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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불교 교섭사(交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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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박용길 1989년 02월 84호
월동 연습
한동안 잘도 온다 싶던 눈이 때아닌 빗물로 질척거리는 한겨울.
겁나게 추울 것 같은 예감온도(據感溫度)에 초가을부터 지레 겁을 먹었던 마음이 요즘은 좀 느긋해진다. 하기야 아직은 대한(大寒) 추위도 동장군으로 버티고 있고, 또 새로운 꽃샘 추위도 호시탐탐 헤픈 바람 구멍을 겨누고 있을 터이지만, 동지섣달 다 가도록 그리 추운 줄 모르고 지낸 걸 생각하면, 그래도 이게 다 알량한 월동 준비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워낙 추위에 약한 아내이기도 하거니와 갓난 심은이도 있고 해서, 이 겨울을 어떻게 날꼬 하며 난생 처음으로 제법 실감나는 살림 걱정을 하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
아내는 먼저 수돗가를 비롯하여 집 뒤꼍 모두를 비닐로 물러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가끔씩 철도 모르고 휘몰아 드는 산골바람은, 그 냉기는 둘째치고라도, 온통 흙먼지로 집안을 들쑤셔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비닐만 두르면 먼지 걱정도 없고, 또 뒤껕이 해바른 양지니까 영락없이 비닐하우스 안처럼 따스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공사에 착수하였다. 행길에서 울 안을 들여다보며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 말대로 ‘퍽이나 곰살맞은’ 나의 솜씨로 공사를 끝낸 것은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내 눈에는, 껍질 벗긴 닥나무 가지 지붕을 언 수돗가가 그래도 제일 멋져 보였다.
연탄은 이미 산더미( ?)처럼 많이 쌓아 놓아 놓았고, 김장독도 아늑한( ?) 응달에 자리를 잡아서 묻어 놓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물이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내내 가뭄이 계속됐던 탓에 간이 상수도는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여서, 겨우내 제법 뚝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걸어다 쓸 생각을 하니 이건 참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큰 돈을 들여 암반수를 끌어올려 먹을 형편은 못 되고… 다른 준비야 이럭저럭 어떻게 해 본다고 하지만, 물 문제만큼은 하늘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비가 날마다 내려 주니 월동 준비는 인천합작(人天合作)으로 썩 훌륭하게 된 셈이긴 하지만, 농사짓는 동네 사람들의 걱정 소리가 또한 예사롭지만은 않다. 사실 겨울이라면 좀 칼칼한 맛이 있어야 하는건데 … 뛰노는 동네 견공(大公)의 발놀림도 눈 위에서만큼 신나지 않아 보인다
스리링카와 버어마
11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고지(高地) 버어마의 페구(Pagu)에는 인도의 뱅갈 지방에서 전래한 것이 틀림없는 딴뜨라불교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몽족의 지배하에 있던 저지(低地) 버어마는 대륙의 상좌부불교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이윽고 11세기 후반에 들어 파간(Pagan)의 야누트드하(Anurudha)왕에 의해 버어마가 통일되면서, 고지 버어마에도 상좌부불교가 소개되기에 이른다. 아누르드하왕의 각별한 후원하에 버어마의 불교가 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구가하고 있을 때, 스리랑카 불교는 계속되는 국가적 위기와 더불어 심각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스리랑카 왕 비자야바후 l세는 아누르드하왕에게 침략자인 폴라국을 몰아내는 데에 필요한 지원과 함께, 자국 승가(僧伽)의 재건을 도와줄 버어마 승려의 파견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11세기 당시에 이들 양국이 정치 문화적으로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사실 양국의 역사 문헌 가운데에서 11세기 이전의 상호 교류에 관한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그 이전에는 이들 양국 사이에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2세기에 들어 스리량카 불교는 마침내 빠라끄라마바후 1세에 의해 승가가 통일, 정비되면서 새로운 발전국면을 맞이하는 한편, 스라랑카에서 수학(修學)을 마치고 돌아간 일단의 버어마 승려들에 의해서 파간에 스리량카 승가가 설립된다. 그뒤 1287년, 징기스칸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 파간은 그야말로 상좌부불교의 정통 법맥이 형형하게 빛나는 버어마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1세기 이래 버어마불교의 발달에 기여한 스리랑카의 공헌은 실로 각별한 데가 있다. 버어마 불교계는 종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항상 스리랑카 교단에 도움을 청했으며, 그들은 스리량카야말로 상좌부불교의 명실상부한 종주국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15세기에 들어 버어마불교는 스리량카에서 돌아온 승려들의 주도로 분열된 승가를 통합하고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한다. 당시 버어마 내의 스리량카 승가는 그곳 왕실의 후원하에 크게 성장하여 많은 버어마 승려들을 배출시켰다. 이에 따라 버어마불교는 자연스럽게 스리랑카 불교의 조직과 제도를 계승하게 되었다. 16, 7세기에 들어서면서 스리량카 불교는 포루투갈의 외침 및 국가의 내분 등으로 또다시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버어마불교는 이를 방관하지 않고 곧 스리랑카의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큰 힘을 보탠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스리랑카에 버어마 승가가 설립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그동안 스리랑카 불교계에 대한 버어마불교의 영향력이 계속 증대되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스리랑카와 태국
