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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타파는 또 다른 우상을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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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89년 02월 84호
우상이란 무엇인가. 나무나 돌, 쇠붙이 따위로 신(神)이나 그와 동등한 개념을 지닌 이를 조성한 것이다. 상정불도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불교의 불상이나 경전, 탑파, 부도라든가 기독교의 십자가 성경, 교회 따위 둥이다. 또한 민속신앙의 성황당과 그곳에 모셔진 신상, 고목, 바위, 남근(男根)동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조형물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겉모양은 갖가지 형태이지만 재료는 모두가 무기물이다. 무기물에는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숭배의 생각을 갖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이러한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되돌아옴이 우상타파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상타파는 조형물의 유무에 관계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조형물을 부수어 버리고 없애 버리고 하는 것만이 우상타파는 아니다.
특히 배타성이 강한 개신교는 불교와 천주교를 한데 묶어서 우상숭배의 종교로 몰아붙이곤 한다. 더우기 우리의 민속신앙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쇠불이 둥 무기물로 이루어진 십자가를 열심히 숭배한다. 또한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성경을 신격화한다. 얼마나 재미있는(?) 모순인가. 성모상이나 불보살상을 우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십자가나 성경을 우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성을 드러내는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상타파 라는 개념을 우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순을 선가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물론 미리 앞당겨 말한다면, 선가의 모순은 기독교의 모순과는 그 맥을 달리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선가에서 우상타파의 예로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단하천연(판露天然)선사와 덕산선감(德山宣鍵) 선사이다. 단하천연 선사의 이야기는 우상타파의 한 예로 전해지며, 덕산선감 선사는 불경까지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분의 일화를 우선 이야기해 보자.
단하천연 선사(739-824)는 석두(石頭)의 법맥을 계승한 고승으로서 태어난 고향이나 본관, 성(姓) 등은 분명하지 않다. 어려서는 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서울에 들어가서 어느 선객의 안내를 받고는 마대사(馬大師)를 참방한다. 그러나 마대사는 단하가 자기보다는 석두희천 선사와 인연이 있음을 깨닫고 석두를 소개한다. 그리하여 단하는 석두의 맥을 잇게 된다. 훗날 그는 강서(江西)에 있는 마대사를 찾는다. 그런데 아직 마대사를 법기도 전에 승당(僧堂)내에 들어가 성승(聖增)의 목을 가로타고 앉는다. 성승이란 문수보살상을 말한다. 그렇게 되고 보니 갑자기 절안이 발각 뒤집히고 급기야는 마대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되었다. 마대사가 승당에 나와서는 단하를 보고 “오! 천연스런 모습이여!” 하고 감탄하였다. 그러자 성승의 목을 타고 앉아 있던 단하가 내려와 예를 올리면서 “법호를 지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호가 되어 천연이 된 것이다.
그런 뒤 어느날 단하천연은 우연히 혜림사를 참배하게 되었다. 밤은 이슥하고 객실은 썰렁하였다. 때가 한겨울인지라 밖에는 모진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뗄감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고 다만 법당에 들어가 보니 불상이 목불이었다. 그는 목불상을 안고 나와 도끼로 잘게 패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잠시 후 인기척에 놀란 원주(院主)가 뛰어나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불상이 산산조각이 나서 불에 타고있지 않은가. 원주가 꾸짖으며 “부처님을 태우면 쓰겠소?”하니 단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리가 나오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오.”
“복불(木佛)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사리가 없다면 이미 부처가 아니니, 좌우보처존마저 가져다 불을 지펴 산부처나 살아야겠군.”
