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에 의하면, 석가가 입멸한 후 사리를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를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고 한다. 이 때의 탑은 사원 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고 다니는 길에 세워져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 이 시기 초기의 탑이 어떤 형식이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승려의 간섭 없이 재가 신도들에 의해 관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아쇼카왕(As 、oka, 阿育王, 기원전 268-232년 재위)이 인도를 통일하면서 기원전 3세기 전후에 인도 전국에 많은 탑을 세우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산치(Sanchi)탑은 유명하다. 이와 같이 초기의 탑은 사원 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독립된 시설물로 건립되어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의미와 형식도 변하며 가람을 형성하는 요소의 하나가 된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佛塔과 출가 승려들의 사리를 안치한 승탑僧塔으로 구분된다. 중국에서는 불탑과 승탑을 구분하지 않고 스투파·탑파·탑·부도浮圖·부도浮都·부도浮屠·불도佛圖 등으로 부르나 우리나라에서는 불탑은 탑파·탑, 승탑은 부도로 부른다.
탑은 일반 건축물과 같이 실용적인 목적에서 조영된 것이 아니다. 경건하게 예배하려는 종교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반 건축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형적으로 다양하다. 또, 승도들은 탑을 세우고 탑을 공경하는 것을 큰 공덕의 하나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순금 천만 단段을 보시하여도 공경스런 마음으로 불탑을 세우는 것보다 못하다.”(《승기률僧祇律》)고 생각하며 광범위하게 탑을 세웠다.
우리 나라의 탑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에서 형성된 불교사원의 배치형식을 수용하면서 조영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던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중국의 불교는 계행을 중시하는 불佛 중심의 불교였다. 따라서 그 당시의 탑은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탑은 사원의 가장 중심되는 곳에 세워졌고 승도들은 탑을 돌면서 예배의식을 행하였다. 소위 말하는 탑돌이(circumambulation, 繞 , 回繞)가 그것이다. 그러나 수·당시대가 되면서 중국의 불교는 의리義理를 더 중시하게 되는 법法 중심의 불교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불교 교리를 널리 펴고 강의하는 데 필요한 불전과 강당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탑이 사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점점 약해졌다. 사리를 중요시하는 불 중심의 불교에서 경전과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법 중심의 불교로 바뀌면서 탑과 불상 속에는 사리뿐만 아니라 경전도 봉안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탑은 그것을 조영하는 재료에 따라 목탑·석탑·전탑으로 구분된다. 층수에 따라 3층탑·5층탑·7층탑·9층탑·13층탑 등으로 나누며, 또 평면 형식에 따라 사각형·육각형·팔각형·원형 탑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고구려 때의 탑은 발굴한 절터의 배치형식을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된다. 이들 터에는 공통적으로 중앙에 팔각형 평면으로 된 목탑 자리가 있고, 이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 주위에 각각 금당이 형성된 이른바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식 배치를 하고 있다. 고구려의 탑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초기의 것은 목탑이었음에 틀림없다.
백제의 탑은 고구려와 다르고, 가람배치 역시 다르다. 부여·익산 일대의 백제 시대의 사찰 터가 발굴되면서 밝혀진 백제사찰의 기본 배치형식은 남북방향 일직선상의 중심축에 남쪽에서 차례로 중문·탑·금당·강당을 배치하고 둘레로 회랑이 조영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식 이다. 백제의 탑은 초기의 것은 목탑이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석탑을 더 많이 조영하게 된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초기의 실례로 익산 미륵사 석탑이 있다. 이 탑은 당시의 목탑을 본으로 하여 돌을 사용하여 세운 탑이다. 1층은 목조 구조물과 같이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었고, 각 층의 탑신은 기둥과 벽면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구조와 기법은 충실하게 목탑을 모방하여 석재로 번안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 석탑의 뒤를 이은 석탑이 부여 정림사지의 5층석탑이다. 이 탑에 이르러서는 목탑을 직설적으로 석탑으로 번안하는 단계를 벗어나 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려 조형적으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백제 계열의 석탑양식을 구축한다. 정림사탑은 2단으로 조성된 기단 위에 5층 탑신과 옥개석이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또 처마 양끝은 곡선이 약간 가미되어 위로 쳐들었으며, 옥개석 아래는 목구조를 추상화시킨 형상으로 처리하여 돌이 지닌 특성을 잘 살린 석탑의 조형미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정림사탑을 전형으로 하는 계통의 탑은 후대에도 옛 백제지역에 건립되어 그 전통이 이어진다.
신라시대에 석탑이 나타나는 것은 백제보다 시기가 조금 떨어지고, 또 석탑의 원형이 목탑이 아니라 전탑이다. 경주 분황사의 탑·의성 탑리의 5층탑은 모두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 형태로 만들어 건립한 탑이다. 이러한 모전석탑模石塔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의 석탑은 삼국통일시기를 전후하여 정형화된다. 이렇게 형성된 신라계열의 석탑은 옥개석 밑이 층단을 이루었는데, 이는 백제계열의 석탑이 옥개석 아래를 목구조를 추상화시켜 처리한 것과 대조가 된다. 신라 석탑 중에서 통일 초창기에 세워진 감은사의 3층석탑은 대표적이다. 감은사탑이 완전한 조형미로 완성되어 나타나는 탑이 불국사 석가탑이다.
