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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의 역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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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석용 1987년 05월 63호
유사 이래로 인간의 역사를 형성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가 발견한 세계의 법칙을 우리는 철학(哲學) 또는 철리(哲理)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역사를 지배, 유지해 온 명제는 바로 ‘힘’이라고 하겠다. ‘힘’이 다양한 형태를 지니는 까닭은 그 자신이 저변에 다양성을 깔고서 그것에 편승하는 자의 지배 욕망의 척도에 따라 불가측의 변모를 행하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지루한 현학적 논리나 거추장스러운 언어 수식을 경멸하는 정열의 호걸에게는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검’으로 표현되기도하고,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뜨거운 가슴 속의 열정을 그려내는 미사여구와 문필가에게는 문맹의 어두움을 깨고 앎의 기쁨을 전달하는 ‘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힘’은 이렇듯 포용하는 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규정해 나간다.
글과 검, 이들은 각각의 극단성, 다시 말하면 형태에서나 성격에서나 서로 결탁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깊이 밀착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저마다 순수하게 제 영역을 가져야 할 이들의 결탁이야말로 인간의 기나긴 역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어둠의 요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어둠 속에서, 폭력과 지성의 두 개념 사이를 헤매는 야누스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러한 모순은 아직 인간이 완전한 개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신의 완전함에 의해 만들어진 불후의 실패작이라는 사실을, 또 신에게는 인간의 역사를 획일화시킬 권능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순수 열정의 신의 의지는 돌이킬 수 없는 원죄의 피조물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혜와 자비를 사랑하는 신의 정열과 폭력과 갈등을 흠모하는 피조물의 떨쳐 버릴 수 없는 모순이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해서 스스로의 역사를 매도해 왔는지는 최고의 관념이며 이 인간을 창조하기까지 한 신에게도 참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단순히 신의 피조물이라면 인간에겐 역사를 매도할 더러움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세계화되면서 우리의 성적 자유를 유린해 버린 괴병이 있다. 공식적인 이름으로는 AIDS (후천성면역 결핍증)가 그것이다. 어떤 코메디언의 말처럼 매우 지저분한 병임에 틀림없다.
일본 우에노(上野降司) 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AIDS의 정체 모를 바이러스는 ‘프로스타글랜딘’으로 밝혀졌다. ‘프로스타글랜딘’은 본래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체였다. 즉, 프로스타글랜딘은 남자가 정액을 배출할 때, 여자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 정자를 보호하는 생체 보존의 천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본성의 프로스타글랜딘이 항문 성교를 통해 인체의 직장에 들어가면, 오히려 인체의 면역 기능을 크게 저하시키는 면역 기능 파괴의 악마로 변신하게 된다. 결국 AIDS는 자연의 정상적인 질서를 어긴 호모섹스의 인간에게 인간 스스로가 내린 치명적인 자연의 보복이라고할 수 있다. 정말 양심이 뜨끔한 보고였다.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프로스타글랜딘, 주체자의 행위 여하에 따라 무서운 탈바꿈을 하는 이 바이러스를 보면서 우리는 역사의 주체에 대한 정의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모든 중생이 일심법계(一心法界)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생의 마음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실상을 여실히 파악하는, 탐진치 삼독이 없는 절대 평정의 상태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생사의 윤회에 얽혀들어 온갖 고통을 받고 삼독 번뇌로 인해 계속 죄업을 짓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장(如來藏)은 어떤 특정의 성질로만 구성된 것이 아닌, 깨끗함과 더러움이, 다시 말하면 부처의 청정과 중생의 탐욕이 혼합된 것이다.
천태(天台)대사는 이러한 불교의 세계 · 인간관을 총괄하여 중생의 한 마음 속에 부처와 보살은 물론 축생과 지옥까지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을 제창하였다. 결국 역사의 주체인 중생은, 원죄로서 획일화된 수동적 피조물이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무능력의 추악한 유기체가 아닌, 비록 현실적으로는 약간의 모순을 간직하고 있지만 건전한 삶을 통해 그러한 모순들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체적 ·능동적 삶의 구현체인 중생의 삶의 현장으로서의 역사가 거짓과 야만이 결탁한 불합리의 사회로 전락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국수주의와 제국주의의 망령으로 세계 2차 대전을 발발시켜, 끝내는 동서 분단의 고착과 점령군의 전략 기지로 파멸한 독일과 일본, 자기의 종교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망상하에 자비와 사랑대신 역겨운 피비린내를 요구한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종교 국가들의 생명에 대한 경시, 차별, 그리고 잘못된 ‘하나’의 관념은, 폭력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야합은, 그것이 보다 진보적으로 보다 평화적으로 발전·승화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쟁과 혼란의 역사를 거듭하게 하였다 생체 보존의 ‘프로스타글랜딘’이 천형(天形)의 악마로 변신하듯이, 심진여의 부처가 심생멸의 중생으로 전락하듯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잘못된 하나의 관념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체성과 창의성을 말살해 왔다. 일제하의 획일화된 일본식 교육과 문화가 그러하였고, 지유당의 부정과 폭력이 그러하였으며, 공화당의 유신체제가 그러하였다. 대학강단에 선 교수가 일제·미군정·자유당·민주당·공화당의 탄압과 굴종과 폭력과 시비와 부정이 하나로서 일관된 다섯 시대를 살아 온 반면, 강의실의 학생들은 오직 한 대통령의 초상화 밑에서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진학해 온, 문자 그대로 오직 박대통령만을 위대한 영도자로 알고 살아 온, 한국적 민주주의가 우리에겐 가장 적합한 민주주의 형태라고 믿어 온, 안보야말로 침범할 수없는 우리의 현실적 과제이고, 통일이란 아주 요원한 미래의 환상이라고 느껴온 ‘박정희 시대의 아이들’이었다.