여기에 대한 평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다음에는 덕산선감 선사의 예를 들어 h다
덕산 선감(782-865)은 속성이 주(周)씨로서 용담승신(龍潭崇信)의 법을 이은 고승이다. 늘 「금강경」을 강의하곤 했으므로 ‘주금강’이라 불렀다. 하루는 남방에 일반적으로 선석(禪席)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에 불평을 품은채 「금강경 靑龍疏秒」를 짊어지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떡 파는 노파를 만나 곤역을 치른다. 그러고는 노파의 지시대로 용담의 숭신 선사를 찾아간다. 법당에 이르러 “용담에 대한 얘기는 오래도록 귀 따갑게 들어 왔으나 막상 와 보니 용(龍)도 없거니와 못도 보이지 않는군 그래.”하였다. 그러자 숭신 선사가 나오면서 하는 말이 “자네, 정말로 용담에 왔네.”라고 하였다. 덕산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밤이 이스토록 주객이 마주앉아 도를 논하다가 객실로 돌아오고자 방문을 여니, 때는 바야흐로 그믐이라 칠흑 같이 어두웠다. 마침 숭신 선사가 초에 불을 붙여 주기에 막 받아드는 찰나인데 그가 입으로 훅하고 불어 촛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이 순간 덕산은 활연히 대오(大悟)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지니고 다니던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타들어가는 금강경소초를 바라보며 그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길가에서 떡 파는 노파에게 여지 없이 두둘겨 맞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동안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소초가 한갓 한 점의 불에 여지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그간의 자신의 충분히 돌아보게끔 되는 것이었다.
일화는 이것으로 간단히 줄인다. 그러면, 이제 단하천연과 덕산선사의 이야기 세 토막을 가지고 선가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단하천연이 성승의 목을 가로타고 앉은 것이다 목불을 태운 것은 분명히 우상타파의 한 본보기가 된다. 덕산선감이 경전을 불살라 버린 것도 마찬가지로 우상을 타파한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로부터 불교는 우상숭배의 종교라는 지탄을 받을 때, 단하천연과 덕산선감의 예는 좋은 답변거리가 될 듯 싶다. 아마도 단하천연 선사나 덕산선감 선사는 시대적인 감각이 둔한 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단하다 목불을 태우고 성승의 목을 가로타고 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석두회천 선사가 “그는 장차 부처의 상과 탁자를 모조리 부술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스승인 석두는 장래를 염려했지만 단하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시대 감각이 없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우상타파’가 곧 ‘우상’이 된다. 단하천연의 소불(小佛)행위 따위라든지 덕산선감의 소경(燒經)행위가 후대 학인들의 절대적인 우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우상타파’가 사람들에게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요즈음도 자주빛 가사를 걸친 스님네 중에서 단하천연이나 덕산선감의 행위를 그대로 따르려는 분이 간혹 나타나곤 한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스님은 몇 년 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책들과 소중한 자료들을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에게 필자에게서 빌어간 자료와 귀중한 책들도 몇 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그는 사교입선(捨敎入禪)한다 하고서 선원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그는 내게 보조국사에 대한 자료가 있으면 좀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 나는 급하게 자료를 몇 가지 찾아 보냈다. 그는 그 때 한 철을 선원에서 나고 학문적인 공부를 더하기 위해 대처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무엇하러 고집스레 없애려 하는가. 반드시 눈앞에서 사라져야만 공한 것인가. 덕산선감은 사교입선하기 위해서 반드시 금강경소초를 태워야만 했던가. 단하천연은 마침 추운 겨울이라 언 몸을 녹이고자 해서 목불을 땔감으로 이용했으니 그래도 허물이 적다. 하지만 덕산선감은 무엇하러 부싯돌을 두들겨가며 불을 지폈는가. 그 소초가 그렇게 방해가 되었던가. 후학들에게 남겨 줄 수도 있지 않았을가? 참으로 허물이 크다 하겠다. 그런데도 그의 후예들은 그의 행위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절대시까지 한다. 엄천난 우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그들 두 분만의 허물이랴. 그러한 그분들의 행동, 그 내면에 자리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추종하고 숭배하는 우리에게 더욱 큰 허물이 있다. 단하천연이나 덕산선감은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다. 그들은 ‘우상타파’라는 관념을 갖지 않았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기독교처럼 자기 모순에 빠지는 우(愚)를 갖지는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