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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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김성동
1989년 02월 84호
집으로 가는 큰길까지 나왔을 때 소년은 잠깐 어디로 갈것인가 하고 망설였다. 오른쪽으로 곧장 가면 거대한 제사 공장이 나오고, 제사공장을 지나 인동 사거리를 건너면 한밭역전이 나오고, 한밭역전에서 도청까지 일자로 곧장 뚫린 큰길을 따라가다가 도청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가면 호수돈 여학교가 나오는데, 그 밑이 소년의 집이었다. 아니면 제사 공장 반대편의 사잇길로 빠져 뚝방길을 따라가다가 몇 해 전에 놓였다는 중교다리를 건너 한밭 제일 중고둥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도청 옆길로 빠져 충혼탑이 서 있는 언덕을 넘어가면 소년의 집이었다.
소년은 두번째의 길을 좋아하였다. 첫번째 길은 한밭 시내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여서 처음 안식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그 길로 학교를 오가면서 각종 건물이며 자동차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이내 싫증이 왔다. 두번째의 길은 번듯한 건물도 별로 없고 지나가는 자동차며 사람들도 많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조용하였다. 천천히 뚝방길을 걸어가며 영어 단어를 외울 때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뚝방길로 접어들었을 때 소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뚝방길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막힌 데 없이 일자로 쭉 뻗어 있었고 길 위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길을 걸어가며 외울 단어장어 없는 것이었다. 새로 나온 단어장을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은 돌아섰다、 그리고 집과는 반대쪽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뫼안이라구 네가 댕기는 핵교에서 금산쪽으루 곧장 가다보면 있느니라.”
활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이다
“뫼안이라는 한촌 위쪽 골짜긴데, 후유. 수천수백구의 시신들이 육탈이 된 채루 철사줄에 꽁꽁 뒷결박을 당한 채루 뒤엉켜 있넌디…어느 것이 애비의 시신인지 찾을 길이 읈구나. 까막까치는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구서 울어쌓넌디 도대처 찾을 수가 읎어.”
샘골을 지나서 가오리까지는 한 두어 마장쯤 되었고 거기까지는 소년이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일학년에 입학을 하고 나서 얼마 안된 체육 시간이었는데 그곳에는 방죽이 있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멱을 감았던 것이다.
소년은 수영을 할 줄 모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국민학교 오학년 때 떠나온 고향마을의 뒤산이 생각나서 자꾸 길위쪽의 산자락만 바라보았다. 방죽을 지나면서부터는 길 왼쪽으로 산자락이 깔려 있었는데 산자락을 따라 올려다보면 저만치 아득하게 먼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식장산이었다. 식장산 줄기가 굽이치며 뻗어내려 오다가 평지를 만들었고 샘골과 가오리를 지나서 굽이돌며 뻗어내려간 신작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소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뫼안이 나오고 그리고는 금산까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방중에서 다시 한 서너 마장쯤 더 내려갔을 때 길 왼편의 산자락 밑으로 마을이 나타났고, 소년은 다리가 아파왔다. 게딱지 같은 초가집 여남은 가구가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산골마을이었는데, 산비탈을 일구어 고추며 오이를 꽂아 놓은 밭뙈기가 조금 보일 뿐인 척박한 마을이었다. 소년은 지게를 받쳐 놓고 꼴을 베고 있는 중년의 사내 옆으로 다가갔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사내는 낫질을 멈추지 않은 채로 고개만 돌려 힐끗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모이안이 워디래유?”
“모이안?”
하면서 사내가 허리를 폈다.
“여기가 모이안인디…모이안은 왜 찾는구?”
“예?여기가 모이안유?”
소년은 한걸음 더 다가서며 다급하게 되물었고 사내가 소년의 아래위를 훓어보았다.
“그렇다니께. 저어기서버터 모이안이라니께. 저어기서부텀 저어기까지가 죄.”
사내는 소년이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심이 되는 듯 고이춤에서 쌈지를 꺼내더니 엽초를 말기 시작하였다.
“츰 보넌 얼굴 같은 디 왜 그러는고?”
“여기가 모이안이란 말씀이지유?”
“그렇다니께 왜 대이구 그레쌓넌구.”
“여기가 증말루 모이안이란 말씀이지유?”
“그렇다니께.”
\"여기가 증말.“
하다가 소년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할아버지한테서 뫼안이라는 말씀만 들었지 뫼안 어디쯤이라는 말씀은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시 육니오 때…”
소년은 마른 침을 삼키었다.
“사람덜이 많이 죽은 디가 워디래유?”
“뭐?”
하면서 사내가 똑바로 소년을 올려다보았고, 소년이 다시 말하였다.
“육니오 때 사람덜이 많이 죽은 디 말유?”
“새꼽빠지게 뭔 소리랴?”
사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워디 사는 뉘집 자식인데 그런 걸 물어?”
“한밭 사넌디유. 한밭 용머리.”
“그런디 왜 그런 걸 묻는고?”
소년은 아랫 입술을 꼭 깨물었다.
“거시기 육니오 때…”
사내가 다시 한 번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사내는 눌러끈 꽁초를 몇 번 불더니 귓등에 꽂았다.
“거시기,”
하고 소년이 입을 여는데 사내가 낫을 쥐고 일어섰다. 사내는 퉤 소리가 나게 침을 뱉아 낫자를 고쳐잡더니 등을 보인 채로 쭈그리고 앉아 베기 시작하였다.
“물러, 난 암것두 물르는 사람여, 암것두 본 게 읎넌 촌 무지렝이라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