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다가 삼십 년째 자동차 교습을 한다는 분에게 운전 연수를 받았다. 차 뒷창에 달린 ‘초보운전’ 글자 때문인지 사방의 차들이 빵빵거리며 경적을 울려대고 그 바람에 조급증에 두려움까지 가득해져 운전대에 온갖 힘을 다 주고 앉아 아어쿠, 어머나, 얼랄라 하는 의성어만 남발하고 있을때 교습선생이 넌지시 물어왔다.
“팔만대장경, 그 많은 경판 속에 담긴 뜻을 한마디로 줄이면 뭘까요?” 넌센스 퀴즈인가 했더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긴 한마디로 큰스님의 법문과도 같았다.
“팔만대장경에 있는 부처님 가르침을 한글자로 표현하면, 마음 심心자라구요.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운전을 하려고 합니까?”
차 운전 교습 삼십 년을 하면 부처님 교리에 도통해 버리는 것일까. 그가 어떻게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단 한 단어로 내게 설명할 수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마음 다스리기가 어려운 걸. 난 여전히 운전대 앞에 앉기보다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야, 그걸 운전이라고 하냐, 깜빡이 좀 켜고 다녀라, 어쩌구…” 하면서 구업짓는 일이 더 마음 편하다.
요즘 불교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황룡사 대종을 찾아서란 작품을 만들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몇 줄 외엔 황룡사 대종에 관한 그 어느것도 역사속에 전하지 않는다. 국립경주박물관 앞뜰에 장엄한 모습으로 자리한 성덕대왕 신종보다 무려 네배나 무거운 중량이었다는 범종.
그 짧은 몇 줄을 불들고 역사 속을 지치도록 헤매고 있지만 신라 종에 담긴 하나하나의 의미와 마주하면서 난 다시금 선조들의 지혜 앞에 감탄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하지 않는 종이지만 그보다 십칠 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글귀 하나하나는 불국토를 현세에 구현하기 위해 애쓰던 신라인들이 추구하던 그 세계가 어떤 세계였던지를 가늠케 한다.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고르게 괴로움을 떨치고 깨달음을 얻기를 소망하는 한구절 한구절들… 분명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없는 황룡사 대종도 똑같은 염원으로 조성됐을 것이다.
범종, 흔히 천상의 소리라고 이야기한다.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그윽한 울림의 소리라고도 한다. 곧,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만들어내기 위해 종을 조성하는 것이다. 일승의 원음, 이는 다름 아닌 넓고 깊은 자비로 온누리에 울려 퍼지는 부처님의 목소리를 말한다. 가득한 진리로 법계에 울려 퍼지는 간곡한 부처님의 목소리, 그것이 바로 범종의 소리인 것이다.
부처님 목소리로 가득한 것으로야 고려대장경이 으뜸일 것이다.
대장경이란 경, 율, 론. 곧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경과 교단과 불제자들어 지켜야할 계율, 그리고 제자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명철하게 연구한 논서들을 모아 놓은 총서를 말한다. 그래서 대장경을 삼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팔리어로 경, 율, 론을 잘 담아 놓은 광주리라는 의미로 트리 피타카tri-Pitaka라 한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란 이 셋을 두루 꿰뚫고 있는 스승을 가리킨다.
고려대장경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완본으로 전해지는 세계 유일본이다. 팔만천이백쉰여덟 장속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초조대장경, 의천스님의 속장경, 그리고 거란본과 당송시대의 대장경 내용이 담겨 있다. 교리와 사상, 철학과 역사, 외에도 풍속과 예술, 법제, 금석 등 인류문명사적 자료들이 방대하게 담겨 있다.
십삼세기 이전의 세계 불교사상을 총체적으로 확인하려면 누구라도 고려대장경으로 그 내용이 파악 될 뿐이다. 그것은 동양에 남아 있는 삼십여 종의 한역 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수기스님의 책임하에 주도면밀하게 편집되고 교정된 편찬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은 장경각의 판가에 천자함 순으로 배열돼있다. 천, 지, 현, 황 등으로 이어진 천자문 배열 순서는 일련 번호의 역할을 한다. 하늘 천天자 천함에서 639함 고을동洞자 사이의 대장경은 총1496종 6568권으로 구성돼 있다.
고려대장경은 고뻔 어떤 체계로 이루어졌을까? 세계에서 최초의 목판 대장경은 송나라의 개보칙판 대장경이다. 체계적인 경전 목록이라는 당나라의 개원석교록에 의거해 편찬되었다. 우리 고려대장경의 편집 체계도 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려대장경에는 어느 경전이 기장 앞머리에 실려 있는 것일까? 바로 육백 권으로 이루어진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고려 대장경 가운데 가장 긴 경은 육백 권으로 이 경은 천天함에서 내奈함에 이르는 사백육십여만자로 구성돼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은 국가적인 재난이 있을때마다 신앙적으로 존중돼 오던 경전이다. 바로 이 「대반야바라밀다경」이 고려대장경의 첫머리에 배열된 것은 어쩌면 몽고침입이라는 민족적 고난을 이겨내려는 염원을 담았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이백육십여 자로 이루어진 반야심경 경판은 독립된 대장경 가운데 가장 짧은 경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윽하게 깃들어 있는 고려대장경. 그 내용이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으로로 번역해 현재 백이십여 권이 출간되었다. 이 한글대장경을 바탕으로더 쉽게 정리된 불서들도 서점의 불교코너에는 즐비하다.
불교를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경전 한 줄 읽어본 일 없는 불자들이 숱한 현실이다. 타종교인이 옷소매자락이라도 붙들고 불교 얘기 좀 해달라치면 얼굴부터 벌개져 돌아서기 바쁘다. 왜? 공부한 것이 없으니 누구한테 명징하게 불교이야기 한마디 해 주기란 불가능하다.
고려대장경을 사경하고 판각하던 고려인들은 그 한글자 한글자에 합장배례하며 작업에 임했다지 않던가. 그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진리를 경판 속에 담았던 고려인의 정성어린 땀방울을 기억하면서 대장경 펼쳐 읽기를 생활화하는 일이 오늘 우리의 몫이 아닐까. 넓고 깊은 자비로 온누리에 간곡히 전한 부처님의 가르침. 그 팔만천이백쉰여덟 장에 담긴 부처님의 목소리를 음미하고, 수지 독송하고 이를 실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진리를 이 땅에 구현해 오늘의 현실 위에 불국토를 건설하는 첫걸음일 터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