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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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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성동 1987년 05월 63호
도구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노동을 시작하였다. 인간이 맨 처음 사용했던 도구는 나무막대기와 돌멩이일 터인데 이것들을 이용해서 먹을 것을 얻게 되면서 인간은 마침내 인간으로서 지구 위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역사는 바로 인간의 역사며 인간이 노동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는 첫째가는 본질적인 특징이 된다. 꿀벌이 집을 짓고 개미가 먹이를 물어나르듯이 다른 동물들도 물론 노동을 한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단지 본능에 따른 행동으로 노동을 하는데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행동을 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그 결과를 미리 따져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조건으로 된다. 상상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움이될 터인 바 이 그리움이라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완성을 향하여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총화인 것이다. 이른바 진보 의지로서 이 진보 의지에 의하여 인간의 역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성을 향하여 도구를 발전시켜 왔다. 도구가 발전됨에 따라서 생산력이 증대했고 생산력이 증대함에 따라서 인간의 생활은 진보하게 되었다. 역사가 비롯된 이래로 인류는 생산 수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생산 수단이 개선됨으로써 생산이 증대되고 그럼으로 노동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산 수단을 개선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킨 결과 인류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양보다도 많은 물품들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잉여 생산물이다. 잉여 생산물의 창출은 분명히 인류의 생활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서 갖가지의 문화를 창조하게끔 만들었다. 역사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잉여 생산물을 창출하면서부터 우리 인간은 행복해졌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유 재산이 생겨나면서 계급이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의 인류는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분배했다. 이른바 원시 공산 사회다. 그랬던 것이 생산 수단이 개선되어 생산력이 증대됨으로써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부터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곧 스스로의 노동으로 필요한 생산물을 얻는 집단과 스스로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산물을 약탈해 가는 집단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분배하는 원시 공산 사회의 인류 공동체는 분해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계급의 분화이다.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여 호화롭게 생활하는 지배 계급과 노동력을 수탈당하면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피지배 계급 곧 민중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인류의 역사는 잉여 생산물이 창출되어 계급이 분화되면서부터 끝없는 갈등과 투쟁을 되풀이하여 이십일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순히 막대기와 돌멩이를 도구로 사용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시켰던 원시 시대에서 오늘날에는 단추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컴퓨터 시대가 되었다. 발전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진보의 역사이다. 원시 공동체로부터 최초의 수탈사회인 노예제 사회로, 노예제 사회에서 착취의 형태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 속박 사회인 봉건제 사회로, 봉건제 사회에서 인간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로 끊임없는 진보를 거듭해 온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인민 대중들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이루어진 진보를 과연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운 그가 속한 집단의 성격에 따라서 똑같은 사물과 현상을 놓고서도 전혀 다른 입장을 갖게 된다. 활짝 핀 장미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저것은 나의 주린 창자를 채워 줄 수 없는 단지 한 식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탄식의 한숨을 내쉬는 집단이 있다. 가혹한 일제 식민 체제 아래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한가로운 노래를 부른 시인이 있는가하면 제사에 쓰려고 몰래 술 한 단지를 묻었다가 일제관헌에게 빼앗기고 나서 두 다리 뻗고 앉아 달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린 농민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집의 어린애가 밥을 잘 먹으면 복스럽다고 하고 가난한 집의 어린애가 밥을 잘 먹으면 천하다고 한다. 입장이 다른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그 사고와 감정으로부터 비롯되어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 현상은 본질적으로 보면 모두 경제 곧 생산 관계에 의해서 규명받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입장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의 토대는 경제며 경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입장에서 자유는 불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문화를 어떻게 규정해 왔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이며 종교를 포함한 철학과 사상과 그리고 문학과 예술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를 포함한 모든 문화 행위는 그것이 나타나게 된 지역과 시대와 역사적 조건들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의 각각 다른 형식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라고 갈파한 독일의 한 실천 철학자의 말은 따라서 인류 역사의 정곡을 찌른 것이 된다.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의 편에서 보면 인류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억압과 착취와 수탈과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궁핍의 역사였던 것이다. 억압과 지배의 쇠사슬을 벗어나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피어린 항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지금은 이른바 산업화의 시대이다. 인류가 꾸준히 개선시켜 온 도구 곧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산업화이다. 수공업에서 기계 공업으로, 매뉴팩쳐 생산에서 공장 생산으로 그 생산 양식이 바뀐 산업 혁명으로부터 이백년이 지난 오늘은 더욱 정교하고 대량화된 공장 생산이 그 절정에 달한 시대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우주 개발에 눈을 돌릴 만큼 산업화가 그 절정에 달한 반면 후진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산업화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것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재편성을 꾀하고있는 종주국의 강요에 의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간의 갈등의 산물인 핵전쟁의 공포와 미국과 일본의 공해 산업을 떠맡아 들여옴으로써 일어나게 된 공해 문제, 인구 폭발, 식량위기, 에너지의 고갈, 썩어가는 산천과 중금속으로 오염된 농축수산물과 식품 등 온갖 문제가 우리의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 일천 기의 핵탄두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에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사키기 위하여 북한을 향하여 핵을 발사할 것이라고 미국의 한 관리는 공언하고 있다. 이념의 차이를 떠나서 민족 절멸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노동자는 산업 혁명으로부터 비롯된 개념이다. 재래식 도구로 만든 가내 수공업 제품으로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오는 제품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최신의 우수한 생산 도구를 확보하고 있는 자본가들의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한개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된다. 그 가격은 자본가가 다른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에 따라서 결정된다. 임금으로서 이 임금은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존속시키기 위한 비용 곧 노동자까 자기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된다. 그러나 고도의 산업 사회가 진행되면서 기계는 점점 발달하고 합리적 경영이 추구되며 인구 폭발로 인한 산업 예비군이 증가하여 노동의 기회를 얻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싼값으로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의 모든 의사 표현 수단은 봉쇄되고 단결권은 차단된다.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국가 권력이고 국가 권력은 또 선진 자본주의 곧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변한다. 뒤집어 말하면 종속이고 예속이며 제국주의의 꼭각시인 것이 국가 권력이다. 여기서의 국가 권력은 민중의 생존권과 인권을 짓밟으며 제국주의와 자본가의 이익만을 지켜 주는 이른바 팟쇼 정권을 말한다.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서 대규모의 생산력을 위한 자본은 특정한 자본가들의 손에 집중된다. 자본의 독점이다. 독점 자본은 생산원가를 낮춤으로써 이익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하여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 노동 시간은 늘어나는데 수입은 줄어드는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독점 자본은 또 노동자에게 줘야 할 정당한 임금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가격과 유통 구조를 독점하여 일반의 소비 대중을 수탈한다. 이중의 수탈이다. 독점 자본은 또 팟쇼 정권의 힘과 합쳐져서 자본주의 종주국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데 이것을 일러 이른바 국가 독점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국가 독점 자본주의 아래서도 생산력은 증대된다. 그런데 그렇게 증대된 생산력의 결과로 얻어진 생산물이 특정한 독점 자본가와 독점 자본가를 받쳐 주고 있는, 한줌도 못되는 특권 계급의 손으로만 들어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피땀 흘려 일한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데 놀고 먹는 사람들은 배부른 것이다.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이 중층적으로 뒤얽혀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제도와 해탈을 이 땅의 구체적 현실 문제에서 구하지 않고 피안의 정토에 현실적 고통을 위탁해 버림으로써 지배자의 논리에 귀순해 버렸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할 것인가? 썩고 병든 세상이 소멸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중생들은 목을 늘여 고대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