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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 끝에 만난 부처님 은혜 혜은 / 청도 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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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1년 08월 234호
출가할 용기를 내다니, 참 장하구나.”

공주 읍내 버스정류장에 마중 나온 은사 스님은 믿기지 않는 듯 내 등을 두드리며 흐뭇해하셨다. 마흔네 해 전 그렇게 스님의 뒤를 따라 사십릿길을 걸어 마곡사 은적암으로 들어갔고, 한평생을 산중에서 살았다.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자란 터라 출가로 인해 집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망설인 끝에 들어온 길이었으나, 절집은 내게 아홉 살에 맞은 8·15 광복보다도 더 뜻깊은 ‘해방’ 그것이었다. 아버지에게 무시당한 채 한평생을 산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풀려남이었고, 가족과 불화한 채 지내던 미운 아버지로부터의 떠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가는 내게 독신생활을 위한 선택이었고, 그간의 내 삶에 대한 일대 ‘혁신’이었다.

절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삭발하고 절에 있으니 찾지 말라’는 편지를 아버지 앞으로 보내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절집생활이라는 게 신선같이 사는 줄만 알았는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새로 솜을 넣어 이불까지 해놓고 상좌를 맞이한 은사 스님은 웬일인지 절에 오자마자 태도가 변해 엄하게 나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조석예불 드리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일이었다. 그리고 일 끝에 남는 것은 은사 스님의 꾸지람이었다. 일천구백오십년대 말이었으니, 그 시절 무슨 편리시설이 있었겠는가. 나무로 불 때는 부엌이라 거의 매일 황토를 칠해 검게 그을린 부뚜막을 말끔히 해놓아야 했고, 솜바지 저고리를 빨고 손질해야 했다. 대중스님들 예닐곱 분에 행자가 둘이었으니, 눈코뜰 새가 없었다. 빨래를 손질하다가 손등이 터져 피가 옷에 묻어 다시 해야했고, 곱게 풀 먹여 다림질한 옷을 다시 빨라고 물 속에 집어넣는 은사 스님의 꾸중만 있을 뿐이었다.

행자시절엔 참을 인忍자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끝없는 하심下心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이렇듯 평생을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수시로 고개를 들곤 했다. 훗날, 은사 스님께서 입적하기 직전에 나는 웃으며 ‘왜 그렇게 시집살이를 시켰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네 아만통이 세어 보여 일부러 그랬지’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하긴, 하루 종일 말없이 지내는 행자의 스물세 해 동안 키워온 아만심을 그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었겠는가.

나중에 ‘내 상좌들은 시집살이 시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상좌들 말이 내 시집살이가 세었단다. 아마도 그 시절 시집살이 같았으면 요즘 출가할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절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하련河蓮 스님을 은사로, 일현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으나 세 해 동안을 은사 스님 곁에 머물며 시봉을 했으니 세 해 동안 행자로 산 셈이다.

호된 시집살이 탓에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은사 스님께서는 한 해쯤 지나니 부드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차츰 스님과 깊은 정이 들었고 ‘출가하길 정말 잘했구나’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은사 스님의 참선 정진하는 모습이었다. 스님의 나이 마흔 안팎이었는데, 인법당의 뒷문 하나만 남겨놓고 모든 문을 막은 채 참선에 몰입해 있던 스님의 모습은 눈부셨고, 내 눈엔 부처님 바로 그것이었다. 일에 파묻혀 지내다가도 틈만 나면 큰방과 통해 있는 지대방의 문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며 신심을 키웠다. 참선의 원리를 몰랐으나, ‘바로 저 공부구나’ 하는 깨침이 마음속 깊이 물결쳐왔고, 저리 공부 열심히 하시니 공양 맛있게 지어올려야지 하는 마음이 우러나왔다. 그리고 한평생 선객으로 일관한 스승을 좇아 나 또한 평생 마음공부 하나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 문구멍으로 들여다본, 적정에 들었던 스승의 강렬한 그 모습 때문이었다.