크메르(Khmer)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저지(低地) 시암(Siam)의 메남강 유역은 1세기경만 해도 대승불교와 브라흐만교가 우세했다. 이에 반하여 고지 메남강 유역은 몽족의 하리뿐자야(Haripunjaya)왕국 통치 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상좌부불교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실제로 스리랑카와 시암(Siam)이 가까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시암 상좌부불교는 몽족에 크게 의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족이 그들 최초의 독립국가인 수코다야(Sukhodaya)를 중부 시암에 건설한 것은 13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암은 버어마 및 말레이반도의 시리드함마나가라(Siridhammanagara)를 통하여 스리랑카와 접촉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스리랑카와 수코다야 사이의 종교적인 접촉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그 뒤 1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암과 스리랑카 승가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1530년 아유띠아(ayuthia)에 수도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암의 문화는 본격적인 발전기에 접어들게 된다. 불교 역시 가속적으로 발전하였음은 물론이다. 15세기의 시암 역사는, 일단의 시암 승려들이 스리랑카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과 이들이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실, 그리고 시암에 스리랑카 승가가 설립되었다는 일련의 사실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16세기에 들어 시암의 스리랑카 승가는 크게 번성한다. 수코다야의 왕이 이곳 소속의 마하사미(Mahasami) 대사를 라자구루(Rajaguru,王師)로 임명한 것만 보아도 당시 시암 불교곙서 차지하는 스리랑카 승가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유띠아(Ayuthia)는 최초로 서구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이때는 시암의 경제사상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하지만, 시암의 역사문헌 가운데에 이 무려의 불교에 대한 기록은 별로 등장하고 있지 않다. 18세기 는 양국 사이에 새로운 교류의 장이 열린 때이다. 승단의 정화를 꾀하고 있던 스리랑카 왕은 마침내 버어마 승려들의 도움으로 이를 무사히 완수하기에 이른다. 스리랑카에 시야마파(Siyama, 혹은 Siyamopali로도 쓴다)로 불리는, 시암불교 계통의 승가가 설립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이는 시암-스리랑카 불교사에 있어 실로 특기할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수르바야르만 1세 치하에 있던 11세기 무렵의 캄보디아에는 갖가지 종교가 뒤섞여 번성하고 있었다. 시암의 롭부리(Lopburi)에서 발견된 11세기 초의 비문에 의하면 그 가운데에서도 대승불교의 세력이 가장 우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쁘라캄(Phra Khan)에서 발견된 범어(梵語) 비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전지전능하시고 항상 진실한 말씀만을 하시는 오직 한 사람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라는 내용의 싯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롭부리에서 발견된 크메르어 비문은, 당시 그곳에는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상좌부불교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수로 야바르만 1세 자신은 불교도였다. 그의 불명(佛名)이 니르바나빠다(Nirvanapada), 즉 ‘열반에 이른 이’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하지만, 그의 종교 정책은 대단한 관용으로 일관되었다. 앞에서 말한 비문에 의하면, 그는 대승 및 소승의 불교뿐만 아니라, 쉬바교와 비쉬뉴교 등의 제신앙(諸信仰)에 대해서도 항상 공평한 입장에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캄보디아와 스리랑카 사이의 정치 문화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은 12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당시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상좌부불교의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스리랑카의 명성이 드높았던 때였다. 스리랑카 승려들의 여법(如法)한 수행상은 자연적으로 동시대의 모든 불교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아 한 왕자는 불법 수행을 목적으로 직접 스리랑카를 방문하기에 이른다. 13세기가 다 지날 무렵의 캄보디아를 방문한 어떤 중국인은, 당시 그 곳에는 세 가지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것은 대개 브라흐만교와 시바교, 그리고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기초에 제작된 빠알리어 비명(碑銘)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14세기 무렵의 캄보디아에서 상좌부불교도 꽤 번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캄보디아 왕의 사위인 파눔(Fa-Ngum)이 라오스에 랑창왕국을 건설한 것은 1353년의 일이며, 이후 캄보디아는 라오스의 상좌부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17세기의 라오스 문헌에 의하면 ,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공식적인 교류는 14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와 스리랑카 사이의 종교적인 교류는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단의 캄보디아 승려들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구족계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캄보디아 불교계에 오늘날까지 스리랑카의 불교적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7,8세기에 걸쳐 캄보디아와 사암 사이에는 오랜 동안 정치적인 반목이 있기도 했지만, 캄보디아 불교에 대한 시암의 공헌은 실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나아가 캄보디아 불교에 대한 시암의 공헌은 실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나아가 캄보디아와 시암으 도움으로 라오스 불교가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