정말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국주의와 독재 권력의 혈맹(血盟)에 의해 무참하게 일관되어 온 굴종의 역사였다. 우리는 우리의 숨통을 죄어가는 크나큰 혈맹의 손아귀에 허덕이면서도 이러한 잘못된 문제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통을 숭상하는 우리의 민족성에 있는 양차마 심한 말을 못하고 관용을 베풀 줄만 아는 우리의 소박성에 위안받아 왔다. 그리고 혈맹의 우상은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그들의 아성은 도저히 넘어뜨릴 수 없는 철의 장벽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민족을 배반하고 민족의 전통을 경멸한 월남의 디엠은 결국 자기의 후원자에 의해 무참히 사살되었고, 국가와 민중이 자기의 부속물인 것처럼 기고만장하던 필리핀의 마르코스도 이멜다궁의 깊은 침실에서 쫓겨나 망국의 설움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63년 10월 선거를 통해 제3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 허물어져 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72년 10월 제2쿠테타로 유신통치를 감행한 박 정희도 결국은 79년 10월 가장 믿었던 김 재규의 냉정한 총성에 의해 18년의 집권을 끝마쳐야 했다.
이처럼 민중의 역사는, 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비굴하지 않는 민중의 역사는, 산천을 뒤덮은 혹한의 대지를 뚫고 찬란한, 그러면서도 결코 거만하지 않은 생명을 가꿔 나간다.

87년 3월 3일, 삼일만세의 함성소리가 페퍼포그의 발사음에 채 가리기도 전에,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과 굴종된 역사에 대한 반성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갈망하는 불자의 합성이 또다시 독재 권력의 막강한 통제력의 한계 수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를 동경하며 이성을 꿈꾸었던 민중의 숨통을 ‘탁’ 하고 쳐 끊어 버리는 불륜의 권력 앞에, 분통과 역겨움의 권리 앞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모순의 현실 앞에 적나라하게 내팽개쳐진 불성(佛性)을 회복하기 위해 마침내 자비의 깃발은 높이 들린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진정한 자비는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다(眞慈非無力)’ 란 말씀이 있다. 이것은 왜곡된 오늘의 현실을 초세간적 시각과 방관자적 자세로 외면하지 말라는 성현의 간곡한 당부이기도 하다. 자연은 결코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도전도 불사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일방 통행적 독선을 경고하는 자연의 지혜이기도 하다. 현실과 미래를 살며 자연의 생명을 한껏 들여마시는 민중의 숨통을 끊는 불륜의 권력에 대해, 민중은 고난과 억압 속에서도 하나됨의 연기 법칙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 그리고 존귀한 생명마저 매도하는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이러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 마침내 수탈과 기만을 생명으로 삼는 제국주의로 하여금 북한과의 문호를 개방하게 하였고, 우리의 뇌리에서조차 잊혀진 민족통일의 문제를 다시금 되살아나게 하였다. 통일, 그 얼마나 가슴벅찬 이름인가? 찢겨진 우리의 산하에서 히노마루와 붉은기 그리고 성조기가 그들의 야만과 무지와 가난을 안고 사라지게 하는 ‘힘’, 민족의 숨통을 가로지르는 고문의 철조망을 걷어 치우는 ‘힘’, 그 힘이 바로 통일이다. 통일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요 정신이다. 통일이야말로 우리의 삶이고 행복이다. 비록 이마엔 땀이 흐르고 손엔 가시가 박힐지라도 한민족의 거대한 호흡을 장애하는 분단의 철조망이 없어지는 그 날, 하나임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칠혹의 어둠을 지새어 온 그 날, 그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