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지. 그리고 제자에게 말했단다. 이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정성을 들여 물을 주도록 하여라….”1995년 겨울이었을 겁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만난 것은. 영화가 시작되고, 소문을 쫓아 만원사례를 이룬 극장 안은 훈훈했고, 지루하고 느린 롱테이크의 스크린 앞에서 관객들이 끄덕끄덕 졸기 시작할 때 나 역시 드문드문 졸았더랬습니다. 맙소사, 그토록 고대하던 영화 앞에서 졸다니요. 굳이 포장하자면, 정밀한 롱테이크의 화면 저 안쪽으로 펼쳐진 몽롱한 의식의 소롯길을 산보한 셈이라고 할까요. 하나의 시퀀스에 내재된 시간의 압박감을 나는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내 의식은 현실과 환幻 사이를 오가고 어느 순간 그가, 타르코프스키가 나를 쳤습니다.
그가 나를 쳤다, 그 들깨움. 이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어떻게 당신에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희생>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다소 권태롭기까지 한 일상의 어느 오후에 3차 세계대전이 터졌다는 긴급뉴스가 전해지고 불안과 위기감이 엄습합니다. 3차 세계대전이란 명실공히 핵전쟁이며 그것은 마지막 전쟁, 모든 것의 괴멸일 테니까요. 노교수 알렉산더는 평생 처음으로 신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지요. 세상을 평화롭게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최후의 희망을 위해 그는 하녀 마리아와 동침합니다. 현실과 환幻,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지요….
이 단순한 줄거리는 그러나 정밀하게 선별된 시간의 음영 속에서 유장한 자기의 리듬을 타고 흐릅니다. 시간의 문을 열자 시간이, 그 문을 열자 또 시간이…. 흘러가는 화면에 대치하여 고립적으로 이 시간의 문을 열고자 안간힘을 쓰거나 분석의 잣대로 이 문의 재질과 크기와 두께를 재려는 관성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는 지치게 되지요. 문제는 개아個我를 버림으로써 개아를 얻는 일입니다.
어느 순간, 영상 저 편 시간의 미로를 헤매다 문득 그 소롯길에 심어진 한 그루 죽은 나무가 내 안에서 발견될 때, 나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습니다. 맙소사!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말로 표현하자면 이를데 없이 유치해지는 어떤 소마 상태에 나는 문득 들어가 버린 겁니다. 그 때 내 눈 앞에선 희부윰한 새벽 안개 속으로 드러난 한 줄기 길을 따라 알렉산더가 자전거를 끌고 마리아의 집으로 가고 있었지요. 마리아와 동침하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구하러 미치광이처럼 길을 나선 노교수의 뒷모습. 정지한 듯한 카메라 앵글 속에는 어떤 장식도 기교도 현란한 수사의 아라베스크도 없었으며 단지 한 절실한 영혼의 무늬가 입김처럼 배어 있었지요. 나는 울고 있었구요. 후훗, 졸다가 깨어나 돌연 눈물이라니요.
때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더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나 봅니다. 진실…, 이 감당하기 힘든 말을 천천히 발음해보고 나는 쪽창을 열어 하늘을 봅니다.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예술은 태어난다고 하던가요. 삶의 배면을 흐르는 진실과 자유와 아름다움에의 추구, 기실 모든 정직한 예술행위는 구도求道의 과정인 것입니다. 모순과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삶이라는 난파선 위에서 한 예술가가 지난한 싸움을 벌여갈 때, 그의 투쟁에 있어 유일하게 확고부동한 단초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창조 행위 속에서의 비타협성뿐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는 세계를 구원할 수도 없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이 명제를 좋아합니다. 현대 대중문화의 숱한 폐해 속에 부박하게 표류하는 기형의 영혼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떠나서는 그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대중문화 (‘대중大衆’이란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개념입니까)라는 재앙 앞에서 우리는 자기 존재의 근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차단당합니다. 진실로 동경해야 할 것들을 상실해가고 있는 난민들인 우리에게 아직도 예술이 필요한 것은 개아의 구원을 위해 개아를 버려야 할 지난한 드라마가 가장 핍진하게 현현할 수 있는 장이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향한 비타협적인 구도의 길. 이 고독한 길의 아들은 도저한 작가주의 영상으로 부박한 내 영혼을 쳤습니다.
95년, 풍문으로만 듣던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첫개봉되었을 때 나는 두드러지는 두 부류의 관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렵다, 내 취향이 아니다, 저 지루하고 느린 롱테이크의 카메라를 견뎌야 하는 이유가 뭐냐, 일반 대중의 정서를 무시하고 있다, 는 것이 그 한 부류였습니다. 현대를 사는 대중들의 정서는 많은 부분 다양한 매체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미디어와의 접촉 빈도수가 대중의 기호를 만들어 간다는 말은 팔할이 사실입니다. 이 다양한 매체들의 운동 원리가 이윤의 창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때, 소위 예술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 주체 사이에는 불가피한 공모가 내재되어 있는 셈입니다. 대중의 부박한 소비 취향이 저급한 문화의 생산을 야기하며 그 역逆 역시 똑같이 작동합니다. 단 한 순간의 일별로 어렵다,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다, 는 선고를 내리고 한 예술가의 미적 이상을 향한 싸움이 외면당한다면 인간에게 예술은 밑빠진 독인 셈입니다.
물론 나는 이상한 종류의 선민의식으로 포장된 또 한 부류의 관객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소위 영화 매니아를 자처하고자 하는 이들, 자신의 내공을 인정받기 위한 무슨 통과제의를 치르듯, 〈정석 수학〉을 떼듯이 타르코프스키를 떼러(!) 모여든 문화탐식가들. 그들에게 가파른 세기를 살아낸 한 예술가의 위기의식은 과연 어떤 울림으로 다가갔을까요. “인류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면서 다른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항상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지. … 우리의 문명은 처음부터 죄악 위에 세워졌어. … 늦었어, 너무 늦었어!” 알렉산더의 독백 뒤로 말 못하는 아들 고센은 들꽃잎을 입에 물고 어린 짐승처럼 네 발로 풀밭과 나무 사이를 기어 다니지요. 이 절망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이 침묵 속에 양각시키는 고요한 절규. 물질주의에 맞선 영혼의 싸움을 옹호하는 이 고독한 구도자는 영성靈性의 결핍상태에 대한 자기 반성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화작가로서, 영상으로 말하지요.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말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 내가 영화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또 향상시키는 것” !
이라고 말하는 그의 고집은 예술가로 살기를 선택한 모든 이들이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야 할 최후의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딛고 선 자기 그림자가 자신의 출구일 수밖에 없는, 한 그루 죽은 나무의 꿈꾸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