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이신 황수영 선생님을 모시고 고고미술동인회의 진로 등을 의논하였다. 먼저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고고미술지에 발표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충청북도 제천의 월악산 계곡을 찾게 되었다. 그 곳에는 사자빈신사지석탑(보물 제94호)이 서 있는 옛 절터가 있고 또 산수가 좋아 더위를 식히기에도 알맞은 까닭이다.
오랜만에 찾은 곳이었으나 시골 자갈길은 변함이 없었다. 충주에서 황강을 경유하여 제천으로 가는 버스 편을 이용하여 황강에서 하차, 월악산 계곡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 곳으로 가는 길은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30리 길을 걷다보면 땀투성이가 된 몸을 식히기 위하여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길옆을 흐르는 계곡에서 몸을 씻으며 쉬기도 하였다. 그 때의 시원하고도 맑은 물과 아름다운 주위 산천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녁 때쯤 목적지인 사자빈신사지에 도착하여 스님을 찾았다. 마침 김강권金康權 화상(당시 71세)이 계셔 마음놓고 하루를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이 곳을 찾았으나 스님이 그 때마다 출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당시 사자빈신사 옛터는 콩밭이었고 석탑 가까이에 농작물이 무성하였으며 하층 기단부까지 흙속에 묻혀 있었다. 김강권 스님의 말씀이 본래 자기는 이 곳에서 좀 떨어져 있는 덕주사德周寺의 주지였는데 6·25 때 절이 타버려 이 곳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석탑이 하나 있어 옛 절터가 분명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처럼 작은 토굴을 짓고 기거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초하루와 보름, 즉 한 달에 두 번씩은 반드시 덕주사 옛터를 찾아 큰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것이었다. ‘큰부처님’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어떠한 부처님이냐’고 물었다. 덕주사 북쪽 절벽에 새겨놓은 큰부처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거대한 마애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덕주사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권14, 〈충주목 불우조〉에 ‘덕주사 재월악산하 언전덕주부인 건차사인명지 德周寺 在月岳山下 諺傳德周夫人 建此寺因名之’라는 기록이 있어 덕주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제말기에 덕주사 주변에서 높이 1.5척 정도의 범종과 금구禁口가 출토되었는데 당시 제천경찰서 일본인 서장이 직접 찾아와서 가지고 갔다는 말도 들었다.
범종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비천상과 꽃 문양 등의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졌으며 금구에도 명문이 있었다고 한다. 황수영 박사의 논문 ‘신라고려재명금구고新羅高麗在銘禁口考(황의돈선생고희기념사학논총)’에서 소개한 덕주사금구德周寺禁口가 이것이 아닌가 하고 주목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사자탑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 개인땅으로 곡식을 잔뜩 심어 놓아 절터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주변 일대를 국가에서 매입하여 석탑 역시 수습 정리하여 옛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만을 간직하게 되었다. .
전날밤에 들은 큰부처님이 궁금하여 주지스님께 함께 덕주사까지 가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초하루 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쾌히 승낙하시어 길을 나섰다. 덕주사까지 십리는 못 되지만 꽤 먼거리라고 하면서 걷기 시작하였다. 사자탑 절터에서 다시 송계리 쪽으로 내려와 골짜기 물이 합수되는 곳에서 왼쪽 골짝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황강쪽에서 올라오자면 이 합수머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덕주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사자빈신사 쪽이 된다. 비가 온 뒤여서 물이 많아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 매미소리 등이 어울리어 가히 산사山寺로 향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낮은 폭포에는 고기가 뛰놀고 계곡 물속 돌 밑에는 가재가 기어다니는 곳을 한참 올라가니 석문石門과 석성石城의 성벽이 보였다. 석문은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깨끗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짜임새 있게 축석하였는데 그 곡선이 유려하였다. 석성은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장대한 성벽이었다. 이 산성이 덕주산성이다.
십분, 이십분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초행길이어서 그런지 멀게만 느껴졌다. 가파른 길을 올라갈 땐 숨도 차고 꽤 힘이 들었다.
떠난 지 한 시간 가까이 되었을 무렵 멀리 부처님의 상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린 뒤 주지 스님의 뒤를 따라 풀숲을 헤치고 널찍한 대지를 지나 또 한 단의 대지 위로 올라 부처님 앞에 서서 3배를 할 때는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법당지 동쪽의 거대한 화강암 남쪽벽에 정면 위치하고 있는 전체높이 약 13m의 거대한 입상으로 머리부분은 부조浮彫되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거의 선각線刻에 가깝다. 머리부분 양쪽 암벽에 네모난 구멍이 여러 곳에 있는데 이것은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이 네모난 구멍이 불상을 조각하기 위하여 비계를 매었던 흔적인지, 혹은 전실 구조가 있었던 흔적의 하나인지는 더 세밀한 조사를 진행해야 확실해질 것으로 안다.
이 거대한 마애불상의 조성연대는 상호 각부와 의문의 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되며 그 후 ‘덕주사마애불’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법당에는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그 옛터에 머리부분을 결실한 파불 1구가 있었다. 뒷날 주지 스님의 토굴로 모셔가도록 하였다. 또한 법당 앞뜰에는 전체높이 1.75m의 부도 1기가 건립되어 있었다. 현재 주지 스님의 토굴도 없어지고 성곽 못 미쳐 산기슭에 새로운 덕주사가 중창되어 있다.□