공부할 시간이라곤 저녁공양 후 염불 익히는 시간밖에 없던 시절, 찬간에 염불문을 써서 붙여놓고 오며가며 익혔다. 어느 날 쇳송을 하는데, 은사 스님께서 염불에 오자가 많다고 나무라셨다. 은사 스님께서 주신 《석문의범》을 보니 틀린 데가 여럿 아닌가. 다른 암자에 사는 스님이 가져다준 노트를 보고 외웠는데, 그게 그만 오자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간 외웠던 것을 다 버리고 새로 익혔는데, 그 때 얼마나 열심히 도량석이며 쇳송을 정성으로 외웠던지 지금도 염불할 때면, 그 시절 익힌 것이 술술 풀려나오곤 한다.

그 시절 은사 스님은 늘 그러셨다. ‘하루하루 복 짓고 살아야지 복 감하면 안 된다. 젊어서부터 부처님 시봉 잘하고 대중스님들 시봉하여 복을 지어 놓아야 나중에 공부하는 데 장애가 없다.’ 그 땐 일에 치여 그런 말씀을 새길 겨를도 없었으나 훗날 생각하니, 얼마나 기막힌 말씀이었나 싶다.

‘음식물 낭비가 가장 복 감하는 것’이라 하시어 먹거리는 또 얼마나 알뜰히 하였던가. 음식물 찌꺼기는 꼭 헌식돌 위에 올려놓아 까마귀나 까치들이 먹게 했으며,반찬 그릇 씻은 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밭도랑 옆에 구멍을 파서 거름이 되게 했다.

행자시절이란 훗날 내 공부를 하기 위한 복을 쌓는 세월이며, 세속에서 익힌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 그 자체마저도 버려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저 옛날 행자시절, 나는 스승의 공부를 보며 초발심을 내었고 신심을 키웠으며 많은 것을 버렸다. 그러나, 단 하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버리지 못한 채 행자시절을 보냈다. 출가한 지 다섯 해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는데, 사진을 찾기 위해 열어본 아버지의 가방 속엔 내가 은적암에서 보낸 편지 두 통이 들어 있었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내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 폭포수 흐르듯 흘렀다. 원망으로 꼭꼭 박아 쓴 내 편지를 지니고 다닌 아버지에 대한 때 늦은 회한으로 경을 한 줄도 읽어드리지 못한 채 울었었다.

들꽃 한 송이에도 만 가지 인연이 숨어 있거늘, 세상사 모든 게 인연법이요 인과법 아니던가.

내게 한평생 은혜로운 인연이 또 있으니 운문사의 명성 스님이시다. 스물일곱일 때 스님을 청룡사에서 뵙고 치문과 사집을 배웠다. 시간을 금쪽같이 아껴 쓰며 정진하던 스님의 모습은 내 출가수행의 길에 두고두고 귀감이 되었다. 사집을 마치고 《능엄경》을 보다가 선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급해서 청룡사를 떠났는데, 그 때 경을 좀더 볼걸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때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져 사리암 원주를 거쳐 지금 운문사 살림을 맡고 있으니, 학장 스님은 내게 은사 스님 다음으로 소중한 인연이요 선지식으로 남아 있는 분이다.

몇 해 전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나를 위해 큰 손주상좌가 사리암에서 기도에 들어갔더란다. 한 번 절하고 ‘우리 노스님 하루 연장’, 또 한 번 절하고 ‘우리 노스님 하루 연장’, 하루 일종식 하고 세 시간 잠자며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저 행자시절 호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했더라면, 오늘 이렇듯 수행자의 청복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삭발염의한 채 걷는 출가의 길이 먹고 입는 것을 위한 방편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처 되는 길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 그런 원願 하나 품은 채 가다보면 이 생에 성취되지 못하더라도 그 인연 남아 내생에 또 닦지 않겠는가. 후회스럽게 살았다면 후학들에게 이 길을 권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