 윤회 사상을 적극적이면서도 새로운 의미로 수용하는 일이었읍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사람도 그러하지만 현대인들도 깜짝 놀랄 만한 신선한 것이었읍니다. ‘나’라는 주체에 얽매이지 않고도 열린 자세로 자유롭게 변화와 관계로서의 역사를 꾸려 나가는 일, ‘나’ 라는 주체를 숫제 설정하지 않고도 부단한 경험과 실천을 이룰 수 있으며 도덕적인 인과율과 과학적인 인과율에도 부합할 수 있는 삶의 길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인류에게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어 주었읍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윤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된 것만은 아니었읍니다. 일반인들은 제쳐놓더라도 불제자까지도 무상한 현실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나고죽는 일(生死心)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요. 변화와 관계를 주창하는 불교인들이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무언가 이상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변화와 무상에 따르는 괴로움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읍니다. 하나는 존재가 항상 지속되기를 바라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데에 대한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누구나 철이 들면 존재의 변화성에 눈뜨기 때문에 쉽게 극복이 됩니다. 문제는 존재의 변화성을 알고 난 뒤에도 파생되는 괴로움입니다. 이 경우는 존재의 변화을 알긴 하지만 여전히 실재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그 어떤 주체적인 실재가 있어 그것이 변화해 간다고 하는 그릇된 사고 방식에 빠진 경우입니다. 정말 변화와 관계성을 이해한다면 주체적인 실재(我)란 성립하지 않으며 따라서 거기에 부수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깨우침을 상기해 봅시다. 어떤 학인(學人)이 오만한 자세로 혜능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였읍니다.

“그대는 어디서 왔기에 이토록 거만을 떠는가?”
“무상한 현실은 너무 시급합니다. 따라서 나고죽는 삶의 문제가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그대는 어찌 삶이란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음(無生)’을 깨닫지 못하는가?”

실로 천둥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수만번이나 나고죽는 윤회의 과정에 있는 삶이기에 무엇보다 나고(生), 죽는(死) 것에 대해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의 원에서 끝과 시작을 지적할 수 없듯이 십이연기로 설명되는 삶의 연속 과정은 시작도 끝도 없읍니다. 필연적으로 존재는 태어난 적이 없읍니다. 이 이치를 아는 일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타는 불꽃과 같이, 남(生)이 없는 존재의 모습은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연속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체가 없다 하여 인과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이름과 모습은 경험과 실천의 결과로 다른 때에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마치 벼의 씨앗이 비와 햇볕과 물로 인해 싹으로, 꽃으로, 열매로 되면서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지만 일정한 인과의 동질성을 갖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물론 불교에서도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든다’, ‘해탈한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저 흰두이즘이 말하는 ‘윤회(변화) 현상을 종식시킨다’, ‘고요와 죽음의 세계에 든다’는 따위와는 같지 않습니다. 한때는 불교인들도 열반이나 해탈을 번뇌와 욕망, 또는 경험과 실천을 없애는 일이라 생각한 적도 있읍니다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된 경우이지요. 올바른 것은 결코 외적 현상을 종식시키거나 축소시키는 일도 아니고 경험과 실천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며, 다만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한 ‘나’라는 실재 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입니다. ‘나’로부터 해방되면 우리는 윤회의 실상 그대로를 온전하게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로 수용할 수 있읍니다. 불교에서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번뇌는 바로 ‘나’라는 실재 의식을 말합니다.
외적 현상, 곧, 각종 행위나 심리 상태를 종식시키고 축소시키는 일이 수행의 핵심이라고 잘못 믿었던 선사가 비로소 해탈의 깨달음을 얻고는 고백했읍니다.

지난 날의 가난은 참다운 가난이 아니고
오늘의 가난이야말로 진짜 가난일세.
지난 날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하려 했지만
오늘은 비로소 송곳 그것을 내던졌으니.

사제님, 이 봄을 온통 붉게 물들였던 진달래는 차라리 해탈과 열반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뜨거운 윤회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윤회 이야기는 불교인들이 평소 갖고 있던 부정적인 윤회관을 버리고 또 역사를 정체시키거나 포기하도록 하는 온갖 것들을 떨쳐 버리고서, 창조적인 의지로서 역사의 변화를 통찰, 활용하는 대승의 보살 삶을 살기 위한 다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