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날마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사람 만나는 일만큼이나 피곤하고 두려운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 또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른 사람 마주할 때의 답답함은 서울의 꿈쩍 않는 교통 체증을 연상케 하고, 용골찬 역사 의식을 지닌 사람 앞에 서면 도끼날 아래의 장작처럼 섬찢해합니다. 더구나 겨울날의 노동자를 만날라치면 그가 온통 교회당 종소리, 범종 소리, 쇠망치 소리 되어 나의 생명을 천근 무게로 짓누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만남이 없을진대 나의 삶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할 뿐일 것이며,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 듯합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깨달음도 결국은 만남의 깨달음이라 생각됩니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세계와의 관계, 중생과 부처와의 관계들이 모든 대립과 모순관계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만남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깨달음의 세계이겠지요. 나의 모습 속에 역사가 각인되며, 너의 모습 속에 내가 투영되며, 중생 속에 부처가 살며 부처 속에 중생이 각인되는, 그런 관계의 평등성이 곧 진정한 만남이 아닐런지요. 이런 의미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은 만남의 닫힘이요, 깨달음은 만남의 열림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늘 부딪치는 문제로서, 삶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열린 삶은 무엇이며, 닫힌 삶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삶은 인간과 객관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활동은 단순한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체득하게 하는 구체적 행위 곧 노동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노동의 행위를 통하여 관계 짓는 것을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열린 삶이란 노동이 기쁨을 창출하는 것이요, 닫힌 삶이란 노동이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자의 삶에서는 노동이 스스로의 창조력과 생명력을 확인하고 발전시켜 나아가는 것인 반면에, 후자에서는 먹고 살기 위한 투쟁이나 소비의 노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열린 사회가 되려면 곧 노동이 삶의 기쁨이요 원천이 되려면 먼저 노동에 대한 참된 사회적 가치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노동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노동자는 불안한 삶, 살기 위한 노동, 닫힌 관계의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께서 태어난 형제들끼리도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우애를 깨뜨리는 일을 자주 봅니다. 그것은 경제적 조건 곧 부의 축적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치를 규정짓곤 하는, 우리 사회의 전도된 가치에 기인합니다. 그런 가치의 전도는 k로 삶의 현장성을 결여한 가치관이 팽배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곧, 인간과 외적 조건들과의 관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노동이 현장에서 파악하지 않고, 다만 정신의 고유한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유한 정신적 가치관들은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물질적인 데에 있지 않고 정신적인 데에 있다고 인간의 감성에 호소합니다. 정신적인 것이 근본이라 하면서 물질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나아가 현재에는 고통의 극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정신의 자유를 얻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물질적인 것을 쾌락이요 감각적인 것으로 몰아버리면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이분적(二分的)인 태도는 ‘나’와 ‘우리’,‘개인’과 ‘공동체’를 구분하고 나와 나의 것을 고정화시킵니다. 이 같은 대도는 인간을 공동체로부터 이탈시키며 또한 공동체에로의 의지나 활동을 제약합니다.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파악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요소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신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며 진행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바꾸어 말해, 가시적인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나’라는 말도 ‘모두’와 연결된 객관화된 나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나’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서로 관계된 ‘하나의 세계’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무소유의 개념은, 소유하지 않는다라거나 그 무엇도 갖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관계된 하나의 세계-곧 관계된 공동체-에서의 공유(共有)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곧 나와 우리, 나와 나의 것이 일체화된, 다같이 어우러진 공동체 말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왜 이 세상을 사바세계,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도 매우 유의해야 될 줄로 압니다. 단순히 생노병사의 연속적인 굴레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께서 연기법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 자기 문제에만 집착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닫혀 있은 모습이었을 터이고, 이화 같이 탐진치로 물든 개인적 삶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적 삶의 노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신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인 자유만을 추구하는 관념론에도, 물질적인 대상에만 치우치는 가치관에도 머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 관계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원동력이야말로 삶의 힘과 가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서로의 관계를 열어 주는, 열린 만남을 이룰 때 노동에는 참된 가치가 부여되겠지요.
이 일을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들이 각성하여, 그들이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대우(?)를 받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루 열네 시간을 일하고도 먹고 살기 힘든 노동자가 있는 사회라면 달리 무슨 일이 중요하겠습니까.
스님, 우리가 잘쓰는 용어 중에 ‘법’이라는 말과 ‘중노릇’이란 말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법(法)을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지극히 도가(道家)적인 발상으로 해석합니다. 만일에 법을 물이 흐르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물이 흐르는 것은 바다라는 공동의 터전으로 가기 위함이지요. 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에는 온갖 장애와 막힘이 있지요. 그러나 물은 모든 것을 극복하여 결국 도도히 바다에 이릅니다. 이 바다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여러 형태의 물을 결합하는 힘의 원천은 바로 창조적인 노동에서 비롯됩니다. 이와 같이 창조적 노동은 바다라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우연적이라기보다는 “긍극의 곳”을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계가 평화와 안락의 ‘공동체 마을’을 향해 흘러간다는 믿음을 갖고서 일(노농)하는 중, 일하는 보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떠도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땀내 가득한 모습으로 굳게 서서 오늘의 밭을 일구어야 하겠습니다.
저녁 공양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있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공덕)을 생각하며 스님의 안부를 묻습니다. 오늘 스님의 방문은 열려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