통일신라 때의 수도 경주에는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은 기러기 떼 날듯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통일 초창기에 세워진 감은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사원의 탑은 단탑에서 쌍탑으로 되고, 그 이전의 단탑시기보다 탑의 중요성이 떨어진다. 그 후 화엄사상, 선사상 등이 통일신라 사회에 정착하면서 탑은 불전 앞 마당 중심에 세워지지 않게 된다. 굳이 세워지더라도 중심축에 맞추어 세우지는 않았다.
해인사 경역境域에는 탑이 네 기基 있다. 절 입구의 길상탑吉祥塔, 대적광전 앞 정중삼층석탑庭中三層石塔, 명부전 앞 정중소석탑庭中小石塔, 판전 뒤의 수미정상탑須彌頂上塔이 그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된 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 밖 동남쪽으로 약 50미터 되는 곳에 위치하였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지나 일주문 계단으로 꼬부라져 올라가기 전 오른편에, 일반적인 사찰건물 배치와는 무관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66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탑지塔誌와 조그만 탑 157개가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탑지의 앞면에는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뒷면에는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가 기록되어 있다.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 상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됨은 물론이고, 탑의 건립 내력에 대해서도 알게 한다.
탑지에 의하면, 이 석탑은 신라 진성여왕 3년(889)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내란으로 인하여 해인사 주변에서 횡사한 승속僧俗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해인사 별대덕 훈혁 스님이 주관하여 진성여왕 9년(895) 7월 기문을 짓고 세웠다고 한다. 탑지에는 탑의 위치는 운양대이고, 돌로 된 삼층탑인데, 높이는 1장 3척이며, 황금 3푼, 수은 11푼, 구리 다섯 덩이, 철 2백 6십 근, 숯 80석이 들어갔다. 경비는 나락 120석이 들어갔으며, 장사匠士는 승려 난교蘭交와 청유淸裕라고 적혀 있다. 탑지의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에는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승군僧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이다. 길상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그 가치가 재평가되어 1996년 5월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되었다.
정중삼층석탑은 3층으로 조영된 탑의 형식과 옥개석 받침을 5단으로 처리한 점 등 세부 기법에서 9세기 신라 석탑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해인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기단은 본래 2단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26년 기단부를 크게 고쳐 1단이 추가되어 현재와 같이 3단이 되었고, 난간도 이 때 둘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석탑은 그 조형미의 빼어남에도 불구하고 국가 지정 문화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 7월에 중수하여 탑 안에 대장경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488년에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석탑은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잇는 중심선상에서 동쪽으로 약 6m 비켜 서 있다. 이렇게 비켜 서 있음으로 해서 이 탑은 구광루 누각 밑을 지나 대적광전을 향하여 진입할 때 공간감을 증폭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정중삼층석탑의 위치에 대하여 풍수지리와 연관시켜 풀이하기도 한다. 탑은 인체의 심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약간 비켜 서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해인사 가람 형국을 이루는 좌청룡, 우백호에서 청룡이 되는 지세가 허虛하다고 해서 이를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왼쪽인 동쪽으로 치우치게 탑을 배치하였다고도 한다. 상징적으로 탑은 배의 중심인 안뜰에 위치하여 배의 요동을 막는 역할도 한다. 원래 석탑 서쪽으로 수각이 있었는데, 광복 후에 이를 메우고 이전시켰다. 우물은 배의 밑바닥을 훼손하는 것과 같으므로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해서 메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해인사 가람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지리적인 내용과 습합되어 변모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지리적인 내용으로 재해석되었다고 봐야 한다.
석탑 남쪽에 위치한 석등은 정중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네모진 대석臺石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여덟 잎의 복련覆蓮이 새겨졌다. 석간石竿은 8각으로, 1926년 석탑 개축 때 새로 보충된 것으로 석등 전체와 균형이 맞지 않는다. 팔각으로 된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등창이 나 있고, 창과 창 사이에 신장상을 양각陽刻했다. 석등과 석탑 사이에 있는 정례석頂禮石은 본래 석탑 서남쪽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명부전 앞에 있는 작은 석탑은 1926년 퇴설당 동쪽에 도괴되어 있던 탑편 잔여분과 거덕사擧德寺에 파괴되어 있던 탑편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판전 뒤 언덕에 있는 수미정상탑은 1986년에 세운 탑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돛대바위라고 불려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해인사가 자리잡은 가야산의 형세는 마치 거대한 방주와도 같다고 한다.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 가야산 중봉의 마애석불은 선장, 남산 제일봉의 기암들은 삿대바위, 판전 뒤에 우뚝 선 바위는 돛대가 된다. 그런데 수미정상탑 자리에 있던 돛대바위는 1926년 대적광전 앞 축대공사 때 깨어져 석재로 사용되고 밑 뿌리만 남아 있었다. 파괴된 지 60년이 되던 해에 일타日陀 스님이 돛대바위를 복원하는 뜻으로 수미정상탑을 건립하였다. 탑의 모습이 팔각 칠층인 것은 칠각지 팔성도를 상징한 것이고, 연화대좌는 미진 세계가 그 안에 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